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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진보회 조직
1904년 일진회 조직
1907년 자위단 조직하여 의병 토벌
1912년 훈1등서보장
애국을 가장한 일진회 조직
1900년대의 일제 침략사의 중요한 일면으로서 일제침략의 추종세력인 이완용*과 같은 자가 생겨나기도 하고, 송병준*, 이용구와 같은 자들의 '일진회'(一進會)와 그 주변 단체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용구는 초명이 우필(愚弼), 후에 상옥(祥玉), 만식(萬植), 자는 대유(大有)였고, 호는 해산(海山), 시천교주(侍天敎主)로서의 도호는 봉암(鳳庵)이었다. 1868년(고종 5) 1월 21일(음) 경북 상주군 낙동면 진두리에서 고려 벽진장군 총언의 32대손으로, 아버지 일화(一和)와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몹시 가난하여 이사를 자주 하였다. 거기에다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더욱 가난에 쫓기어 그는 한때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그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18세 때 안동 권씨 종학(鐘學)의 딸과 결혼하고 노모를 봉양하면서 농사로 겨우 살아가다가 1890년 23세 때 동학에 입교하였다.
그는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에게 배워서 손병희 등과 함께 최시형의 고제(高弟)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호서군에 참가하였고, 최시형 등이 붙잡혀 처형될 무렵에는 그도 붙들려 옥에 갇혔으나 사형을 면하고 풀려났다. 제3세 교주 손병희는 최시형이 죽은 뒤 동학교도의 재수습에 노력해 보았으나 관헌의 탐색이 극심해져 그 형세가 날로 식어가 국내에서는 도저히 교세를 제대로 재건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병희는 장래 동학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면 문명의 대세를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세계 대세를 살펴볼 의도도 있고 해서 1901년 3월에 아우 손병흠, 이용구와 함께 일본에 망명하여 조용히 대세를 살폈다. 이용구는 먼저 손병희의 명교(命敎)를 받고 귀국하여 포교 활동에 종사하다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904년 9월에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여 주관하였다. 진보회가 강령과 취지에서 제시한 국정개혁이나 갑진(甲辰) 개화운동은 일진회와는 달리 커다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진보회의 혁신운동을 탄압하자, 이를 주시하던 일진회의 송병준은 진보회장 이용구에게 유혹적인 권고와 매수로 진보회를 일진회에 통합시켰다. 이보다 앞서 러일전쟁 당시 송병준은 전황이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군을 배경으로, 전 독립협회원이었던 윤시병(尹始炳)*, 유학주(兪鶴柱), 염중모(廉仲模) 등을 포섭하여 1904년 8월 18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다. 뒤이어 8월 20일에는 유신회가 일진회로 회명을 개정하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였다. 이 때 정부에서는 칙령을 내려 경무사 신태휴(申泰休)로 하여금 그들의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일본 헌병들이 이를 막았고, 오히려 경무청 순검을 검속한다고 위협하여 일진회의 회합을 옹호하였다.
이와 같이 일진회는 처음부터 일제의 보호와 지원 속에서 발족한 단체였다. 일진회가 창립 당시 강령과 취지에서 제시한 '국정의 개혁'과 '독립 추구'는 명분일 뿐, 처음부터 애국을 가장한, 표리가 부동한 상투적인 구호에 불과하였다. 창립하던 해인 1904년 9월에는 일진회의 급선무로서 회원의 일심단결의 표시로 모두 단발을 하고, 모자를 쓰고, 양복 차림을 하게 하는 등 문명 개화를 급격히 서두르는 체 하면서, 10월 22일에는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헌병대장 다카야마(高山逸明) 그리고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겐조(林權助)에게 보낸 공식서한을 보내 "일진회의 취지가 일본 군략상에 조금도 방해가 없다"며 친일색채를 공공연히 드러내었다.
실제로 진보회의 취지와 목적은 일진회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달랐는데, 그 후 송병준은 갖은 방법을 다하여 이용구를 매수하고 그로 하여금 손병희의 명교를 배반케 하였으며, 13도지회 지방총장을 거쳐 1905년 12월 22일에 일진회 회장이 되게 하였다.
이 때부터 이용구는 일제의 지원하에 침략의 앞잡이 역할을 거리낌없이 감행하였던 것이다. 일진회는 조직에서부터 해산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우치다(內田良平)·다케다(武田範之)·스기야마(杉山茂丸) 등의 막후조종과 자문을 받았다. 일진회가 반민족적 행위를 하는 데 있어서 일제는 막후에서 흉계를 전수하였으며, 일진회원들은 그들의 지시를 실천하는 데 급급하였다.
또한 일진회는 표면상으로 그 운영의 재정염출 문제는 각 회원으로부터 회비를 징수하여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정규적인 회비 징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일정한 수입의 재원도 없었다. 그런데도 일진회가 창립할 당시부터 송병준이 일제의 군사 기밀비로 망동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진회가 친일적인 행위의 기치를 점차 선명히 내세움에 따라 일제도 이를 이용하려고 5만 원을 밀조하여 특별한 보호를 하였다. 러일전쟁중 일진회 회원들은 일본군을 위한 수송·정탐·노역 등을 수행하고는 일군으로부터 급료 8만 9940원을 받았다. 전쟁 종료 후 통감부는 1907년 1월부터 반년간 매월 2000원씩 기밀 보조금을 주었고, 그 해 5월 15일에는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10만 원을, 이어 8월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보조금으로 26만 원을 주었다. 결국 일진회는 일본군의 특무기관이나 통감부와 교묘히 결부되어 그 경제적인 뒷받침을 받았던 것이다.
거리낌없는 일제 앞잡이 행각
일제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에 '한일의정서'(1904. 2. 23)와 '한일외국인 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1904. 8. 22)를 체결하고, 이른바 '고문정치 체제'를 확립하여 식민지 방안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일진회를 이끌고 있던 이용구는 일제에 협력하는 적극적인 행위로서, 일군의 북진을 위한 함경도 지방의 군수물자 수송(1905. 6. 10∼10. 20)에 총 11만 4500백 명을 동원하였다. 이 때 사상자는 49명에 달하였다.
또한 일진회는 함경도에서부터 간도 일대를 출입하면서 러시아군에 침투하여 비밀정탐을 하여 일본군을 거들었다. 이 때 각종 경비(실비)는 19만 원을 초과하였는데, 고금(임금) 영수액은 겨우 6만 3530원이였고, 회원 부담액은 13만 4230원으로 총 실비 중 일군은 실비의 3분의 1에도 미달한 급여를 지불했다. 이와 같이 일진회 회원들은 하루에 20전 내외의 임금을 받으면서 일군을 위해 전장에서 생사의 지경을 헤매었다.
또한 우리 정부에서 회피하려 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1904. 10∼1905. 9)에도 일진회는 자진해서 회원들을 동원하였다. 동원된 회원이 총 14만 9114명에 달하였으나, 그들이 받은 총임금은 겨우 2만 6410원에 불과했고, 회원부담액은 12만 2704원으로 총 임금액보다 회원의 부담액이 약 5배에 가까웠다. 공사 시간 동안 그들이 받은 임금은 한 사람당 불과 18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용구, 송병준 등은 자신의 영달과 명예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일제의 침략을 돕기 위해 거의 무보수로 회원들의 희생을 한 셈이었다.
한편,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우리 나라를 보호국화한다는 불길한 내용이 국민들에게 알려지고 있는 가운데, 일진회는 고문인 사세(佐__態__)가 기초한 선언서에 수정을 가하여, 1904년 11월 6일에 이른바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하여 '을사늑약'이 강요되기에 앞서 관제 민의를 조작케 하였다.
이 선언서는 "일본의 지도보호를 받기 위해 내치 외교권을 일본에 일임해야 된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로써 일진회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 선언서가 발표된 지 10일 후인 17일, 드디어 일군의 위압 아래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에 의하여 우리 나라는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당함으로써 국제적으로 고립상태에 빠지고 결정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손병희는 긴급히 이용구를 불러 "도대체 어쩌자고 보호선언이란 망동을 하였느냐?"라고 책망하니, 이용구는 "현하의 대한은 보호독립이 시의에 적합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라고 보호독립이라는 망답을 하였다. 그러자 손병희는 "보호를 받으면 독립이 아니요, 독립을 하면 보호가 불필요한 것인데, 어떻게 보호독립이란 말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용구는 "선생님 걱정마십시오. 제가 이토에게 '안네기'를 걸었습니다. 이제 적당한 시기에 제가 닥치기만 하면 이토는 나가 자빠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손병희는 "이토가 어떤 사람인데 안네기에 걸리겠나, 바로 그대가 걸리면 걸렸지"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손병희는 이용구의 배신과 일제에 매수된 망동으로 말미암아 진보회를 조직하여 국권을 찾으려는 깊은 충정이 도리어 실패로 돌아가자, 동학혼 수습과 교도의 재조직에 착수하여 1905년 12월 1일 동학의 교명을 천도교(天道敎)라 개칭하였다. 그리하여 일진회의 망동을 계속 고집하는 이용구 등 동학의 대두목들인 친일 앞잡이 62명을 출교처분하였다.
이에 이용구는 시천교를 창설하여 교조가 되었다. 한편, 일진회는 '을사늑약'에 의하여 1906년 2월에 일제 통감부가 서울에 설치되고 조약 체결의 원흉인 이토가 통감으로 부임(1906. 3)하자, 지금까지의 일본 군부의 보호 아래에서 벗어나 통감부의 휘하에서 일진회 고문인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진회 선언서와 강요된 '을사늑약'에 대하여 전국민의 격분은 절정에 달하고 있는 반면에 일진회원들은 반민족적 행위의 대가로 조약이 체결된 지 2개월 뒤에는 군수로 임명되기 시작하더니 반년 뒤에는 관찰사에까지 기용되고, 송병준은 농상공부대신(뒤에 내무대신)이 되었다. 일제 침략자들은 침략의 앞잡이를 등용함으로써 침략정책을 무난히 강행하고자 하였다. 또한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國民新報, 1906. 6)를 통해서 온갖 친일적인 망발을 퍼뜨렸다.
1907년 7월 헤이그밀사 파견문제를 계기로 하여 송병준은 이완용 친일내각과 결탁하여 어전회의에서 고종의 양위를 강요하였다. 동시에 이용구는 일진회 회원들을 동원하여 궁궐 밖에서 거리낌없이 돌아다니면서 시위하게 하였다. 일본의 압력과 일제 앞잡이들에 의하여 고종이 양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행동으로 나타났다.
격분한 시민들은 이완용의 집을 태워 버리고 부근의 파출소를 파괴하였다. 또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사를 습격하여 건물과 기계를 부수고 사원을 구타하여 부상을 입혔다. 또한 시위보병 제1연대의 일부 병사가 무기를 가지고 병영을 벗어나 경무청에 발포하여 일본 경찰관과 총격전을 벌이는 등 민중시위와 무력충돌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일제는 '정미7조약'(1907. 7. 24)을 체결하고 통감의 내정간섭을 합리화했을 뿐만 아니라 이완용 친일정부로 하여금 '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 '보안법'(保安法)을 공포케 하여 우리 나라 국민의 정당한 의사표시와 항일운동에 규제를 가하였다. 여기에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일차적으로 해산을 당하였다. 뒤이어 한국군이 해산되고 이에 항일의병이 봉기하자, 이용구는 일진회 고문인 우치다, 다케다 등의 조종 아래 의병을 진압할 이른바 자위단(自衛團)을 조직하여 의병토벌에 앞장을 섰으며, 심지어 의병을 폭도로 매도하였다. 이와 같은 일진회의 반민족적 행위는 일본 제국주의 이상으로 분격을 샀다.
1907년 7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의병에게 입은 일진회원의 피해는 사살자 9천206명, 부상자 140명, 불에 탄 집이 360호, 재산손해액 5만 501원 31전에 이르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 무수한 일진회원들이 의병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07년 10월에 일본 왕세자가 우리 나라에 왔을 때에도 일진회의 이용구는 그들 고문의 지시에 의하여 환영 녹문을 세우고, 토산물 헌납과 제등행렬을 하였다. 또 같이 따라온 대한 강경파인 가스라(桂太郞)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용구는 갖은 망동의 추태를 부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침략의 앞잡이로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이용구는 일왕 메이지로부터 1907년 7월 18일 '삼등서보장'(三等瑞寶章)이라는 훈장을 받기까지 하였다.
매국의 정체가 드러나자 궁지에 몰려
1909년에 이르러 일제는 사법권 및 감옥사무를 탈취하고(1909. 7. 12), 군부마저 폐지하였다. 그들은 '경찰권'마저 강탈하고(1910. 6. 24) 여기에다 '출판법'(1909. 3. 26)을 공포하여 우리 국민의 언론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러한 때 이토가 통감에서 물러나고, 부통감인 소네(曾__荒助)가 통감이 되었다가 곧 사임, 이듬해 5월에 데라우치(寺內正毅)가 통감이 되었다. 데라우치는 '한국병합 실행에 관한 방침'에 따라 7월에 '병합처리방안'을 성안하여 그들의 각의를 거쳐 이를 처결하였다. 이제 일제에게 남은 하나의 조치는 이른바 '합병'의 공표밖에 남지 않았다.
이 무렵 이토가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되었다(1909. 10. 26). 이용구는 이 기회에 그들의 친일적인 열성을 과시하려고 사죄단(謝罪團)과 동아찬영회(東亞讚英會)를 조직하는 등 갖은 망동을 다하였다. 또한 이 의거를 계기로 해서 일본 국내의 대한 과격파인 가스라, 야마가타(山縣有朋) 등을 비롯해서 일진회의 고문인 우치다, 다케다, 스기야마 등이 일진회의 '합방성명서'를 조작하였다.
일제는 형식상의 법적 절차로 우리 나라 국민 스스로가 합방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날조하려고 한 것이다. 합방이 우리 국민 스스로의 의사라고 가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앞잡이인 이용구가 이끌고 있는 일진회를 시켜 거국 정당으로 만들고, 우리 나라 최대의 거국 정당으로 하여금 합방성명을 발표케 하는 방법이 첩경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일제는 먼저 일진회의 고문인 우치다를 시켜 일진회, 대한협회, 서북학회 등과 이른바 3파연합의 제휴공작을 벌였다. 그러나 그들의 흉계인 거국 연합이 깨어지자 일진회는 단독으로 강행할 것을 결의하고, 서울 회원 200명을 긴급 소집, 임시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는 아무런 반응도 없는 회원들에게 앞서 조작한 합방성명서를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며(1909. 12. 3) 매국 행위에 열을 올렸다.
이른바 1백만 회원을 호언장담하는 일진회가 실제는 몇 명이나 되는 회원이 결의내용에 찬성하였는지 극히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튿날인 12월 4일에 발표한 일진회의 이른바 '합방성명서'를 비롯한 '상소문', '상통감서', '상내각서' 등은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압적으로 병탄하기 약 8개월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한민족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한일양국은 합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진회의 성명은 일제가 조작한 여론 환기수단이었다는 것이 너무나 명확했기에 이에 대한 전국적인 규모의 반대운동이 즉각적으로 일어났다.
일진회가 성명서를 발표한 이튿날인 12월 5일 {대한매일신보}는 그 사건에 대해 '노회선언'(奴會宣言)이라 혹평하였다. 또한 대한협회, 한성부민회, 국시유세단, 흥사단 등의 여러 단체와 협의하여 '국민대연설회'의 개최를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타도 일진회'의 선봉에 나서 일진회의 망언패설을 통렬히 공격하고 매국의 앞잡이 이용구, 송병준을 성토하였다.
손병희의 천도교, 각 학교 교사, 학생까지도 매국역적 일진회를 성토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평양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은 이용구를 서울 지방재판소 검사국에 고발까지 하였다. 중추원 의장 김윤식(金允植)* 등은 이용구, 송병준의 처형을 정부에 건의하였다. 한편 일부 격렬한 애국청년들은 연설회와 같은 소극적인 방법으로 그들 망국 앞잡이 일당을 규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암살을 감행함으로써 그들의 매국행위를 적극적으로 응징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동경 유학생 김익삼(金益三), 이익선(李翼宣) 등이 중심이 되어 이용구 암살을 목적으로 귀국했다가 영등포역에서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었고, 이재명(李在明), 김정익(金貞益) 등은 이용구·이완용 등을 암살키로 결의하여 이완용 암살미수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용구의 일진회에 대한 이와 같은 성토와 응징은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으로 점차 확대되어 갔다. 전국의 양반, 학생, 기독교인 할 것 업이 구국의 이념으로 상소, 연설 혹은 격문 등을 통하여 반대여론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이에 궁지에 몰린 이용구, 송병준 등도 일본경찰에 일진회 본부를 맡기고 진고개의 일본인 요정 청화정에 숨어 살았다. 일진회원들은 그들의 성명서가 반대 규탄 운동의 대상이 되어 국민의 격분을 불러일으키자, 탈퇴자가 속출하여 서울에서는 90여 명이 한꺼번에 일진회를 탈퇴하였다. 일부 지방에서는 주민으로부터 어떤 해를 입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서울로 올라왔다가 서울의 정세가 오히려 더욱 험악한 것을 보고 일진회를 탈퇴하는 경우도 생겼으며, 평양지회에서는 회원이 모두 탈퇴하여 마침내 일진회 지부가 해체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반민족적 망동의 결과로 매국노 이와 같은 빗발치는 여론 속에서도 일진회의 선봉에 선 매국 앞잡이들은 당초 계획대로 반민족적 망동을 끝가지 감행하려 하였다. 12월 7일 이완용 내각에 합방건의서를 다시 제출하는가 하면, 이용구 등은 고문인 우치다와 결탁하여 일진회의 외곽단체인 한성보신사, 대한상무조합소, 국민동지찬성회 등 유명무실한 단체를 매수·사주해서 일진회의 합방성명서를 지지하도록 조작하고 일제가 우리 나라 병탄을 합리화하는 데 망동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대한상무조합소 조합장 이학재(李學宰)라는 자가 매수되어 망동을 감행하자 분격한 종친회에서는 그의 이름을 족보에서 삭제하였고, 상무조합에서는 조합장직을 박탈하였다.
이렇게 사태가 더욱 심각해지자 통감부측도 그냥 방치해 둘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서울에 있는 일인 신문기자들에게도 돈 1000원을 주어 '합방찬성 거류민회'라는 것을 개최케 하였다. 또 '시국연구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그들로 하여금 선언문, 결의문 등을 발표하게 하고 합방론을 찬성하도록 하였다. 일본 도쿄에서조차 '조선문제동지회'라는 것을 조작하여 합방론을 펴게 하였다.
이와 같은 찬반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진회의 성명서에 대한 반향을 통해 반대 세력의 폭과 깊이를 알아챈 일제 당국은, 머지 않아 단행될 합방을 위한 최종적 마무리 작업을 용이하게 행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한일병합조약'(1910. 8. 22)이 체결되고 우리 나라의 국권은 강점당하였다. 그리고 그 해 9월에 일진회는 반민족적 행위의 망동을 다하고 일제로부터 해산료 15만 원을 받고 해산당하였으며, 그들의 논공행상으로 송병준에 자작(子爵)을, 이용구에게는 10만 원을 주는 데 그쳤다.
일찍이(1907) 이용구는 경술국치가 성사되면 일진회원과 만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그 소요자금으로 3백만 원을 지급해 줄 것을 가스라 수상에게 요청한 적이 있는데, 가스라는 이것에 적극 찬의를 표명하고 "3백만 원은 물론 1천만 원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이용구는 이 말을 믿고 더욱 반민족적 망동을 자행하였는데, 병합이 이루어진 마당에 일진회 해산명령이 내려지고 해산비로 겨우 15만 원이 지급되었을 뿐이니, 만주 이주란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처럼 냉혹하게 일제에게 배신당할 줄은 이용구로서 꿈에도 상상 못한 일이었다. 이용구는 배신의 충격이 너무나 컸던지 얼마 후 일본 스마에서 병석에 눕는 몸이 되었다. 눈을 감기 얼마 전에, 이용구는 문병차 스마에 들른 우치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는 참 바보짓을 했어요. 혹시 처음부터 속았던 것은 아닐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정곡을 찌른 말이다. 천리를 망각한 이용구는 처음부터 속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의 고민과 더불어 이용구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1912년 5월 22일 죄많은 그의 생애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일제는 이용구가 죽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거의 국장이나 다름없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일왕으로부터 '훈일등서보장'(勳一等瑞寶章)이 내려졌다. 일제에 충성을 바치면 죽어서도 이렇게 성대히 장례식을 치러 준다는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용구는 죽어서까지 일제에 이용당한 매국노였던 것이다.
■ 조항래(숙명여대 교수·한국사, 한국사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회장)
■참고문헌
李寅燮, {元韓國一進會歷史} 4冊(文明社, 1911.
武田範之, {李鳳庵事歷} 上, 洪田+壽遺績目錄 81.
宋秉畯, {海山李容九墓誌銘}.
武田範之 編, {侍天敎繹史}.
內田良平, {海山李容九先生誅詞}.
黑龍會 編, {李鳳庵先生事略}
大東國男, {李容九の生涯}, 時事通信社, 1961.
西尾陽太郞, {李容九小傳}, 偉(사람인변생략)書房, 福岡, 1978.
橋本健午, {父は祖國と賣つたか}, 日本經濟評論社,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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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구 관련 글
http://hyunk02.egloos.com/16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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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동학혁명 100주년에 쓴 이이화선생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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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옥(이용구)(1868-1912)
-'동학재건' 팽개치고 친일 선봉, 최시형 총애받은 지도자 … 일진회 결성 한일합방 앞장
경기도와 충청도의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1894년 9월 무렵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치열하게 번졌다. 이를 토벌키 위해 죽산부사 이두황과 안성군수 성하영이 우선봉진의 지휘관이 되어 골골을 쑤시고 다녔다. 이곳의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한 사람이 바로 이상옥이다.
이상옥은 경상도 상주땅 낙동강 강가 마을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워낙 가난한 탓으로 여덟살 적에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경기도 안성에 이사온 뒤, 경기도와 충청도를 넘나들며 살았다. 더욱이 열세 살 적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여의어 집안 살림이 온통 그에게 떠맡겨졌다.
1890년대 초 동학이 한창 번져나갈 적에 최시형을 찾아 동학에 입도하고 나서 생업보다 동학포교에 열중하게 되었다. 동학 입도는 그의 운명을 갈라놓았지만 뒷날 역사에 오명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많은 교도를 거느리고 보은집회에도 참여하였다. 보은집회가 있은 뒤 각지의 수령과 토호들은 동학교도라는 혐의를 씌워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족치거나 재산을 갈취하고 있었다. 이천땅에 사는 토호 김봉규도 그런 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경기 일대의 '영웅'
이상옥은 1894년 봄 교도 몇천 명을 이천에 모아놓고 이천군수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이천군수는 그 위세에 눌려 잡아가둔 교도를 풀어주고 빼앗아간 재산을 돌려주었다. 이 일로 하여 경기도 일대의 하층민들은 그를 영웅으로 우러러보게 되었다. 당시 경기도 수령과 토호들은 서울과 끈이 단단하게 이어져 있어서 민중들은 다른 지역보다 더욱 숨을 죽이고 있었다.
청년 이상옥은 그 뒤 교단에서도 인정을 받아 경기도 편의사라는 직책을 받는다. 그는 편의장 이종훈과 함께 이 일대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당시 맹영재 등이 민보군을 조직해서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를 넘나들며 교도와 농민군을 잡아 살육하고 있었다. 강원도·경기도 일대의 많은 사람들은 충주의 황산에 있는 충의포 도소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충의포의 대접주는 손병희였다. 이렇게 되자 조정에서는 이두황을 장위영 영관, 성하영을 경리청 영관을 삼아 우선봉진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토벌케 했다. 또 선유사 정경원은 포군 8백 명을 이끌고 사창리(지금의 음성군 금왕읍)에 진을 쳤다.
성하영을 경리청 영관을 삼아 우선봉진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토벌케 하였다. 또 선유사 정경원은 포군 8백명을 이끌고 사창리(지금의 음성군 금왕읍)에 진을 쳤다. 사창리와 한마장 떨어진 황산의 농민군과 한바탕 싸움이 벌어질 뻔하였으나 정경원군은 군사를 돌렸다. 이에 이종훈과 이상옥은 충주·안성·양지·여주·이천·양근·지평·광주·원주·횡성 ·홍천의 농민군을 황산 충의포 도소로 모아들였다. (천도교 교회사 초고)
이상옥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수만명은 무극장터(지금의 금왕읍)로 진출했다. 우선봉진의 군대와 한바탕 전투를 벌이려는 것이었다. 이때 괴산에서는 충주에 있는 일본군을 끌어들여 농민군을 살육하고 있었다. 이들 농민군은 발길을 돌려 괴산땅을 들이쳤다. 그리고 하룻밤을 괴산에서 지내게 되었다. 한편 진천의 구만리 장터에 모여 있던 수많은 농민군은 진천관아를 들이쳐 군기를 빼앗아 갔다. 이들은 합류해서 청주로 진출했다. 이두황은 이들을 뒤따라오며 무고한 양민을 잡아 쳐단하고 있었다.(우선봉일기)
사형 기다리다 구출
이후 북접의 농민군은 남접의 농민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10월 9일 논산에 집결하고 나서 공주전투를 벌인다. 이상옥은 북접 농민군의 지도자로 17일 충청감영의 뒷산인 봉황전투에 나섰다. 한나절을 접전한 끝에 이상옥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리하여 논산으로 물러나와 있다가 주력부대와 행동을 같이해서 태인까지 간 다음 임실에서 최시형을 만나 충주까지 동행한다.(이때의 과정은 다음의 손병희 편에 나옴) 그는 충주에서 일단 최시형, 손병희와 헤어진다.
우리는 이상옥의 그후의 행적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가 몸을 피해다니는 생활 속에서 아내는 바위굴에서 해산을 했으나 미역국은 커녕 사흘동안 밥을 굶는다. 그의 어머니는 밥을 빌어 산모를 먹였다.
그가 수원땅에 속하는 독포도라는 섬에 숨어 지낼 적에 그의 아내는 잡혀 모진 고문 끝에 몇달 만에 풀려났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곧 죽는다. 그는 몸을 피해 다니다가 1895년 홍천에 숨어있는 최시형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찾아왔다가 잡히는 몸이 되어 이천감옥에 갇힌다. 이때 최시형의 소재를 대라는 모진 추궁을 당했지만 왼쪽 다리뼈가 부러지면서도 그 소재를 대지 않고 "동철은 비록 좋으나 단련하지 않으면 좋은 그릇을 만들 수 없고 송백은 비록 굳세나 눈서리가 아니면 높은 절개를 알지 못한다."(시천교종역사)고 말했다 한다. 두고 볼 일이다.
그는 넉달만에 풀려났으나 1898년 최시형이 원주에서 잡힐 적에 다시 잡힌다. 그는 경성감옥에 끌려가 또다시 다리가 부러지나서 끝없이 잠행하여 황해도·평안도·함경도 일대의 포교에 전념한다. 그러다가 1898년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위해 어머니를 는 고문을 받고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러나 추종자들이 감옥을 깨고 구출해 내서 다시 살아남았다. 1901년 손병희가 일본에 갈 적에 함께 따라갔고 그후 세차례에 걸쳐 도쿄를 왕래했다. 이때 손병희는 그에게 동학 재건의 소임을 맡기고 또 중립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상옥을 데리고 미국으로 유람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스스로 시천교 창교
이상옥은 중립회를 진보회로 개칭하고 다시 진보회는 일진회로 통합되었다. 이때까지 손병희의 신임을 받고 지시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이루어질 적에 그는 손병준과 함께 "대한의 일본 보호"를 외치고 나왔다. 이때 그의 이름은 상옥에서 용구로 바뀌어져 있었다. 상옥에서 만식으로 바꾸고 다시 용구로 개명하였는데 그의 이름과 함께 그의 행동도 변절되어 갔다. 이용구는 일본을 왕래하면서 일본 군부의 끄나풀이 되었고 또 송병준의 유인에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을사조약이 이루어질 무렵 그 마각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보호국 문제는 손병희의 반대에 부닥쳤고 또 일진회 회원의 탈퇴소동이 벌어졌다. '역적 이용구'라는 구호가 온 나라에 걸쳐 메아리쳤으나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런 지경인데도 손병희는 계속 그에게 교수의 직책을 주기로 하고 천도교가 창건될 적에 고문으로 추대하기도 했다. 끝내 이용구가 일진회를 친일행동대로 밀고 나가자 손병희는 어쩔 수 없이 1906년 이용구 등 62인을 천도교에서 출교처분하고 만다. 이에 가만히 있을 이용구가 아니었다. 그는 친일세력을 이끌고 새로이 시천교를 창교했다. 그리하고 동학의 정통을 이었다고 떠벌였다. 여기에 웃지못할 일화가 하나 있다.
"내가 속은 것인가"
1907년에 내각에 여러차례 건의한 끝에 그가 교조 최제우와 최시형을 신원케 한 일이다. 교조신원이 농민군 봉기의 한 원인이 되었는데 그의 노력으로 신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최제우의 초상을 유명한 화가 안중식을 시켜 그리게 하고는 교당에 걸어놓고 받들었다. 너무 심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는 1909년 12월 일본 천황과 각계에 '1백만 일진회 회원' 이름으로 합방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합방에 앞장섰다. 그러나 합방 뒤 일본이 주는 작위를 거절했다.
그는 1911년 신병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일본에서 입원치료를 하던 중 그는 한국에서 함께 합방활동을 벌인 극우인사 다케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한다.
"나와 송병준이 속은 것인가"
죽기 직전의 그의 정확한 심사를 알 길이 없다.
변절자 이용구의 아들 이석규
일본서 자라나 우익활동
'이용구의 생애' 책 펴내 아버지 변호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이용구의 후손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80년대 일본 도쿄대에서 일제 침략사를 연구한 강창일 배제대 교수는 이용구가 낳은 이석규(일본명 다이토 쿠니오)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85년껜가 대학으로 나를 찾아왔다. 70대 중반의 노령으로 몸이 상당히 쇠약해 보였다. 길게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매국노가 아니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만나지 못했는데 몇해 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교수에 따르면 이석규는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용구에게는 양아들 현규가 있었다. 그 뒤 이용구가 병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오자 아버지를 따라 왔다. 1912년 이용구가 죽자 일본의 극우인사 다케다가 관계하는 나고야의 조동종 절에서 자랐다. 다케다는 이 종파에 소속된 승려로서 한일합방 당시 일진회 등과 접촉하며 합방을 부추긴 인물이다. 그의 일본이름에 들어있는 대동국(大東國)은 일본·조선·만주·몽고가 동이족의 한 나라를 건설하자는 뜻의 우익용어이다. 그는 이송학사 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일제시대 동안 대동숙이라는 우익단체에서 활동했으며, 한·일 수교 전에는 '일한 회담 촉진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한·일수교 뒤에는 몇차례 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는 1960년 <이용구의 생애>라는 책을 써서 아버지의 삶을 변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선린우호의 초일념을 관철한다.'는 부제를 붙인 이 책에서 이석규는 "이용구는 훌륭하다. 선린우호의 차원에서 일본과 조선의 대등한 합방을 추진했다. 그러나 일본의 일부 정치권력자에 속아 나라를 병합당했을 뿐이다. 그는 매국노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석규는 일본 여자와 결혼해 딸 하나만을 남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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