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000인데요. 지금 차비가 없어서 학교를 못가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되요?”
요즘 학교에서 종종 겪는 일이다. 맞벌이인 부모님이 일찍 직장에 출근하여 자녀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경우이거나, 아예 부모가 집에 들어오지 못해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상황이다.
문제는 학생의 부모님이 실직이나 퇴직으로 인해 장기간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때는 부모의 무관심으로 방치된다. 심지어는 아침 식사를 거르고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이 비일비재하다.
요즘 경제 상황이 무척이나 어렵다고들 한다. IMF 위기 때보다도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는 말도 있다. 이런 경제 위기가 우리의 아버지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다. 아무 할 일도 없이 거리를 방황하는 아버지들, 양복에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산이나 공원으로 출근하는 아버지들도 있다. 서울역을 한 번 가보라.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지하도에서 새우잠을 자는 노숙자들이 아직도 많다.
정말 우리 가정 현실은 심각하다. 가정이 흔들리면 학교가 흔들린다. 그와 더불어 학교가 흔들리면 사회가 흔들리는 것 또한 불보듯 뻔한 일이다.
재작년이었던가, 사회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신조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사오정'(45세 정년)이란 말이 처음 생기더니 몇 달 못가서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 , '육이오'(62세까지 일하면 오적)라는 말이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얼마후엔 명예 퇴직의 바람이 불더니 '삼팔선' (38세 퇴직)이 우리들 가슴에 금을 그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조차 익숙한 용어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을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이라고 하였던가? 시대가 변화는 상황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말일게다. 지금 '노동의 종말'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가정의 파괴','가정의 해체'라는 불행이 와서는 안 된다.
우리 학교의 경우를 보면, 부모가 실직하여 가출하고, 자녀들만 남겨진 상황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생존의 문제야 연결된다. 급기야 자녀는 학교 수업을 마치자마자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곧바로 24시간 편의점으로 달려가 시간제 근무를 한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의 경우, 건축공사장에서 일품을 팔아 5~6만원을 받는 막노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우리의 아이들이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해야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다. 늘상 고된 일로 피곤에 지치기 마련이다. 결국, 등교 시간에 맞춰 일어나지 못하고 지각하고 만다. 설사 등교한다고 해도 수업시간은 언제나 꾸벅 꾸벅 졸기 마련이다.
더욱이 그 상황은 학생에겐 고난의 악순환으로 계속된다. 학생의 형편과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선생님의 경우, 학생를 나무라게 되고 질책만을 반복하게 된다. 결국에는 학교에서도 그 학생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가정에서처럼 그를 학교 밖으로 밀쳐내고 만다. 결국 아이들은 기댈 곳을 찾지 못한 채 중도에서 배움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 중에 박○진이란 여자 아이가 있다. 아버지가 실직하여 막노동으로 하루 벌이로 살아가는 형편이다. 어느 한 때, 아버지가 약주를 드시고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 아이는 집을 나선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술주정을 하게 되고, 급기야 그 괴로움을 참다 못한 어머니는 가출하기에 이른다. 그 아이는 지금 이런 가정 상황을 견디다 못해 동생과 함께 친구 집에 머무르고 있다.
그 아니는 지금 아르바이트를 통해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 근근이 살아가곤 있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중학교에 다니는 동생의 학비와 용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다. 다행히 학교는 꼭 다녀야 한다면서 결석은 하지 않고 있다. 학교에 오면 ○진이는 언제나 녹초가 되어서 곤한 잠을 이루곤 한다. 수업중에 잠자는 그 아이를 차마 깨울 수가 없다.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학비 감면과 급식비 지원을 학교에 요청하는 게 담임교사로서 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 아픈 상처를 누가 어우르고 달래고 또 용기를 줄 수 있을까? 그것은 따뜻한 가정이 있을 때만 올바른 치유가 가능하다. 참으로 막연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앞으로 ○진이가 이 절박한 상황을 얼마나 견디어 낼 수 있을까?
교육부는 최근, 중 고교를 다니다 중도 탈락하는 학생수가 작년 한 해 7만여 명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이민, 유학, 질병 등의 사유로 그만두는 학생을 제외하면, 5만여 명의 학생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도 탈락했다. 이렇게 학교에서 중도 탈락한 학생들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이 학생들의 거리를 배회하며 본인이 뜻하지 않은 길로 방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차원 및 사회차원의 교육시설과 교육 프로그램이 절실히 필요하다. 각 시도에 청소년들을 위한 문화의 집 등 교육시설과 프로그램이 있으나 학생들의 수요와 욕구에 미처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이들 청소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전국의 대안학교는 전남 영광군 영산성지고등학교 등 11개 고등학교와 올해 개교한 전남의 송학중학교 뿐이다.
우리 가정엔 지금 거센 바람이 불고 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지난해 하루 평균 30명이 자살, 자살률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통계청이 발표했다. 1시간에 1.3명이 자살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교통사고 사망자보다도 더 많은 상황이다. 특히 20~30대 사망원인 중 1위가 자살로 나타난 것을 보면, 우리 사회가 심각한 국면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인터넷 자살 사이트가 성황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최근 한강 다리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자살 사건은 자살이 우리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부도와 실직이 넘쳐났던 IMF 위기 당시, 자살률이 급증했던 전례로 비춰본다면 최근의 경제 위기가 가정 파탄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도 한다. 자살은 가정을 멍들게하고 사회를 어둡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교육자의 책임이다.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경제 위기, 교육의 위기 상황은, 바로 우리 교육자에게 많은 부분 책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 이 사회엔 각종 아픔으로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정말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고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떻게 하면 가정을 온전히 바로 세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즐거운 학교가 될 수 있을까? 교육 현장에 있는 나의 존재 이유를 묻는 중요한 질문인지도 모른다.
진정 길은 없는 것인가? 어둠을 한탄하기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절박하게 찾고 있다.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학생들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안는 것, 관심과 이해로 배려하는 사랑이다. 학생들을 묵묵히 인정해 주고 참아주는 것,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랑만이 그 모든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누군가 교육은 희망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맞다. 교육은 우리에게 희망인 것이다.
이젠 희망을 말하자. 그들에게 꿈을 가르치자. 인간은 운명에 의하여 성장하는 것은 결코 코 아니다. 학생들은 교사의 꿈을 먹고 자란다. 그 꿈은 학생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다. 사람은 누구나 칭찬을 받고 싶어한다. 아이들은 분명 칭찬을 먹고 자라는 존재가 아닌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에게는 35명의 학생이 있다. 현실은 어렵지만, 그들에게 비전을 심어 희망을 얘기하자. 열정과 애정으로 가르치자. 학생들이 나의 눈빛만 보고도 편안한 마음으로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살아있는 교사가 되고 싶다.
지금 세상이 많이 변하고 있다. 우리가 잘 나갈 때에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가르쳤더라면 이런 최악의 상황들은 없었을 것을, 우리는 바람이 어디서 어떻게 불고 있는지를 분명 알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바람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면밀한 검토와 연구를 해야 했다. 또한 그 바람을 이용하여 더 높이 멀리 날 수 있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야 했다. 바람의 방향도 모르고 더욱 높이 멀리 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자만의 샴페인을 터트리지 않았던가.
이제 다시 희망으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분명 무지와 전쟁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낸 저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이제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학생은 학교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가족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곤 내일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1997년의 혹독한 외환위기도 극복했다. 2002년 월드컵의 함성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분명 살아있다. 산다는 것은 희망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욱 확실한 희망은 없다.
허허벌판에 내몰린 사람은 스스로 변화를 찾아나서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21세기의 길모퉁이에서 우리가 경험한 그 함성은 분명 미래의 가능성이다. 아울러 현재를 변화시키는 동력이기도 하다. 이젠 성공과 안정의 단맛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에 도전할 때이다.
칸트는 "행복은 어떤 일을 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희망을 가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나의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희망을 말하는 것, 지금 우리에게 놓여진 삶의 화두라고 생각한다.
이젠, 우리 희망을 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