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셰비키혁명(1917년)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 러시아 전국의 정교회 성직자들이 한 자리에 모두 모여서 교회의 본질을 논하는 대신 바늘 끝에 천사들이 몇이나 올라설 것인가와 성직자들의 가운의 후드 색깔을 빨간색으로 할 것인가 흰색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두 편으로 갈라져서 온종일 싸웠답니다.
날이 저물고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면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함께 혁명이 일어나 나라가 공산화되고 자유와 종교가 말살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밤이 저물도록 후드 색깔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끝없이 싸웠습니다.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내일 다시 싸워 서로 이길 것을 벼르며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내일이 없었습니다.
바로 다음날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고 모든 교회의 문은 못질을 당하여 굳게 닫혀버렸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 교회의 강단에서 목사들이 설교할 때 입는 가운을 보면 사실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형형색색의 가운들을 입기도 하고 심지어는 천주교 신부가 입는 옷(roman collar)을 입기도 합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제사장들이 입는 옷(에봇)을 입었지만 신약시대인 오늘날에는 목사들로 하여금 특별한 옷을 입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십니다.
사실 오늘날의 한국 교회 속에서 목사 가운이나 성가대 가운, 또는 헌금위원들이 입는 가운들은 어떤 편의를 위해서 입는지는 모르겠으나 부정적으로는 불필요한 권위나 자신의 과시를 위한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박사가운입니다.
양팔에 작대기가 세 개 그려진 박사가운을 입고 강단에 서는 목사들을 보면 저는 개인적으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듭니다.
물론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겠으나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 특별한 옷이 필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특히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박사가운은 더더욱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무지한 교인들은 박사목사를 구하려고 난리들이고(자신들의 위신을 위해서일까요?…) 목사들도 좋은 자리 얻으려고 박사목사가 되려고 야단들입니다.
심지어는 통신강좌로, 일년에 한 두 주간 미국 방문하고 박사가 됩니다.
더욱 심하게는 돈만 갖다주면 박사학위를 주는 싸구려 무허가 학교의 학위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박사학위를 무시하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깊이 있는 학문을 연구하면서 몇 년에 걸쳐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칠만한 논문을 하나 남기며 학위를 받는다면 이 얼마나 멋있고 성실한 모습이겠습니까?
다만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그저 자신의 허세를 드러내기 위해 가치 없는 박사학위만 받으려 소모적인 노력을 다하는 모습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벨기에와 영국에서 15년 가까운 날들 동안 사역을 하여오고 있고 또 공부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사역의 현장에서 수많은 동료들을 만났고 또 공부하면서 여러 이웃들을 보면서 한가지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외국의 여러 이웃들과는 달리 우리 한국의 학생들이나 목사들이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학위를 위한 학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라도 몇 년씩 외국에서 나름대로 공부를 하여서 학위를 받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통신으로 학위를 받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학부과정에서도 일주일에 두꺼운 책을 몇 권씩 읽어야만 하는데 박사과정을 어떻게 통신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말인지….
제가 출석하는 영국의 교회는, 그리고 유럽의 다른 교회들도 목사들이 설교할 때 특별한 가운을 입지 않습니다.
다만 소박해 보이는 정장차림으로 또는 영국 Bournemouth의 Richmond Park Church에서 설교하며 교회를 섬기던 Paul목사는 골덴 바지에 산뜻한 남방을 입고 기타를 메고 말씀을 전하며 찬양도 인도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으리으리해 보이는 가운을 입고 설교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는 감히 묻고 싶습니다.
한국의 목사들께서 형형색색의, 온갖 디자인의 가운을 입고 강단에 오를 때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를….
첫댓글 그렇다고 가운의 긍정적인 부분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정도에서 지나치지 말자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