김순권 옥수수 박사도 정치질을 당했었다.
세상에 잘 알려진 옥수수 박사 김 순권 교수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UN 국제열대농업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of Tropical Agriculture, IITA))에서 17년간 근무하며 아프리카의 식량문제 해결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몇 차례 노벨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 후에도 아프리카, 동아시아, 중남미 지역을 돕기 위한 친환경 옥수수 육종을 계속해왔으며, 지금도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그의 화려한 경력 중에서 주요한 몇 가지를 아래와 같이 뽑아보았다.
1979년 나이지리아에서 아프리카 국제열대농업연구소(IITA) 옥수수 육종연구관이 됨. 병충해에 강한 옥수수 종을 만들어 내었음. 나이지리아 농민들의 소득과 건강이 좋아짐.
1992년 나이지리아 명예추장(마이에군: 가난한 자를 배불리 먹인 자)
1992년, 1993년, 1997년: 노벨 평화상 후보 추천(나이지리아 포함 아프리카, 아시아국 등 대한민국 국회 및 국제기구)
1995년 나이지리아 제2의 명예추장 (자군몰루 : 위대한 승리자)
1995년 1996년: 노벨 생리학, 의학상 후보 추천(하와이 대학교, UN/FAO, 대한민국 국회 등)
1998년 국제옥수수재단 이사장, 북한옥수수심기범국민운동 상임공동대표 취임
김 박사는 1992년, 1993년, 1997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3번 추천되었고, 1995년 1996년, 노벨 생리학, 의학상 후보로 2번 추천 되었다. 무려 5번이나 추천되었던 경력이 있다. 언젠가는 그의 공적이 역사적으로 인정되리라 믿는다.
그는 1979년에 2년 계약으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있는 UN 국제열대농업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of Tropical Agriculture, IITA)에 갔다가 무려 17년간 현지에 머물면서 연구생활을 하였다. 그는 연구를 시작한지 9년 만에 1992년, 악마의 풀이라는 스트라이가(striga)를 이기는 품종 10개를 가려냈다. 스트라이가에 최소한의 영양분을 주며 공생할 수 있는 신품종을 개발한 것이다. 이 결과 73%에 이르던 스트라이가 피해 정도는 5%로 줄어들었다. 그가 세운 가장 큰 업적은 악마의 풀인 스트라이가와 공생하도록 해서 벌레와 가뭄에도 강한 옥수수 품종을 현지의 주식량 자원으로 개발한 것이다. 나이지리아는 원래 옥수수 100만 톤을 생산하고 100만 톤을 수입하던 나라가 소위 옥수수 혁명 이후에는 연간 700만 톤 옥수수를 생산해서 200만 톤을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스트라이가에 적응한 품종, 위축바이러스에 적응한 품종 등 여러 옥수수 신품종을 개발하여 아프리카 중남부의 옥수수 농업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아프리카에서 두 번이나 명예추장으로 추대되었고 나이지리아의 동전에는 그가 개발한 옥수수인 '오바 슈퍼 1호'의 모습이 새기게 되었다. 그가 개발한 '오버 슈퍼 원'이라는 신품종은 나이지리아 농가의 수익을 높이고 ‘아프리카의 기아를 해결 할 수 있다’는 평을 받았다.
아프리카 생활 17년을 보내고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에 협력하고자 귀국을 결심하였다. 1995년 말에 귀국하여 모교인 경북대학교 농학과 교수로 옥수수연구를 계속했다. 귀국 당시 시대적 상황은 1989년 소련해체를 전후하여 탈냉전시대가 시작되면서 사회주의권의 개혁개방과 사회주의권내 경제협력이 파탄 나고 위성국가들도 각국도생의 전변과정에서 북한도 극심한 식량난을 겪어야 했다. 더구나 1995년부터 시작된 북한지역의 자연재해는 북한의 경제난을 한층 더 심화시켰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북한은 무역시장의 봉쇄와 식량의 부족, 전력생산의 급감, 게다가 미국의 군사적 압박이 겹치면서 북한 전역이 일제강점기에 겪었던 ‘고난의 행군’을 회상하며 살아야하는 어려운 시기이었다. 따라서 동포의 어려움을 헤아려져 남북화해의 가능성이 분단이후 가장 고조되는 시기이었다. 이 시기에 귀국한 김 박사의 동포애는 ‘물을 만난 것’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북한의 기아문제에 대비한 옥수수 신품종 개발에 들어갔다. 북한에서는 벼농사 대신 밭농사의 비중이 높았고, 특히 옥수수는 주요한 곡물 중 하나였다. 이때 ‘평화의 옥수수’라는 프로젝트가 추진되었고 김대중 정부(1998~2003)에서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통일부 인터뷰 자료에 의하면(통일영웅에게 묻다. 7편: 국제옥수수재단 김순권 박사, 2021.11.17) 1998년 1월 23일, 김영삼 정권(1993~1998) 말기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당선되고 난 뒤에 5번 초청장이 오고 난 뒤에야 정부의 허가로 북경을 통해서 처음으로 북한을 가게 됐다(1998.1). 그런데 김대중 정권이 바뀌자 소리 소문 없이 그는 매스컴에서 사라졌다. 사연은 1997년 대선 때 '세계적인 옥수수 박사'라는 명성을 내세워 고향인 경상도에서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는 지역정서와 달리 김대중 후보를 자발적으로 지지한 여파의 후유증 이었다. 그는 남북이 분단되고 영호남이 갈라지는 상황이 너무 안타까워 그가 자기 한 몸을 희생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 그의 심경이었고, 김대중 후보로부터 방북을 적극 지원해주겠다는 약속도 받았었다고 밝히고 있다.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고, 당선자 시절인 1998년 1월 초 김 박사는 북한에 갈 수 있었다(최보식이 만난 사람, "北韓 지원 비료 값을 떼이고… 내가 물정 몰라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해", 조선일보, 2015.01.26).
김 교수는 1998년 1월, 북한 첫 방문을 시작으로 슈퍼옥수수 종자 개발을 위해 2002년까지 59차례 왕래하고 총 370일 동안 머물면서 북한의 식량난 해결을 돕고자 옥수수 생산 증대 농법을 전수했다. 그는 5만여 종의 교배종을 만들어 북한 내 25개 연구농장에서 5년 동안 시험했다. 그 가운데 12종을 최종 선발해 협동농장에서 재배토록 했다. 또 다수확 품종인 ‘수원 19호’를 가져다 심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잡종 옥수수인 '수원19호'가 '강냉이19호'라는 이름으로 북한에 보급되었다. 이 품종은 가뭄에 강하고 수확량도 높아 북한의 옥수수 생산이 연 100만 톤 이상 크게 증가되었다. 또 기존에 재배되지 않던 콩과 수수, 조 등을 심게 하는 등 북한 농업 전반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김대중 정부를 계승한 노무현 정부(2003~2008)에서 활동이 끊긴 것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남해화학/민화협 관련 '비료 값' 사건이후 2002년 대선에서는 노무현 후보와 대결하는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2000.12.9). 그 뒤로 북한에서 초청장이 오지 않았다. 3년 지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후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옥수수 협력은 그런대로 근근이 이어져 왔다.
2003년 이후 그의 연구 활동은 남아시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 지역의 옥수수 재배에 가장 무서운 병은 조균류(藻菌類)의 곰팡이가 기생하여 생기는 노균병(露菌病)인데 이 병에 강하도록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신품종이 육종이 되었다. 남아시아 ASEAN 국가들에는 우리 외교부 지원으로 2015년과 2016년에 국제옥수수재단 캄보디아에 센터에서 육종된 ‘꿀초당옥수수’ 종자를 아시아 10개국에 주었다. 바로 ‘꿀 옥수수’라고 불리는데 것인데 생으로도 먹을 수 있다. 당이 평균 15% 정도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린이, 노약자, 임산부가 먹어도 좋고, 북한에 가서 그것을 보급하기도 했다.
김 박사의 옥수수 국제협력은 아프리카의 식량난,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에 도움을 주고자하는 거룩한 인류애가 동기가 되고 바탕을 이룬다. 그 결과 아프리카에서 두 번의 명예추장 추대, 5차례에 걸친 노벨상 후보와 같은 명예와 존경이 뒤따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헌신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의 소망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원인은 무엇일까?
아프리카 가뭄과 기근 문제를 보면 10년 주기성이 있고, 널따란 아프리카 대륙의 특성상 국지적 성공이 전 대륙에서의 성공을 담보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국지적이나마 굶주린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는 ‘물고기 잡는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아프리카 기아의 또 다른 원인은 뿌리 깊은 부족주의와 갈등, 가난퇴치를 위한 기본 인프라의 부족, 국제곡물 메이저*들의 이익확보 전략 등은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다.
북한의 식량난에 대해서는 통치체제에 내재된 구조적 문제, 남북갈등과 한국 정치계의 갈등으로 연계되는 소아적 대응 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노벨상에서도 후보로 머무르는 것이 노벨상을 받는 것보다도 더 어려워 보인다. 노벨상을 목표로 하지는 않겠지만 결과로 받아 드려야할 것 같다. 노벨상은 주어야 받는 것이다. 노벨상 수상여부를 떠나서더라도 김 박사의 옥수수 업적은 역사가 기릴 것이다. 지난 날 나라 안팎에서 저명한 과학자로서 정치질에 이용당했던 것이 김 박사의 연구에 전화위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김 박사는 앞으로도 실험농장에서 농립(農笠)을 쓴 모습으로 남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3.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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