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4년 고다이고 천황은 천황이 중심이 되어 행하는 새로운 정치를 시작했다(建武の新政). 그러나 무가정치에 익숙해 있는 무사들은 이 정치에 불만을 품었다. 막부를 쓰러뜨렸을 때, 가장 유력한 무장이었던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는 무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교토를 공격해 들어갔고, 천황의 군대는 패하여 요시노(古野:지금의 나라현)로 도망쳐 버린다. 1336년 타카우지는 교토에 새로운 천황(北朝)을 세우고, 1338년에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어, 교토에 막부를 열었다. 이 아시카가씨의 막부는 타카우지의 손자인 3대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1358-1408)가 교토의 무로마치(室町)에 하나노고쇼(花の御所)라고 불리우는 아름다운 집을 짓고, 그곳을 막부로 했기 때문에 무로마치막부라고 하고 이 시대를 무로마치시대라고 한다. 한편 요시노로 도망간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에 조정을 세웠고, 이에 두 개의 조정이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상황은 후일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대립을 해결할 때까지 이어지며,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두 개의 조정이 있던 시대라 하여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라고 한다. 무로마치 막부는 가마쿠라 막부보다 쇼군과 무사의 결속이 약해 유력한 슈고(守護)는 토지를 넓히고 무력을 키워, 그 지역을 지배하는 힘을 갖게 되었는데 이러한 슈고를 슈고다이묘(守護大名)라고 한다. 가마쿠라시대 말부터 해적(倭寇)이 한반도에서 중국에 걸친 해역을 어지럽혔는데 요시미쓰가 이를 토벌하고, 명나라와 무역을 시작 큰 이익을 얻었다. 왜구는 후일 이 무역이 중단되자 다시금 활동이 활발해 진다. 한편 1467년 8대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1436-1490)때 쇼군의 후계 문제로 다이묘(大名)들이 두 파로 갈라져, 활란이 교토를 중심으로 11년간 지속되었다(應仁の亂). 이 전쟁은 결국, 양군이 싸움에 지쳐 끝이 났지만, 이 전란으로 쇼규의 힘이 약해졌고, 장원제 등의 질서가 파괴되었다. 그리하여 실력만 있으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누르고 지배자가 되는 하극상의 시대가 된다. 이러한 사회가 100년정도 이어졌는데 이 시대를 전국시대(戰國時代)라 하고 하며 이 시대에 새롭게 지배자가 된 잘르 全國大名이라 한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수차가 사용되었고,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널리 행해졌다. 농민들은 마을마다 모임을 열어 농사나 세금에 관한 토론 등을 자치적으로 행하였고, 이렇게 마을 마다의 결속이 강해진 농민들은 단결하여 정부에 세금을 가볍게 해 줄 것을 요구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무기를 들고 싸우기도 했으며, 빚으로 고통받을 때는 금융기관(土倉) 등을 습격하기도 했다. 全國大名은 무기 등을 조달하기 위해 상공업자를 자신의 고장으로 모아 보호했기 때문에 상공업도 발달하였다. 상품의 유통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각지의 시장이 서서 운송업을 하는 대상인(大商人:問屋)도 늘어났다. 또, 상인이나 장인들의 동업조합이 있는 거리도 전국적으로 생겨나 각 지방의 특색있는 특산품도 생산되게 되었다. 무로마치시대는 막부가 교토에 있었기 때문에 무사다움과 귀족다움이 융화되어 새로운 武家文化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중국의 원·명왕조의 문화나 선종의 영향을 받아, 간소하고 깊이가 있는 문화였다. 또한, 수도의 문화가 지방에까지 전파되어 각지의 민중문화가 생겨났다. 건축물로는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교토의 기타야마(北山)에 세운 별장 안에 있는 긴카쿠지(金閣)와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교토의 히가시야마(東山)에 세운 긴카쿠(銀閣)가 있다. 金閣은 귀족풍의 침전조(寢殿造)와 중국의 선종 사원의 양식을 받아들인 건축물로서 전체를 금으로 덮은 화려한 것이었고, 銀閣은 서원조(書院造)라고 하는, 선사(禪寺)의 건축양식을 딴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