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군 우금치 전투는 실제로는 주로 누구와 싸운 전투 인가요?
2019년 SBS 에서 방영된 드라마 "녹두꽃" 은 참으로 감동적인 드라마이니 “흰 옷의 백성들이
죽창을 들고 모여드니 앉으면 죽산(竹山)이요, 서면 백산(白山)이라!” 라는 말과.... 우금치
전투 편에서 주인공 백이강이 “어이 개똥이들! 사람답게 살아보니 살맛이 나더라! 몇달
이지만 평등하게 살아본지라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네” 라는 말이 참 인상적 입니다.
아무도, 나라에서도 지켜주지 않지만 검은 야욕을 드러내는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일어선 민초들!
농민군들의 투쟁을 장렬하고도 깊이있게 다루었으니...... 감동적인 한편의 서사시요! 역사를
알아서 더 슬픈 드라마이며.... 또 민초들은 언제나 강하다는 메시지를 던져준 좋은 드라마이지만
백미인 41~42회 우금치 전투편은 사실과 다른 "신파적인 장면"이 너무 많아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녹두꽃 드라마 우금치 전투” 에 보면 동학군이 공격해오는 언덕 최일선에 대포가 폼인양 한문 보이고
"일장기에 욱일기" 까지 펄럭이는 가운데...... 좌우에 대검을 꽂은 총을 든 일본군들이 앉아쏴 자세
로 동학군을 조준 사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1선은 이두황군 이고 2선은 경리청 부대며 일본군은
3선으로 견준봉에 배치되었으니 동학군의 주공 방향 정면에 있지는 않은지라 이는 과장되게 보입니다?
그리고 동학군이 우회해 조선군 대포진지를 공격해 육박전을 별여서 화약을 터뜨려 조선군 대포진지
를 완전히 무력화 시키는 넘 감동적인 장엄한 장면이 나오며....... 또 밤에 동학군이 조선군 진영을
기습해 영관 이규태와 이두황 진지에서 치열한 육박전을 치르니 일본군이 개틀링 기관총으로 조선
관군도 함께 죽어도 좋다며..... 그 난전의 현장에 마구 갈겨대며 웃는데 이런 사실 자체가 없었습니다?
동학군은 개활지에서 언덕으로 공격했지만 조선군 기관총과 대포 사격으로 조선군 진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육박전은 무슨....... 또 전투가 끝난 후에 일본군들이 총에 꽂은 대검으로 동학군
부상병들을 찔러죽이며 낄낄거리는데... 일본군의 잔학성을 의도적으로 표시해 동학군이 일본군과 전투
한 것으로 묘사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2만 동학군이 상대한 적은 조선군 3,500명과 일본군 200명 입니다.
일본군은 청일전쟁중이라 공주에 온 부대는 정규군이 아닌 "예비병인 후비병이니 대포나 기관총
같은 중화기" 는 없었으며 소총도, 레밍턴 롤링블럭과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을 사용한 조선군
보다도 일부는 구식인데다가 견준봉 높은 곳에 배치된지라 동학군과 전투를 치열하게 하기
어려운 위치이고 동학군은 40여차례의 돌격에서 대부분 "조선군의 기관총" 에 쓰러졌습니다.
전봉준의 남접 1만과 손병희의 북접 1만은 우금치와 인근 전투에서 1만 7천명이 전사한데 비해 일본군
전사자는 단 1명에 불과했습니다? 저 1만 7천은 3,500명 조선군 기관총과 대포 및 소총에 의한게
대부분이고 200명 일본군의 소총에 의한건 소수니 동학군이 일본군과 싸웠다는 표현 보다는 "조선군
과 싸웠다" 는 표현이 더 사실에 맞다고 봅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과 싸웠지요?
동학군은 개틀링 기관총 십자포화에 죽었는데.... 황토현 전투에서도 기관총이 있었으나 운용을 몰라 동학군
에 패했지만 이번에 2,700명을 총 지휘한 자는 미나미 소좌로 전투 현장을 사전에 답사하고는 기관총
십자포화 진지를 구축하며 조선군을 배치, 지휘하는등 전투를 설계하고 연출한 주역이니 연속극에 상당히
비중있게 다뤄야 함에도 미나미는 보이지도 않으니..... "관군이 일본군의 명령" 대로 복종한걸 보이기는
싫었던 모양이며... 활약이 적었던 일본군의 전투장면을 많이 보여주는건 반일감정을 고취하기 위함일까요?
나무위키도 “관군과 일본 육군은 사격을 자제”, “관군 - 일본군 방어선에”, “언덕에 설치한 관군 과
일본군의 기관총 앞에서는 과녁에 불과했다” 는 말로..... 마치 "일본군에게도 기관총" 이 있었던
것 처럼 오해하기 쉬운 표현을 쓰며.... 많은 분들이 우금치 전투를 동학군과 일본군의 전투인 양
생각하는 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고 “실제로 주 전투는 동학군과 조선군” 사이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전봉준은 청일전쟁이 한창인 1894년 양력 10월 삼례에서 2차 거병을 했으니 교주 최시형의
명령으로 충청, 강원, 황해 북접(北接) 세력이 가세하여 동학 병력은 4만이 되었는데
양력 11월 9일 전봉준은 일만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북상하니.....
양력 11월 20일 부터 공주 주변에서는 관군과 동학군의 격돌이 여러 차례나 있었습니다.
농민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12월초 우금치를 주공격로로, 곰티·곰내·하고개·주미산 쪽을 보조
공격로로 정하고 금강 건너 유구 쪽에 농민군을 배치하여 공주를 협공하기로 정하였으니
양력 12월 8일 총공격을 시작해서는 정부군을 우금치로 몰자..... 조선 관군, 일본 연합군
은 뛰어난 화력을 가진 최신 무기로 무장하고 좌, 우측에서 협공으로 농민군을 공격합니다.
동학군은 12월 3일 공주 남방을 3면에서 에워싸는 형태로 전개했으니.... 효포와 능치에서 맹렬한
공격을 하다가 방향을 틀어 경리청 부대가 주둔한 이인을 기습 점령하니 우금치 공격을 향한
교두보를 확보했는데..... 동학군은 조선군 + 양반들의 민보군 + 보부상 + 일본군 4자를 상대로
싸웠으며 그후 "의병도 관군이 일본군의 협조를 받아 토벌" 하니 “조선군과 일본군은 한패” 입니다.
공주에 투입된 조선군은 신정희가 지휘하는 순무영과 경리청 등의 병력 3,500명이었으니 공주
여러 전선에 분산 배치되었고...... 그 중에 우금치 방면에 투입된 병력은 우선봉장 이두황
(李斗璜 ), 좌선봉장 이규태(李圭泰) 가 지휘하는 2개 대대의 병력 1,500 명이었으며.....
일본군이 훈련시킨 이진호(李軫鎬)의 최정예 교도중대 350명도 우금치에 증강 투입 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청일전쟁중이라..... 후비병인 미나미 고시로 소좌의 19대대가 3개 루트로 한반도
남부에 파병되었으니 공주에 도착한건 우금치전투 12일 전으로 미나미 대대장과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200명의 2중대 병력이었으며.... 조선 관군의 이규태는 이후
"항일 의병장" 이 되나 이두황과 이진호는 대표적인 반민족적인 친일파 인사로 전락합니다.
이두황은 우금치의 서쪽(우측)에, 그리고 이규태의 부대가 우금치 동쪽(좌측)에 배치되었고
일본군 200명이 우측의 이두황 부대를 지나 최우측에 서 있는 최고봉 견준봉에 배치
되었는데....... 일본군은 견준봉의 중요성을 간파하고는 전날 이인 전투에서 패주한
성하영의 경리청 군사를 이두황의 부대와 견준봉의 일본군 사이에 끼어 배치하였습니다.
이규태의 부대는 우금치 고갯길과 계곡을 감싸는 왼팔 격의 능선을 방어하는 부대이니.....
이진호(李軫鎬) 가 지휘하는 정예 교도중대 병력 350명이 이규태 부대 쪽에 증강 배치
되었는데 방어선의 폭은 800m 정도였으니 집중 방어라고 할수 있겠는데..... 폭
800미터 길이 1,200 미터의 좁은 계곡이 일만 동학군의 참혹한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어군의 지휘권은 19후비 보병대대장 미나미 고지로 소좌가 행사했으니 12월 초에 있었던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은 봄에 황토현이나 월평의 대패와는 아주 다른 강한 전투력을 발휘했는데..... 이는
육군대학에서 유럽 전투를 연구해 현대적인 전술을 터득한 일본군 장교가 전투를 주도했던 것이
이유라고 봅니다? 조선 수군도 누가 지휘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달라졌듯 누가 지휘자냐의 문제라?
양력 12월 8일 우금치를 공격한 동학 농민군은 우선 우금치 고개의 양쪽 능선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여긴 관군이 배치되지 않은 탓에 손쉽게 능선을 점령해 관군 방어선에 교란
공격을 시도했지만..... 관군과 일본군은 최대한 사격을 자제하는 것으로 대응했으며, 양 능선
을 점령한 농민군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예전 처럼 방어선에 "밀집 대형으로 돌격" 을 하니
황토현에서 조선군과 싸울때의 전술인데 "조선군 기관총 십자포화" 에 무참하게 살륙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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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쯤 되어 동학 농민군의 주력은 방어선 공격에 거의 투입되었고 이에 맞서 "관군의 개틀링
기관총과 크루프제 야포" 가 불을 뿜으니 막강한 화력에 농민군은 추풍낙엽 처럼 쓰러졌고
동학 농민군은 우직하게도 40회가 넘는 공세를 계속해서 퍼부었지만.... "조선 관군" 의 막강한
화력 앞에 농민군은 쓸려나갈 뿐이라 공세 종말점에 다다라 더 이상 공세를 취할 수 없게 됩니다.
조선군은 원거리에서 사격하는데도 동학군에 피해를 준 이유는 총의 사거리가 100-400m
인 동학 농민군의 화승총에 비해 1.2km 이니 장거리 사격과 연속 사격이 가능한 최신식
소총들인데다가..... 언덕 위 산속에서 기존 밀집 대형과 달리 산개 대형으로 포진해
엎드리는 자세나 앉은 자세를 이용해 상대의 사격으로 받는 피해를 최소화했기 때문 입니다.
여러차례 돌격이 실패하자 전봉준은 우금치 계곡을 크게 우회하여 관군을 측면 공격한다는
작전을 세웠으니 농민군은 우금치 계곡을 우회해 관군과 싸워 두리봉을 점령하고 공주로
진격하지만, 매복한 관군에 패하고 퇴로가 막혀 관군에게 공격당하다가 흩어져서 결국에는
농민군 본대와 합류하지 못했고 우금치 전투에서 살아남은 농민군은 3,000명에 불과했습니다.
우금치 전투는 동학농민군의 패배로 끝났는데 '전투' 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농민군은
조선군과 일본군 진지에는 접근조차 못하고 일방적으로 '학살' 당했는데.... 우금치와 공주의
농민군이 제거된 이후 모리오 대위가 인솔하는 조선 관군 50명이 전봉준을 추격하니......
논산으로 후퇴한 결과 밤 사이 낙오 및 탈영병으로 동학농민군은 500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지막인 23일 태인 전투에서 전봉준 장군의 주력 부대가 패하면서 우금치 전역의 농민군
은 각개 격파되어 동학 농민 운동은 와해되는데.... 전봉준은 남은 농민군들을 해산하고 순창
피노리에 피신해 있던 도중 옛 부하인 김경천의 밀고로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가 주민인
한신현이 투척한 몽둥이에 다리를 맞고 잡히지만.... 끝까지 "의연한 자세" 를 잃지는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