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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광법우님의 발제문 중 ‘생각1’에 대한 답변입니다.
오프라인 공부시간에 시간이 부족하여 이런 훌륭한 질문이 제대로 토론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실상사] 뿐만 아니라 [서경]과 [부경]의 모든 법우님들의 의견을 구하고자 이렇게 답변을 올립니다. 오프라인에서는 온라인에서 할 수 없는 부분과 토론에 대한 정리를 하고자 합니다. 법우님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생각1’에 대하여는 우리 카페에 이미 올려져 있는 ‘2005. 8. 5.자 청산님의 질문에 대한 각묵스님의 답변’과 ‘아비담마 길라잡이 9장 §23 삼특상’ 내용을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상광님의 * 생각 1 *]
무상한 것이 괴로움인 것은 당연한 것인가?
아래 정형구에서 대답하는 괴로움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당연한 것인가?
"비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청산님의 질문]
스님! 안녕하세요?
무더위가 채 가시지 않았는데, 佛事(?)에 주력하시느라, 힘드시죠?
멋진 한글본 <긴 니까야>를 기대해 봅니다.
저희는 8월 한달간 공부를 쉬기로 하고, 각자의 시간을 갖는 중입니다.
바쁘신줄 알면서도 이렇게 까페 문을 두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삼법인에 대한 질문 때문입니다.
*질문내용: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초기경에서는 삼특상(三特相 = 법의 세 가지 보편적인 특징, 혹은 성질)으로 부르며, 북방에서는 삼법인으로 부르고 있읍니다.
(물론 북방에서의 삼법인은 무상 무아 열반을 뜻하지만요.)
그런데 무상과 무아는 그야말로 '보편적인 사실' 입니다. 즉, 만물(제법)에 속해 있는 '특징'인 셈이지요. 그런데 '고'는 약간 다른 것 같습니다.
'고'라고 할 때에는 '자아의지'를 바탕으로 한, 집착이 있을 경우에만 해당될 따름이 아닌가 합니다.
경에서는 '무상한 것은 모두 고'라고 하는데, 무상은 그야말로 객관적 사실이어서, 이것에 대하여 바른 견해를 면, '고'가 되지 않으며, 전도된 견해로 취착한다면 '고'가 되는 것이 아닌지요?
따라서, 특상 중 무상과 무아는, 제법의 보편적 특징을 드런낸 것이고, '고'는 제법에 대한 태도의 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어서, 같은 반열에 두는 것은 어쩐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한, 번뇌의 속성이 무상하고 무아이기 때문에, 즉 공하기 때문에 중생이 부처되는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요? 이럴 때에도 무상하기 때문에 고라는 논리가(?) 통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특상 가운데의 '고'가 단순히 '고통'이라는 의미외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요?
경전에 되풀이 되는 구절이어서 습관적으로 보았는데, 자료를 정리하다가 이런 의문이 들었읍니다.
청정도론, 아비달마길라잡이, 기타 여러 자료를 보아도 뾰족하지가 않군요.
바쁘시겠지만 좋은 말씀 기다리겠습니다.
지리산에서 청산 올림
[각묵스님의 답변]
청산님,
같은 산자락에 살면서도 봇 뵌지가 벌써 6개월은 넘은 것 같습니다. 열심히 정진하신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듣고 항상 기뻤습니다. 그리고 오랫만에 초불까페에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려주신 질문의 취지는 충분히 공감합니다. 일단 왜 제행이 개고인지에 대해서 제가 생각나는대로 몇 가지 적어보겠습니다.
먼저 고성제와 제행개고나 일체개고의 고는 단순한 고통(그것이 육제척이든 정신적이든) 즉 pain 혹은 괴로운 느낌(苦受)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학자들이나 남방학자들 가운데는 근원적인 괴로움이라는 의미에서 unsatisfactoriness(불만족성)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고성제와 일체개고의 고의 내용은 일체 유위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물질도 고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청산님이 문제를 제기하신 것처럼 저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물질이 어떻게 고냐, 그리고 감각접촉이나 집중, 마음챙김, 정진, 자애, 연민 등등의 여러 심리현상들도 그 자체는 고와 관계없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어법에서 고라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사실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고성제와 제행개고의 고는 단순한 고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받아들이셔야합니다. 이것은 불교의 통찰지가 아니고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먼저 생각하셔야할 점은 이러한 모든 유위적인 현상들은 그것이 물질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모두 무상합니다. 우리는 무상한 것을 가지고 행복이다 즐겁다고 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을 두고 행복이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질적 현상은 그 자체가 변하는 것이고 무상한 것이고 찰나생멸하는 것이기에 큰 틀로 고의 영역에 속한다고 이해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석서인가 어디에서 본 것 같은데요, 물질이 고라고 통찰하는 것은 아라한의 경지나 가서야 가능한 것이라고 한 듯합니다.
그리고 고성제의 핵심은 오취온고입니다. 오온을 나니 내것이니하고 취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주석서는 말하기를 중생세상에서 오온은 오취온일뿐이라고 합니다. 중생세상에서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는 반드시 취착을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취착없는 오온이라는 것은 중생세상에서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중생세상의 모든 물질과 정신은 반드시 취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욕계든 색계든 무색계든 존재하는 모든 것(오온=오취온=일체유위법)은 반드시 취착을 야기하고 그렇기때문에 고라는 것이 오취온고가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세한 취착은 불환과까지도 남아있으며 그래서 불환과를 증득한 사람들은 정거천이라는 색계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들은 그것이 원력이든 취착이든 오온 즉 세상에 대한 미세한 취착이 남아있으며 그러므로 고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취온고는 아라한이 되어야사 궁극적으로 해결되는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대념처경의 주석서에서는 마음챙김까지도 고라고 분명하게 설파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봤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굉장한 선법일지라도 그 근본성질상 그것은 괴로움일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념처경 주석서에서는 갈애를 제외한 삼계의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물론 갈애는 고의 직접적인 원인이고요. 사실은 넓게는 갈애도 고의 카테고리안에 듭니다.
그리고 느낌의 입장에서 보자면 느낌에는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행복한) 느낌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있는데 괴로운 느낌은 그 성질상 고입니다. 이것을 고고성(두카 두카따)이라 합니다. 즐거운 느낌은 그것이 바뀔때(위빠린나마) 괴로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느낌은 그 성질상 괴고성(위빠린나마 두카따)이라합니다.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불고불락수)은 이것에 대해서 미혹할때 괴로움이 됩니다. 그래서 느낌상응의 경들에서는 불고불락수는 미혹해지려는 잠재성향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불고불락수의 영역에는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이외의 모든 물질적 정신적인 현상들이 다 포함됩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행고성(상카라 두카따)이라합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유위법)들은 그 성질상 고일수 밖에 없다는 것이 초기불교와 주석서의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고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하는 의문은 잠시 내려놓으시고 일단 부처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떻게 관찰하더라도 고일 수 밖에 없다고 설파하셨다고 받아들이셔야한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삼특상의 무상-고-무아는 같은 현상을 다른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유위법들의 찰나생찰나멸을 강조한 것이 무상이고 무상이기에 모든 바람과 원함을 가지지 말 것을 강조한 것이 고이고 유위법들은 조건발생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 무아입니다. 그래서 무엇에 투철하였는가에 따라서 실현되는 해탈도 각각 무상해탈, 무원해탈, 공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무상 고 무아는 해탈의 세가지 관문이라고 부릅니다.
대충 두서없이 이만 줄입니다.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었기를 바랍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각묵 합장
[아비담마 길라잡이 9장 §23 삼특상 중]
우리는 무상.고.무아라는 단어에 너무 익숙하다보니 이 술어들의 중요성에 둔감해져버린 측면이 많다. 위빳사나는 우리가 개념 수준에서 생각하는, 인생도 무상하고 자연도 무상하고 물도 흐르고 바위도 언젠가는 부서지고 내가 누리는 즐거움도 변하기 마련이고 인간은 죽기 마련이고 아니면 기껏해야 우리 마음은 너무나 빨리 변하니 무상하고 ...... 등의 차원으로 무상.고.무아를 통찰하고 그런 것에서 초연하라는 수준의 가르침이 결코 아니다.
손가락 한 번 튀기는 사이에도 수많은 마음과 마음부수들과 물질의 깔라빠들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등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통찰하라는 가르침이다. 거기에는 ‘인생무상, 삶의 회의’라는 등의 감상은 도저히 끼어 들 수 없으며 서릿발보다도 더 냉엄하고 머리칼을 쪼개는 것 보다 더 날카롭고 번득이는 반야, 저 통찰지가 매찰라에 흐르고 있다. 그래서 이런 통찰지를 벼락(혹은 다이아몬드=금강석)에 비유하는 것이다. 아비담마의 아찰라를 다투는 전광석화 같은 통찰지가 지금 여기 나의 정신-물질 속에서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번득여야 참다운 위빳사나 행자라 할 것이다. ......중략......
[청정도론]“6. 무상이란 다섯 가지 무더기가 무상하다는 말이다. 무슨 이유인가? 생기고 멸하고 변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혹은 생겼다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생기고 멸하고 변하는 성질이 무상의 특징이다. 혹은 생겼다가 없어진다고 불리는 변화의 형태가[무상의 특징이다].
7.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라는 말씀 때문에 그 다섯 가지 무더기가 고다. 무슨 이유인가? 계속해서 압박 받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압박 받는 형태가 괴로움의 특징이다.
8. “괴로운 것은 무아다”라는 말씀 때문에 그 다섯 가지 무더기는 자아가 아니다. 무슨 이유인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형태가 무아의 특상이다.(아비담마 길라잡이 하 p777)
[우행의 생각]
그동안 삼특상을 너무 형식적으로 이해하여 온 것을 상광 법우님의 질문을 통하여 깨달았습니다. 다음 장(초불이 6장)에서 공부할 사성제의 고성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반성하고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四苦八苦의 내용 중 '오취온고'와 三性(고고성, 괴고성, 행고성)중 '행고성'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청정도론 7. 무상에 관한 것도 ‘행고성’을 말하고 있는데요, ‘계속해서 압박 받기 때문이다.’의 의미를 깊이 사유하면 약간의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괴고성에 대하여 혹자에게 ‘괴로움이 무너지면 다시 즐거움이 아닌가? 괴로움과 즐거움이 반복되는 상태를 꼭 괴로움으로만 봐야할 이유가 있는가? 즐거움으로도 볼 수 있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엉켜있는 그 자체로 봐야 하는게 아닌가. 그것이 인생 아닌가?’ 하는 반론을 종종 듣습니다.
단지 즐거움이 괴로움으로 변하고,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변하는 상태만을 언급하고자 했다면 이 논의는 의미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즐거움이 무너지면 고통으로 변하는 이 위험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즐거움이 무너지면 괴로움이기 때문에 즐거움도 ‘고’라는 언명은 충분히 이유있다고 생각합니다.
행선(송영상) 12.06.01. 13:59
첫댓글 '오취온고가 아라한이 되어야사 해결된다면' 결국 고는 탐진치의 문제입니다. 그러데 ' 존재하는 모든 것(유위법,책등)들은 그 성질상 고일수 밖에 없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 모르겠네요
고의 원인이 무명과 갈애라고 천명되었는데...
앙굿따라 니까야 외도의 주장경에서는
"비구들이여, 나는 느낌을 느끼는 자에게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천명한다."라고 말하고 있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