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7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교회창립주일 * 홍지훈 목사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입니다.
에베소 1:15-23
지난 5월 3일 주일을 가정주일로 지키면서 선택했던 성경본문이 에베소서 4장 25-32절이었습니다. 그 대목에는 <새로운 생활의 규범>이라는 소제목이 붙어있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규범을 가지고 가족 공동체가 서로가 한 지체임을 확인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정은 교회와도 마찬가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억나실 겁니다. 문장이 매번 <그러므로>라고 시작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씀드리고, 그 뿌리를 찾아서 올라가보니 에베소서 2장 1절로 간다고 말입니다.
전에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을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이 살려주셨다는 것이 그 출발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2장 1절 보다 한 발 더 앞으로 돌아가서 발견한 본문입니다. 1장 15절부터 끝까지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바울의 기도>라고 합니다. 바울이 지금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쓰면서, 에베소 교회를 위한 기도를 이렇게 드리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바울이 살아서 우리 평화목 교회에 편지를 쓰고, 평화목 교회를 위하여 기도한 다면 어떤 편지, 어떤 기도를 할 것 같습니까? 본문 말씀 묵상을 통해서 그런 상상을 함께 해보려고 합니다.
저에게 지난 주간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묵상하는 주간 이었습니다. 우리 평화목 교회를 창립한지 3주년에 되는 날이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2012년 6월 첫째주일에 강성철 당시 전도사님과 16분의 교우들이 노대동 <디 마레> 카페에 모여 예배드렸습니다. 그날 저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일주일 후에 동천동에 장소를 구하고 저도 합류했습니다. 되돌아보면 디 마레 카페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도 그 장소를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고, 제자 목사가 개원한 동천동 성경연구소 개소식에 축사해주러 갔던 것이 계기가 되어서 당장 예배 장소를 구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2014년 1월 5일에 봉선동(정확하게는 방림동) 이곳으로 예배당을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처음 모인 교우들이 한 생각은 단 한가지입니다. “함께 예배드리고 싶다.”는 것 한 가지였습니다. 그렇게 모이기 시작하면서 교회 이름도 짓고, 이 교회가 무슨 일을 하는 교회가 되고,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의견을 모으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교인 수도 늘었고, 교회 재정도 늘었고, 우리가 감당하는 일도 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임대건물이긴 하지만, 우리가 주인으로 사용할 예배당과 부속 시설도 마련했습니다.
그 모든 외적 조건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교회로 모여 어떤 속생각을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이것을 보이지 않는 내적교회의 모습이라고도 합니다. 바울이 지금 에베소 교회를 향해 기도의 형태로 전해주는 이야기가 바로 그런 교회의 내면적인 모습입니다.
17절 말씀에서 바울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님을 알게 하도록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교우들에게 주었다고 말입니다. 시작은 사람인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에 저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스스로 잘못된 행동을 해 놓고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할 때 쓰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모든 선한 일의 출발과 결과는 모두가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어 하나님을 알도록 하셨지만,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의 몫도 남겨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면, 우리가 알아가야 하는 것들이 드러나는데,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고,
둘째,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를 알고,
셋째, 믿는 우리들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능력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교회입니다. 고난도 잘 견디고, 낙심도 하지 않은 교회라는 칭찬도 받지만,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도 함께 받은 교회입니다. 아마도 열정이 식었다는 책망이겠지요. 현대의 주석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교회가 정착이 되고, 신도 간에 외적 결합이 마련되고 나면, 교회는 구조, 기능, 질서, 법 등등과 같은데 온 신경을 집중하다가, 그만 주님을 사랑한다는 처음 사랑을 잊어버린다는 해석입니다.
처음 모였을 때는 그저 예배만 같이 드리면 좋았는데, 모이다보니, 많아지다 보니 질서를 잡는 것이 필요한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 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처음 사랑이라는 것,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기 위하여 여기 모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입니까? 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에 쓰려고 초청했는지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거는 하나님의 기대가 무엇인지 아느냐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그러나 늘 반대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내게 거는 기대는 생각하지 않고,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거는 기대만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의 소망이 아니라, 우리의 소망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2.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 라는 말은 마침내 성도가 물려받을 것이 매우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특별한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유산상속(클레로노미아)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자녀가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우 풍성한 유산입니다. 이 유산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상속을 받을 생각은 안하고, 축복만을 생각하며 삽니다. 그런데 축복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헤아릴 수 없는 풍성한 유산입니다. 우리가 받고 싶은 것 말고 하나님이 아버지의 입장에서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3.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능력인지 아십니까? 라는 말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강한, 힘, 활동, 능력 이 네 단어가 서로 비슷한 말입니다. great power is like the working of his mighty strength! 즉, 하나님의 힘은 크고, 강하고 역사하는 강력한 힘이라는 말입니다. 그 힘에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힘에 저항하려고 말입니다. 이것은 내 뜻을, 내 힘으로 밀어붙여서 관철시키려는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다정한” 경고입니다. 다정하다는 의미는 이것입니다. “아무리 애써봐라 네가 내 힘을 거슬려 이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의 최종 귀결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의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세상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발아래 만물이 굴복하며, 그리스도는 만물위에 세운 교회의 머리입니다. 정권, 권세, 능력, 주권이라는 표현도 헬라어로는 다 다른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 내용은 다 비슷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세상에서 위세를 떨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당시에는 여기에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들도 포함됩니다. 그만큼 그리스도는 뛰어나다는 말입니다. 그 뛰어난 분이 바로 교회의 머리요, 따라서 교회는 그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 오늘 바울의 기도의 핵심입니다.
제가 자꾸 이것이 기도라고 표현하는데, 본문에서 “바랍니다.”라고 번역된 것이 원래는 “기도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한 번 앞에서 바울이 기도하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세 가지>로 돌아 가보겠습니다. 기억하기 좋게 더 줄이면, 1.소망, 2. 상속, 3.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소망은 이제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려주실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하심을 체험하고 있습니까?
이 세 가지를 교회라는 입장에서 보면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알도록 부르시고, 유산으로 그리스도를 물려주시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 바로 이것이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우리를 옮기시는 분입니다. 겉으로는 살아 있는 것 같아도 죽은 자처럼 제대로 숨도 못 쉬던 우리에게 마음 놓고 숨 쉬며 삶을 기뻐하도록 만드신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노력의 결실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알도록 불러주시고, 그리스도를 상속유산으로 주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수입니다. 그분은 또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남겨주셨습니다. 23절에서 바울이 교회가 그의 몸이라고 말할 때, 이 말씀의 뜻은 외적인 형식을 넘어서서 내적인 내용을 뜻합니다. 몸이 언제나 머리의 생각대로 움직이듯이,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움직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23절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라는 말씀에서 교회의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본문을 잘 보면, 세 가지 단계가 보입니다.
1단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교회에게 머리로 주셨는데, 모든 것 위에 주셨다고 합니다.
2단계는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곧, 그(그리스도)의 충만함입니다.
3단계는 그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모든 방법으로 채우는 분입니다.
종합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교회의 머리도 그리스도이고, 교회 몸도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만물을 충만케 하는 분입니다. 가득 채운다는 말은 완전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부족한 구석이나 흠이 없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를 채우면 모자라는 구석이 남아 있지만, 그리스도가 나를 채우시면 모자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교회를 채우면 빈구석이 너무도 많지만, 그리스도가 채우시면 빈구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정말 우리 교회 안에 계시면, 우리 교회는 그것으로 충만한 교회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면 나는 충만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리스도 외에 더 바랄 것이 무엇입니까?
평화목교우 여러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만 바르게 드려도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르게 드리는 예배란 참 깊고도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배의 정의에 따르면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야 예배를 바르게 드릴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설교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속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담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설교 속에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녹아 있어야하고, 교우들은 설교말씀 속에서 반드시 사랑과 겸손, 자비와 용서, 긍휼과 인내를 갈구하여야 합니다.
참으로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고 나면 우리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라면,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삶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가득찬 삶이 되도록 인도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평화목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창립 3주년을 맞아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