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울이 큰 뜻을 품고 상경한 것은 25세(1929년 9월) 때였다. 매일신보사 주최 <조선명창연주회>에 명창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관객이 구름 같이 몰려들었다. 이 명창연주회에는 그의 외숙인 김창환 명창을 비롯하여 송만갑 명창, 이동백 명창, 정정렬 명창 등의 특별출연이 있었다. 무릎위로 올라간 짧은 검정두루마기, 땅딸막한 키, 약간 얽은 데다 별로 잘생기지 못한 얼굴. 무대에 오른 초라한 행색의 임방울은 자신의 역량을 다 발휘하려는 듯, 혼신을 다하여 소리를 불렀다. 그 소리가 바로 불후의 명곡 ‘쑥대머리’이다. 쑥대머리 귀신형용(鬼神形容) 적막옥방(寂寞獄房) 찬 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漢陽郞君) 보고지고. 오리정(五里亭) 정별후(情別後)로 일장서(一張書)를 내가 못봤으니 부모봉양(父母奉養) 글공부에 저를이 없어서 이러난가. 연이신혼(宴爾新婚) 금슬우지(琴瑟友之) 나를 잊고 이러는가. 계궁항아(桂宮恒娥) 추월(秋月)같이 번뜻 솟아서 비치고져. 막왕막래(莫往莫來) 막혔으니 앵무서(鸚鵡書)를 내가 어이보며, 전전반칙(轉轉反則) 잠 못 이루니 호접몽(胡蝶夢)을 어이 꿀 수 있나. 손가락으 피를 내여 사정(事情)으로 편지헐까. 간장의 썩은 눈물로 임의 화상(畵像)을 그려볼까. 녹수부용(綠水芙蓉) 연(蓮) 캐는 채련녀(採蓮女)와 제롱망채엽(提籠忘採葉)으 뽕타는 여인네도 낭군 생각은 일반이라. 옥문 밖을 못나가니 뽕을 따고 연 캐겄나. 내가 만일에 임을 못보고 옥중 원귀(寃鬼)가 되거드면, 무덤 근처 있난 돌은 망부석(望夫石)이 될 것이요, 무덤 앞에 섰난 남귀 상사목(相思木)이 될 것이오. 생전사후(生前死後)으 이 원통을 알어 줄 이가 뉘 있드란 말이냐. 아무도 모르게 울음을 운다. 1929년 녹음 Columbia 40085-B(20827) 1933년 녹음 Chieron 118-B 반주 박록주 1933년 녹음 Okeh 1620(K863) 장고 김종기 1937년 녹음 Victor KJ-1108(KRE235) 뱃속에서 바로 소리를 뽑아서 내뿜는 통성에 쉰 목소리와 같이 껄껄하게 우러나오는 수리성을 섞은 임방울의 소리가 울려 퍼지자 장내는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임방울의 ‘쑥대머리’는 독특한 더늠에, 강렬한 전라도 사투리로 애절하게 내어서 청중을 사로잡아버렸다. ‘쑥대머리’는 <춘향가> 가운데서도 ‘옥중가(獄中歌)’의 한 대목이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옥중에 갖힌 춘향의 처연한 심사를 노래하자 장내는 절망적인 시대의 분위기와 연결이 되면서 청중들이 노래에 보내는 정서도 예사롭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유기룡씨는 동아일보에 “임방울은 독특한 더늠이 김창환씨와 흡사하여 계면조(界面調)의 대가”라고 평했다. “14세 때 창에 취미가 있어 창극계에 들어가 명창 박재실 선생에게 <춘향전> <흥보전>을 배우고, 다음에 유성준씨에게 <수궁가>, <삼국지>, <심청전>을 배우고 난 다음에, 25세까지 독단적으로 공부하여, 서울서 박람회가 있어 시골서 단체로 서울에 올라와서 박람회에 참가하였다. 그 당시 나의 외숙이 국창이었는데, 그의 이름은 김창환 씨였다. 그 때 동아일보사에서도 <전국명창대회>를 하였다. 그 당시 나도 그곳에 참석하여 출연을 하게 되었는데, 비로소 그날부터 출세가 되어 박람회를 마친 뒤 ‘콜럼비아 레코드’에 1년간을 취입하고, 다음에 ‘삑터’에 2년을 종사하고, 그 다음 ‘OK 레코드’의 전속으로 8.15 해방의 날까지 계속하였다. 그 삼 회사에서 ‘쑥대머리’ ‘호남가’를 120만장 이상을 각시 회사에서 팔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외사촌형 김봉이, 김봉학 씨는 조선명창이었는데, 나는 그 유전성으로 흘러내려 자연히 창계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임방울, 나와 창극, <조선일보> 1956년 5월 28일)기관장들이 환영파티를 열어준 송학원에서 임방울은 소년시절의 연인이었던 김산호주를 다시 만났다. 임방울이 소년이었을 무렵, 고용살이를 했었다. 산호주는 임방울과 동갑내기로 주인집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헤어졌고 산호는 결국 장성사는 부잣집 아들한테 시집을 갔다. 그리고 소식이 끊어졌는데, 산호주는 그 사이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광주로 돌아와 요리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을 이루었고, 임방울은 2년 동안 송학원의 내실에서 숨어살다시피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때 임방울이 잠적해버렸다고 했고, 전속계약을 한 오케이 레코드사에서는 임방울을 찾아 나섰으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김산호주는 미색이 빼어나서 천하의 소리꾼 임방울의 발목을 이태동안이나 잡아두었다. 그런데, 산호주와 함께 지내는 동안 임방울의 목이 상하고 말았다 .크게 낙심한 임방울은 산호주에게 떠나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송학원을 떠나 홀연히 지리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임방울이 떠나고 산호주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으며, 임방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지리산으로 찾아 헤매었다. 토굴 속에서 독공하고 있던 임방울은 애써 산호주를 외면하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산호주는 죽어가는 목숨이 되었고, 임종이라도 지켜보라는 사람들의 말에 토굴 속에서 나온 임방울은 이미 저승길에 접어든 산호주를 껴안고 슬피 울며, 진양조의 ‘추억’이라는 노래를 즉흥적으로 불렀다.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럈던가. 그리 쉽게 가럈거든 당초에 나오지를 말았거나 왔다가면 그저나 가지 노던 터에다 값진 이름을 두고 가며, 동무에게 정을 두고 가서 가시는 님을 하직코 가셨지만 세상에 있난 동무들은 백년을 통곡헌들, 보러 올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들 어느 곳에서 만나보리오.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전생에 무슨 함의로 이 세상에 알게 되야서 각도 각골 방방곡곡 다니던 일을 곽속에 들어도 나는 못잊겠네. 원명이 그뿐이었던가. 이리 급작시리 황천객이 되얐는가.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어데를 가고서 못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1930년 녹음 Columbia 40370-B(21499) 추억 1933년 녹음 Okeh 20068(K861) 추억(亡妻를 생각함) 장고 김종기 임방울 - 적벽가3
무릎위로 올라간 짧은 검정두루마기, 땅딸막한 키, 약간 얽은 데다 별로 잘생기지 못한 얼굴. 무대에 오른 초라한 행색의 임방울은 자신의 역량을 다 발휘하려는 듯, 혼신을 다하여 소리를 불렀다. 그 소리가 바로 불후의 명곡 ‘쑥대머리’이다.
뱃속에서 바로 소리를 뽑아서 내뿜는 통성에 쉰 목소리와 같이 껄껄하게 우러나오는 수리성을 섞은 임방울의 소리가 울려 퍼지자 장내는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임방울의 ‘쑥대머리’는 독특한 더늠에, 강렬한 전라도 사투리로 애절하게 내어서 청중을 사로잡아버렸다. ‘쑥대머리’는 <춘향가> 가운데서도 ‘옥중가(獄中歌)’의 한 대목이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옥중에 갖힌 춘향의 처연한 심사를 노래하자 장내는 절망적인 시대의 분위기와 연결이 되면서 청중들이 노래에 보내는 정서도 예사롭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유기룡씨는 동아일보에 “임방울은 독특한 더늠이 김창환씨와 흡사하여 계면조(界面調)의 대가”라고 평했다.
기관장들이 환영파티를 열어준 송학원에서 임방울은 소년시절의 연인이었던 김산호주를 다시 만났다. 임방울이 소년이었을 무렵, 고용살이를 했었다. 산호주는 임방울과 동갑내기로 주인집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헤어졌고 산호는 결국 장성사는 부잣집 아들한테 시집을 갔다. 그리고 소식이 끊어졌는데, 산호주는 그 사이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광주로 돌아와 요리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을 이루었고, 임방울은 2년 동안 송학원의 내실에서 숨어살다시피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때 임방울이 잠적해버렸다고 했고, 전속계약을 한 오케이 레코드사에서는 임방울을 찾아 나섰으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김산호주는 미색이 빼어나서 천하의 소리꾼 임방울의 발목을 이태동안이나 잡아두었다. 그런데, 산호주와 함께 지내는 동안 임방울의 목이 상하고 말았다 .크게 낙심한 임방울은 산호주에게 떠나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송학원을 떠나 홀연히 지리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임방울이 떠나고 산호주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으며, 임방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지리산으로 찾아 헤매었다. 토굴 속에서 독공하고 있던 임방울은 애써 산호주를 외면하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산호주는 죽어가는 목숨이 되었고, 임종이라도 지켜보라는 사람들의 말에 토굴 속에서 나온 임방울은 이미 저승길에 접어든 산호주를 껴안고 슬피 울며, 진양조의 ‘추억’이라는 노래를 즉흥적으로 불렀다.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럈던가. 그리 쉽게 가럈거든 당초에 나오지를 말았거나 왔다가면 그저나 가지 노던 터에다 값진 이름을 두고 가며, 동무에게 정을 두고 가서 가시는 님을 하직코 가셨지만 세상에 있난 동무들은 백년을 통곡헌들, 보러 올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들 어느 곳에서 만나보리오.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전생에 무슨 함의로 이 세상에 알게 되야서 각도 각골 방방곡곡 다니던 일을 곽속에 들어도 나는 못잊겠네. 원명이 그뿐이었던가. 이리 급작시리 황천객이 되얐는가.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어데를 가고서 못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1930년 녹음 Columbia 40370-B(21499) 추억 1933년 녹음 Okeh 20068(K861) 추억(亡妻를 생각함) 장고 김종기
출처: 국사모(국악을 사랑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금난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