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대 목포의 교육
1945년 이래 한국 교육은 미국 교육의 영향을 받아왔다. 해방 직후 미군정 당국과 듀이(dewey)의 진보주의 교육을 위해 제시했던 교육 운동은 신교육 운동이었다. 신교육운동은 교육 내용ㆍ방법에 있어서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 운동을 거의 모방한 것이었다. (1) 해방은 독재의 잔재를 불식시키고 민주주의 이념 하에 새 교육의 전통을 수립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교육적 의미가 크다. 먼저 민족의 전통 이념인 홍익인간 이념을 교육이념으로 제정할 수 있었던 것은 2차 대전 이후 세계 교육의 동향이 민주주의 이념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분위기가 조성 되었던 데서 가능했다. 둘째로 오랜 전제 정치와 식민치하에서 탈피하여 민주적인 교육 제도를 수립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여 주었다는데 의의가 있으며 특히 1950년 3월 10일에 공포된 6-3-3-4제의 단성형 학제는 민주주의 이념에 근거하여 교육의 기회를 개방할 수 있는 제도이고 인간의 발달 단계에 부응한 학교 교육 제도라는 관점에서 비교적 만족스런 제도이다. 아울러 교육 행정이 내무 행정으로부터 독립하여 교육 자치제가 마련되고 실시되었다는 것은 교육 내 ㆍ외적으로 장족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로「새교육」으로 불리었던 교육 운동이 전개되면서 과거의 전통적인 교육을 탈피하고 아동ㆍ학생의 개성이 존중되고 획일적인 교육으로부터 다양성 있는 교육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할 수 있었다는 것은 획기적인 진보라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개혁기를 거친 학교 교육은 1970년대 거친 학교 교육은 1970년대 이후의 발전기로 접어들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부각된 교육의 문제는 중학교 무시험제도, 국민교육헌장의 반포, 고교평준화제도, 실험대학의 실시 등을 들 수 있으며, 특히 70년대의 교육의 성격은 근대화와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한국적 교육의 탐색이었다고 볼 수 있다. 급속히 진행되는 경제 성장 속에서 물질적 성장과 정신적 조화라는 과업을 교육이 짊어지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대두된 교육열 문제가 80년-90년대에 이르면서 더욱 과도하게 표현되었다. 그 결과 이미 80년대에 들어와서 「학력 인플레이션」,「고학력 시대」라는 용어들이 자주 사용 되었고 과외 문제가 국가적인 관심사로 등장하였다. 1980년 7ㆍ30 교육개혁에서 핵심을 이루었던 내용이 과외 금지조치였으며 최근애도 사교육비 문제가 국가적인 차원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2.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 목포교육
1) 교육 기관(1) 초등 교육 기관 8ㆍ15 해방 당시 초등학교로는 북교초등학교, 유달초등학교, 산정초등학교, 서부초등학교, 중앙초등학교 등 5개 학교가 있었다. 해방 이후 목포 시민들의 자녀 교육에 대한 각성과 의무 교육의 실시 등으로 교육수요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기존 학교만으로는 취학 적령 아동들을 수용할 수 없어 새로운 학교를 연차적으로 설립해야 했다. 1959년 목포 달성초등학교 설립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초등학교(광주교대목포부속초등학교로 개칭), 이로초등학교, 충무초등학교, 놀도초등학교, 달리초등학교, 남초등학교, 서산초등학교, 대성 초등학교, 용당초등학교(용호초등학교로 개칭), 임성초등학교, 삼학초등학교 등이 신설 되었다. 이밖에도 1951년부터 시작 장애자들에게 초등 교육을 시켜오던 목포 맹아 학원이 1963년 12월에 목포 맹학교로 정식 인가되어 유달동 10번지에 개교 하였고 1979년에는 대의동에 특수 교육기관으로 목포소림학교가 설립 되었다.
(2) 중등 교육기관 8ㆍ15 해방 이전에 설립되었던 중ㆍ고등학교로는 영흥학교(영흥 중ㆍ고등학교), 정명학교(정명중ㆍ고등학교)를 비롯하여 목포여자중학교, 목포상업학교 (목포상업고등학교), 목포기계공업고등학교, 문태중ㆍ고등학교, 목포고등학교, 목포여자고등학교(목포공립실수여자학교 →목포공립항도여자중학교 →목포여자고등학교로 개칭)등 이었다. 해방 이후 설립된 학교로는 덕인중학교, 유달중학교, 제일중학교, 청호중학교, 홍일중학교, 항도여자중학교, 중앙여자 중학교, 혜인여자중학교, 덕인고등학교, 마리아회고등학교, 홍일고등학교, 여자상업고등학교, 제일여자고등학교, 혜인여자고등학교 등이다.
(3) 고등 교육기관 목포에 고등 교육기관이 처음 설립된 것은 1950년 6월에 개교한 도립목포상과대학 이었다. 그 후 목포상과대학은 전남 대학교로 흡수되어 전남대학교상과대학이 되었고 1961년 5월7일에 목포 시민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주로 이전되었다. 1964년 구 목포 사범학교로부터 목포교육대학이 설립되었으며, 1978년 목포초급대학으로 개편되었다가 1979년에 4년제 국립목포대학으로 승격하였다. 또한 1950년 개교한 목포수산고등학교가 1956년에 국립목포해양고등학교로 인가되었고, 1973년에 목포해양전문학교로 개개편된 뒤 1979년에는 다시 목포해양전문대학으로, 1993년에 4년제 국립목포해양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71년에는 현 성신간호전문대학의 전신인 골롬반간호전문학교가 개교했으며, 1976년에는 현 성신간호전문대학의 전신인 골롬반간호전문학교가 개교했으며, 1976년에는 목포실업전문학교가 설립 되었다 1979년에 목포공업전문대학으로 개명하였다.
(4) 교육기관의 변화 추이 해방 후 목포 시내 교육기관의 변화 추이는 다음 <표3-15>와 같다. 자료 사정 때문에 1972년 이후와 유치원 및 초 ㆍ중등 교육기관으로 한정 되어 있다.
<표 3-15>목포시 각급 학교수 및 학생수의 연도별 변화
<표 3-15>에 나타난 바와 같이 70년대에 목포 시내 초등학교와 고등하교 수가 각각 3개교 정도 증가한 반면에 전체 학생수에 있어서는 꾸준히 증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2) 교육관련 중요사건 및 특기사항 해방 후 정치적ㆍ사호적인 혼란과 함께 학생 도덕이 타락하고 동맹 휴학이 빈발하며 교원에 대한 배척 및 협박이 증가해 가는 상황에서 목포상업학교 등 목포 시내 6개 중등학교장들이 「퇴진의 변」이라는 비장한 성명서 발표와 함께 연대 사퇴하는 일까지 일어났다.(3) 해방 후 목포 교육에서 특기할 만한 것의 하나가 활발한 성인 교육 활동이었다. 당시 성인 교육 활동은 주로 한글을 깨우치게 하는 문맹 퇴치 운동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문맹 퇴치 운동은 학교나 사회 교육 기관 뿐만아니라 교회나 공장 등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1948년에는 목포 성인 교휵회를 통해 성인 교육 공로자에 대한 도지사 표창이 있었다. 특히 1949년의 도지사 회견 내용 중에는 목포 성인 교육이 남한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창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3)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목포시에 사범대학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요는 특히 인구 15만 명을 헤아리는 목포에 대학 하나 없다는 사실과 많은 도서 출신 학생들의 진학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특히 1962년 11월 30일 목포사범학교를 방문한 농림부 장관이 목포에 교대 유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역설하였고 관계기관에 적극 건의키로 하였다(4) 1964년에 드디어 목포교육대학이 인가되어 2학급 규모의 신입생을 모집하게 되었으며 이후 이 지역 초등교사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목포 교육에서 낙후된 낙도 교육의 문제는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 왔다. 낙도 학교의 구급시설 및 시청각 교육의 효과를 증진시키기 위해 이동 교육청의 발족 문제가 대두되었고 68년도부터는 학교가 없는 도서지역에 의무 교육 혜택을 부여하기로 결정되었다. 구체적으로 20명 이상의 학생이 있는 섬에는 분교장을 설치하고 20명 이하인 섬에는 순회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복식 교육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기 시작하는 등 낙도 교육에 서광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퇴직 교사가 많았고 취학하지 못하는 아동들이 상당수에 이르는 등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도 섬마을 교사를 자원하여 문맹퇴치, 영농교육 및 소득증대 사업 등을 활발하게 수행했던 사례들이 미담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5)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목포 인근 지역 초등학교 4,5학년 학생들의 목포시로의 전입이 급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71학년도부터 실시되는 중학교 무시험 진학 대문이었다. 도서지역 교육에 대한 관심은 70년대에도 계속되었는데 목포 교대와 신안 교육청이 공동으로 여러 개의 도서지역을 묶어서 교육 전진 기지청을 설치하는 방안이 연구되기도 하였으며, 1973년에는 낙도 아동들의 학습을 돕기 위해 신안 교육청이 섬마을에 교육방송국 설치를 계획하기도 하였다.(6) 1978년 2월 17에는 목포교육대학이 13회 졸업식을 끝으로 문을 닫게 되는데 이는 1개도에 1개 교육대학만을 둔다는 정부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1946년에 목포사범학교로 출발하여 1964년 목포 교육 대학으로 인가 되었으며 그 이후로 이 지역 초등교사 양성에 큰 몫을 담당해 왔었다. 목포교대는 78년 3월부터 다시 목포 초급대학으로 문을 열 게 되었다. 70년대 말에 목포 교육에서 특기할 만한 것의 하나가 섬지방 출신 여학생을 위한 기숙사인 청해사의 건립이었다. 1979년 11월 13일을 기해 개관한 청해사는 3층 건물에 34개의 숙실을 갖추고서 204명의 학생을 수용하는 규모로 출발하였으며 섬 지방 출신 여학생들의 교육에 크게 기여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