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가 왜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의 용맹스러운 행동과 비장한 결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음은 내용의 번역입니다.
공(宋象賢)은 동래부사로 있었다. 임진년에 왜적이 침입하여 성이 함락되려 하자, 공은 피할 수 없음을 알고 급히 조복을 입고 갑옷을 입은 후, 호상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한 왜적 중에 평조익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과거 조신을 따라 공을 찾아왔을 때, 공이 그를 후하게 대접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평조익은 이에 감동하여 공을 구하려 했고, 공에게 성 곁의 빈 곳으로 피하라고 했지만, 공은 응하지 않았다. 평조익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 공의 옷을 잡아당기며 피하라고 했으나, 공은 이미 침상에서 내려와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있었다. 절을 마친 후 공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말했다.
“고립된 성에 달무리가 지고 여러 진은 편안히 잠들고 있으니,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공은 희생되었고, 죽기 전에 부하들에게 말했다.
“내 허리 아래에 콩알만 한 큰 점이 있으니, 내가 죽으면 이를 증표로 내 시신을 거두어라.”
얼마 지나지 않아 평의지, 현소 등이 와서 공의 죽음을 듣고 모두 애석해했다. 공을 해친 적을 찾아 처단하고, 공의 시신을 찾아 동문 밖에 묻고 나무를 세워 표식을 삼았다. 공의 첩 금섬은 함흥 기생이었는데, 포로로 잡혀갔지만 사흘 동안 욕을 하다 결국 죽임을 당했다. 적들은 그녀의 의기를 기려 관을 마련해 공과 함께 묻었다.
공의 관이 적진에 있을 때, 부인 중 한 명이 공의 기일과 명절마다 성대하게 제사를 지냈고, 이를 매년 계속했다. 후에 공의 동생 상인의 집을 찾아가 공의 절개를 이야기하며 슬퍼했다. 고기를 주자 먹지 않으며 말했다.
“오늘 공의 동생을 보니 공을 뵌 듯하여 고기를 먹을 수 없습니다.”
공이 다시 장례를 치를 때, 평의지는 말에서 내려 길을 피하고 공을 배웅했다. 유민 70여 명이 울부짖으며 100리 밖까지 배웅했다. 이량여라는 여인은 공의 또 다른 첩으로, 공이 적의 장수에게 위협받자 서울로 돌려보냈다. 하루 길을 가다가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말했다.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급히 동래로 돌아갔고,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녀를 취하려 했으나, 이량여는 거부하며 절개를 지켰다. 히데요시는 이를 의롭게 여겨 그녀를 풀어주고, 전 관백의 딸인 원씨와 함께 별채에 있게 하여 끝내 절개를 지킬 수 있게 했다. 신여로는 공과 함께 동래로 갔는데, 공은 신여로에게 어머니가 계시니 적에게 잡히지 말고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신여로는 돌아가는 도중에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했다.
“나는 공의 큰 은혜를 받았는데, 난리 중에 감히 목숨을 아끼겠는가?”
결국 다시 돌아가 공과 함께 죽었다. 조정에서는 공을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그의 집안에 제사를 지내며, 공의 아들에게 관직을 내렸다.
이 이야기는 나라의 위기 속에서 공과 그의 가족, 부하들이 보여준 충성과 용맹, 끝까지 굴하지 않는 정신을 잘 드러내며, 후세 사람들에게 큰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宋象賢 [주: 字德求號泉谷礪山人 宣祖 朝科 府使 諡忠烈 ]
公爲 東萊府使 壬辰倭賊入寇城將陷公知不免急取朝衣穿甲上踞胡床坐賊來逼略不動有一賊名平調益者曾隨調信往來公待之款調益感之嘗欲爲公報及是目公使避於城旁隙地公不應調益意公不覺又擧手至牽衣指之公已下床北向拜矣拜已致書于其父曰孤城月暈列鎭高枕君臣義重父子恩輕遂遇害公未死令其下曰吾腰下有大痣如豆吾死以此爲驗而收吾尸俄而平義智 玄蘇 等至聞公死皆嘆惜之出賊之害公者戮之尋公尸葬於東門外立木以表之公之妾金蟾者咸興妓也亦被擄罵不絶口者三日遂爲所殺賊奇之具棺竝公葬公櫬之在賊中也府人邁同者遇公諱日及節辰必盛設祭之歲以爲常後抵公之弟象仁家備敍公伏節事嗚咽不能已餽之肉不食曰今日得見公弟如見公奚忍肉公之返葬也平義智下馬引避而送之遺民之號哭追送于百里外者七十餘人 李良 女者亦公妾也公以賊將迫遣還京師行一日聞城陷慟曰吾寧死於所天遽返東萊被擄渡海 秀吉 將納之李死拒之 秀吉 義而釋之令與前關白之女源氏處於別院竟全節而歸申汝櫓者隨公赴東萊公以汝櫓有母恐被賊遣還汝櫓道聞賊陷釜山謂人曰吾受公厚恩臨亂敢愛死乎遂還詣公同死 朝廷贈公 吏曹判書 賜祭廩其家官公子一人
해동신감(海東臣鑑)
정조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귀감이 될 만한 역대 인물을 정리한 전기 자료이다.
정조가 잠저 시절 御定書로 편찬한 것으로 『群書標記』에 설명되어 있다. 권수에 ‘侍直 李商逸抄’라고 쓰여 있어서 본서의 필사자를 확인할 수 있다. 시직은 世子翊衛司의 정8품 벼슬이다. 『승정원일기』에서 확인해 보면, 이상일은 판서를 지낸 李成中의 아들로 1770~1773년(영조 46~49)에 시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따라서 본서는 이 시기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록된 인물은 신라시대부터 16세기선조대까지 활약한 인물들이다. 서술 방식은 해당 인물 아래에 자·호·본관·과거·관력·시호·문묘배향 등 간략한 인적 정보를 정리하고, 본문에서 그의 주요 행적을 요약하여 서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