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에서 알람소리가 나더니 ‘어머니 기일’'이란 문자가 떴다. 2016년 12월 4일은 음력으로 동짓달 초엿새, 나의 어머니 광주댁, 충주 박씨의 기일이다.
“느그 엄니, 돌아가셨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겨울, 바람도 차갑던 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고물상을 하던 석길이 어머니가 일러주셨다. 석길이는 나와 또래였고, 그의 어머니도 나의 어머니와 친하게 지냈던 분이다.
그날 저녁, 나는 동생들과 이불 하나 깔아놓고 강아지처럼 모여 있었다. 그때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
"여보~~오"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건넌방에서 아버지는 그렇게 통곡했었다. 그러나 한번 가신 어머니께서 돌아 올 리 없다. 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머니의 시신은 고향 평화 마을에서 포곡 마을로 넘어가는 억불산 기슭에 안장했었다. 20년 정도 지났을 때 할머니의 시신과 함께 이장을 했었다. 평화 2구 마을 앞 죽봉으로 옮기려고 땅을 파고 유골도 가져왔었다.
이때 사람들이 몰려왔다.
“안돕니다.”
“못 해요.”
마을 사람들은 완강했었다. 유골을 들고 나아가는 우리의 앞길을 막았고, 구덩이 앞에 진을 치듯 앉아 있었다. 자기 마을에 변고가 있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 일을 주관하셨던 나의 백부께서는 한 발 물러섰다. 이웃 마을 사람들과 마찰을 빚는 일이 잘못이라 생각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결국 어머니의 시신은 제3의 장소에 안장했다. 아버지께서 평소에 눈여겨 두었던 억불산 기슭이다. 처음의 위치와는 그 방향이 다르다.
최근에 군청에서 연락이 왔었다. ‘땅이 수용되었으니 묘를 옮겨 달라.’는 것이다. 우리 3형제는 숙의한 끝에 유골을 화장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상석을 처리하는 게 문제다. 사람들은 버리라고 하지만 '忠州 朴氏 之墓(충주 박씨 지묘)'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버린단 말인가? 다행스럽게도 단독 주택에 사는 막내 동생이 가져가겠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자연으로 돌아갔다.
어머니의 제사는 1998년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이후 합제로 모신다. 그런데 ‘어머니 기일’이란 핸드폰의 알람 문자를 보는 순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샘솟는다. 어머니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 해가 1956년이니, 60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 동안 무심코 지내왔다는 생각이 들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향년 32세, 어머니께서는 아들 셋 딸 둘 모두 5남매를 세상에 남기셨다. 이 중에서 셋째인 여동생은 어머니를 따라갔지만, 남은 4남매는 모두건강하게 살고 있다. 대구, 제주, 순천 등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생들의 얼굴이 차례로 그려진다. 그 중에서도 허약한 몸으로 태어났었고, 어머니로부터 젖도 저대로 얻어먹지 못했던 당시 세 살배기 동생 막내에 대한 생각이 간절하다.
나는 지금 혼자다. 아내는 자기 ‘고숙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서울로 조문을 갔다. 기왕에 올라왔으니 ‘딸네 집에서 지내다 일요일에 오겠다.’고 한다.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아들도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
이런 상황 탓인지 동생이 더욱 보고 싶다. 내일은 예배를 마치는 대로 순천으로 가련다. 상석 위에 막걸리 한 잔 진설하고 동생과 회포도 풀련다.
동생은 어머니에 대해서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동명동 집에 대해서도 알까?
소설과도 같은 동생의 인생 이야기를 또 들어보련다.
첫댓글 고장로님께서도 어머니에 관련된 글을 자주 쓰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님과 헤어지다니요.
32세 너무나 꽃다운 젊은 나이에 어머님께서 돌아 가셨습니다.
지금 같으면 결혼 하지 않은 처녀들이 너무 많습니다.
누이가 먼저 어머님을 따라 갔지만
4남매가 의가 좋게 살고 있으니 어머님때문인가 봅니다.
강 선생님.
2016년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바쁜 가운데에도 수필 장편 소설 등 열심히 사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2017년 4월 동산문학 정기총회 및 시상식장에서 대면하여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남은 시간 소중하게 보내고 희망의 새해를 맞으세요.
감사합니다.
고병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