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특권적 표상과 분석철학
19세기 말의 철학은 심리학의 발전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은 철학에 대신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하나의 희망처럼 간주되었다. 따라서 느슨하고 단순한 물리주의만이 심리학에 의해서 인식론을 자연화하기 위한 유일한 존재론적 대안으로 제안되었다. 한 편, 여전히 심리학이라는 과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철학의 고유한 기능을 인정하기 원하는 견해들은 관념론을 유지하면서 정신적 가치를 구제해 내려고 하였다.
심리주의나 관념론을 그대로 수용하는 대신에 '대응으로서의 진리'와 '표상의 정확성으로서 지식'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흐름이 가령 듀이에게서 나타났고, 이에 따라 철학을 메타 비판으로 간주하는 칸트의 생각을 거부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니체, 베르그송, 딜타이와 같은 철학자들은 칸트의 몇몇 전제들을 비판하면서 인식론, 확실성, 구조, 엄밀성에 대한 추구, 철학 자체를 이성의 법정으로 삼으려는 시도 자체를 거부하려고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 훗설은 자연주의와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그의 현상학적 철학을 시작한다. 수학의 명증적이고 경험독립적인 진리를 오염시킨 심리주의에 대한 공박에 럿셀이 가세함에 따라 철학의 본질은 바로 논리학이라는 주장이 성립되게 이른다. 명증적이며 경험독립적인 진리를 찾기 위해서 럿셀은 논리적 형식에 의존하고, 훗설은 세계를 괄호 안에 넣고 세계의 순수하고 형식적인 측면을 발견하려고 한다. 다시 특권적 표상이 발견됨에 따라 진지하고 순수하며 엄정한 확실성의 추구로서 철학의 이념이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훗설의 추종자로서 하이데거, 싸르트르 등과 럿셀의 추종자로서 셀라스와 콰인 등은 헤겔이 칸트에 대해서 제기했던 의문과 동일한 의문을 현상학과 분석철학에 대해서 던지고 있다. 현상학은 훗설이 단순한 인류한이라고 불렀던 그런 것으로 변질되어 갔고, 분석적 인식론으로서 과학철학은 핸슨, 쿤, 하레, 헤세 등을 통해 점점 역사적이며 덜 논리적으로 변질되어 갔다. 여기에 과거 훗설과 럿셀이 직면했던 동일한 문제가 나타난다. 즉 철학이 너무 자연주의화되면 콧대 높은 실증적인 학문, 즉 과학들이 철학을 젖혀 버릴 것이며, 만일 너무 역사화된다면 지성사, 문화비평, 그리고 유사한 종류의 인문학들이 철학을 삼켜 버릴 것이다.
직관과 개념이라는 두 가지 표상들이 분석철학 안에서 어떻게 평가절하되는가? 심리학과 구분되는 철학적 작업으로서 인식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직관과 개념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함께 종합되어 지식을 구성한다는 칸트적 그림이 필요하다. 이것은 주어진 것과 정신에 의해서 덛붙여진 것, 우연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들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면, 무엇을 우리 지식의 이성적 재구성으로 간주할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여의 개념은 이미 노이라트에 의해서 카르납의 문제로 제기되었고, 럿셀의 '친숙지'의 개념이나 루이스의 '표현적 언어'에 대해서 의문들이 제기되었지만,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이나 감각소여에 대한 오스틴(J.L.Austin)의 비판, 셀라스의 [경험론과 심리철학]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필연성과 우연성의 구분에 대한 비판은 콰인의 [경험론의 두 독단들]에서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경험과학은 사실적인 경험내용을 다루는데 반하여 철학은 언어적, 논리적인 경험의 구조를 다룬다는 생각이 비판되기 시작했다. (콰인은 바로 이 점에서 철학의 자연주의화(philosophy naturalized)를 선언하고 있다. 철학은 어떤 경험독립적(a priori) 작업이 아니라 과학과 경험적 연속성을 지닌 이론적 작업이어야만 한다. 분석성과 종합성, 언어성과 경험성, 내용과 구조의 구분이 다만 정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경험적 내용을 취급하는 과학과 구분되는 철학의 독특한 영역이란 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도전과 비판은 바로 지식이론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철학 자체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로티는 소여의 개념에 대한 셀라스의 비판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분석성과 종합성, 필연성과 우연성에 대한 콰인의 비판을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이 함축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소여의 개념이 부정되면서 모든 것들이 바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분석성과 종합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인식론적 기초주의나 환원주의가 거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필연성과 우연성의 구분이 거부됨에 따라 형식적인 논리성이나 개념성이 바로 구성되는 우연성의 전체적 맥락 속에서 근거지워진다. 따라서 로티는 셀라스나 콰인에게서 보이는 전체론(holism)을 옹호하면서, 정당화란 관념이나 말과 대상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대화나 사회적 관행의 문제임을 주장한다. 즉 "대화적 정당화는 자연스러운 전체론이지만, 그러나 인식론적 전통 속에서 구현된 정당화의 개념은 환원적이고 원자론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에 대한 사회적 정당화를 이해한다면 지식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더 이상 지식을 표상의 정확성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게 된다. 대상과의 직면(confrontation)을 대화로 대체한다면 자연의 거울로서 정신의 개념을 제거할 수 있다. 이 문맥에서 거울을 구성하는 것들 중에서 특권적인 표상을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철학의 개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체론에서 개념적이며 명증적이며 기초적이고, 순수하게 주어진 표상이나 개념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따라서 경험적 발견 이전에 표준적인 표기법을 제시하거나 개념적 범주를 구성하는 작업은 성립될 수 없다. 이러한 전체론은 확실성의 추구와는 전혀 상관 없는 철학 개념을 만들어 낸다.
콰인은 철학의 자연주의화를 선언한 후에 전통적 철학을 대체하는 과학이 어떤 작업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그리 분명한 견해를 제시해 주지 않았다. 나아가 과학에 대한 콰인의 생각은 여전히 도구주의적이다. 그의 생각은 여전히 자극과 가정(posit)이라는 낡은 구분에 의존해 있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셀라스는 소여의 개념을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분석과 종합, 필연과 우연의 구분에 매달리고 있다. 콰인이나 셀라스가 보여주듯이 분석철학이 이러한 구분의 한 쪽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들이 부정된다면 더 이상 분석철학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문체(style)이나 사회적이고 제도적 측면 이외로 분석철학임을 구분해 줄 수 있는 징표는 없다.
2. 인식론적 행동주의
콰인이나 셀라스는 논리적 경험주의가 주장하는 인식론적 특권에 대하여 행동주의적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콰인은 원주민의 언어를 이해하는 원초적 번역(radical translation) 상황에서 우연적이고 경험적인 언급과 필연적이고 개념적인 진리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마찬가지로 셀라스는 일인칭적 보고와 다른 경험적 보고의 차이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주장이 그것이 표현하는 내적 표상의 특징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것이라면 특권적인 표상을 구분해 내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합리성이나 인식적 권위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것으로 해명하는 입장이 바로 인식론적 행동주의이다. 이러한 입장이 듀이와 비트겐슈타인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태도이다. 이러한 행동주의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적 토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종의 전체론이다. 만일 우리가 언어놀이의 규칙을 이해한다면 그 언어놀이에서 어떤 행동이 일어나게 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있는 모든 것들을 이해하게 된다. 인식론적 행동주의는 진리에 대해서 실용주의적 견해를 취하고 존재론을 해체하는 치유적 개념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콰인에게서 필연적 진리란 어떤 언급을 의심하게 하는 어떤 흥미로운 대안을 아무도 제시하지 않는 그러한 언급이다. 마찬가지로 셀라스의 경우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대한 보고가 틀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진지한 태도를 가진 일인칭 화자가 생각에 대해서 행한 즉각적인 보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의 행위를 예견하고 통제하는 좋은 방식을 그 누구도 제시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인식론적 행동주의는 라일의 행동주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것은 지식과 진리에 대해서 상식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철학이 제시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인식론적 행동주의는 환원적 분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설명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의미에 대한 직접적인 앎이나 혹은 감각적 현상에 대한 직접적 앎 등과 같은 개념을 인간과 실재 사이에 개입시키고 이것에 신빙성을 주기 위해서 이 개념을 다시 사용하는 설명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식론적 행동주의는 인간의 행동을 인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가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원느낌, 선험적 개념, 본유 관념, 감각정보, 명제 등을 기꺼이 용인하면서도 지식에 대한 셀라스나 콰인의 견해를 취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내적이거나 추상적인 존재에 대한 지식을 어떤 전제로서 간주하는 일이다. 우리가 믿음을 채택하거나 페기하는 시기와 이유를 이해한 후에도 '지식과 실재'의 관계라고 부르는 것을 더 알아야만 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사실에 대한 설명의 충분성이 아니라 정당화를 실행함으로써 사실을 근거지을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문제는 인간 지식이 사실상 토대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 지식이 토대를 가지고 있다고 제안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진리와 도덕이 사회적 관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주의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상대주의를 자동적으로 지적 정당화와 실천적 정당화의 정합적 이론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은 바로 철학을 모든 탐구와 역사에 대한 영속적이고 중립적인 바탕을 형성하는 어떤 것에 호소함으로써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작업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식론적 행동주의는 바로 지식의 토대를 부정함으로써 이러한 철학관에 비판적이다. (인식론적 행동주의는 진리 대응설에 대하여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스트로슨과 하이데거의 주장에 동의한다.) 칸트의 두 가지 표상에 대해서 비판적인 셀라스와 콰인의 철학은 인간 지식에 대한 한 설명을 다른 설명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 지식에 대한 설명' 자체를 폐기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철학적 문제, 즉 규범, 규칙, 정당화를 사실, 일반화, 설명으로 환원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3. 언어 이전의 인지
셀라스는 그의 [경험론과 심리철학]에서 심리적 유명론(psychological nominalism)을 다음처럼 주장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인지는 언어적 사건이다. 직접적인 경험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인지도 언어사용을 습득하는 과정 속에서 선제되어 있다. 이러한 심리적 유명론은 날느낌(raw feel)의 직접성과 언어이전적 성격에 대해서 분명하게 해명해야만 한다. 이것을 위하여 셀라스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인지를 구분한다. 그것은 정당화의 이유의 논리적 공간에 있는 인지와 분별적인 행동으로서 인지이다. 분별적 행위로서 인지는 생쥐, 아메바, 컴퓨터 등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논리적 공간에서 작용하는 인지는 오직 언어사용자에게만 가능하다. 여기에서 인지는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지만, 그러나 분별적 행동으로서 인지는 단지 자극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셀라스에 의하면 이러한 인지는 지식에 대한 근거가 아니라 지식에 대한 인과적 조건이다. 이러한 셀라스의 주장은 개별자나 개념에 대한 지식은 명제에 대한 지식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언어습득이나 명제적 지식에 대한 비명제적 기초를 주장하는 경험론자들의 입장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비명제적인 정당화된 믿음은 없으며, 명제들 사이의 관계가 바로 정당화이다. "이것은 붉다"라는 주장을 빨감에 대한 직접적 숙지로서 그리고 빨감이라는 보편자의 예화로서 근거짓는 시도는 틀렸다고 할 수 있다.
어린아이들과 광전판은 모두 붉은 물체를 구분하지만, 그러나 광전판과 달리 언어를 배우기 이전에도 어린아이들은 붉은 색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모든 앎이 셀라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언어적 사건이라면, 언어를 배우기 이전의 어린아이가 어떻게 아픔에 대해서 알 수 있는가? 여기에서 셀라스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구분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knowing what X is like'와 'knowing what sort of thing an X is'이다. 후자는 X에 대한 주장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X의 개념을 다른 개념들과 연관맺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한 것처럼 개념을 갖는다는 것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다른 개념들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한 개념을 가질 수 없고, 어떤 사물을 주목함으로써 그 사물의 개념을 지닐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종류의 사물을 주목한다는 것은 그 종류의 사물에 대한 개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픔의 경우, 우리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아픔이 무엇과 같은 것인지 안다. 아픔이 무엇과 같은 지 안다는 것은 바로 아픔을 갖고 그것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아픔은 전(前)언어적으로 알려진다.
셀라스가 아픔에 대한 이러한 주장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아픔이 어떻게 느껴지는지와 아픔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아는 것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는 경우에만 그것은 소여의 신화를 지지해 주며, 심리적 유명론에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에 대한 불충분하고 불필요한 인과적 조건에 불과하다. 우리는 붉음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지 못한 채 붉은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불충분하고, 전자의 경험이 없어도 붉음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불필요하다. 우리가 감질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는 주장은 거짓이며,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은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기에 감질에 대한 인지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거짓이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언어공동체의 일원들이 서로 주장의 정당성과 행동을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셀라스의 심리적 유명론은 사실과 규칙의 차이에 대한 언급이며, 인식적 규칙이 지배하는 놀이가 행해지는 공동체에 들어갔을 때에만 그러한 규칙의 지배 하에 놓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인식론자로서 셀라스는 인식론이라는 전통적이며 비행동주의적 견해 때문에 내적 사건에 대한 설명과 어떤 주장을 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혼동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기초적 감각에 대한 비개념적, 비언어적 지식까지도 인식적 권위의 원천으로서 공동체의 잠재적 구성원이라는 점을 근거로 해서 특정한 존재에 귀속된다. 따라서 어린아이들이나 우리와 친근한 동물들은 자극에 단순히 반응하기 보다는 느낀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을 한 어떤 것과 우리를 결합시키는 공동체적 일치감을 근거로 해서 설명된다. 인간의 모습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얼굴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 얼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얼굴 전체를 적절하게 표현하면서 동시에 문장을 발화한다고 생각되는 입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인간의 육체는 인간 정신의 가장 적절한 그림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퍼트남은 로티가 강조하고 있는 인간 공동체와 관련해서 '로봇이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로봇을 언어공동체의 동료로 대우할 것인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금지도 상상적인 담화 가능성에 근거한 공동체적 일치감의 표현일 뿐이며, 느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금지를 환기시키는 측면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람과 사람과 유사한 것들의 내면은 외면에서 일어나는 것, 즉 우리 공동체에서의 그들의 위치를 통해서 설명되어야 하며 그 역은 안된다는 것이 바로 셀라스의 생각이다. 이러한 셀라스의 생각은 개체 보다 공동체를 강조하는 헤겔적 사유의 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셀라스는 직접적인 날느낌과 정당화된 지식을 구분하면서 날느낌의 언어 이전적 인지와 경험이 가지고 있는 특권적 표상의 지위를 적절하게 박탈하였다. 또한 셀라스는 인과적 설명과 정당화를 혼동을 피하면서 인식론적 행동주의가 어떻게 경험주의의
인식론을 회피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4. 관념이라는 관념 - 지향적 대상에 대한 콰인의 회의주의
로티가 주장하려는 논점에 대해서 로티 자신은 다음처럼 요약하고 있다. (1) 필연적 진리를 '의미에 의한 진리'로 설명하려는 시도에 대한 콰인의 비판이 '의미'에 대한 콰인의 비판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즉 분석성에 대한 콰인의 비판과 언어적 행동은 그렇게 할 수 없지만, 번역의 정확성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심적 관념으로서 의미라는 주장에 대한 콰인의 비판은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 (2) 필연적 진리를 의미로서 설명하려는 것은 사이비 설명이다. 전체론적 관점에서 어떤 특권적인 표상은 존재할 수 없다. (3) 그러나 특권적인 표상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콰인은 모든 종류의 표상에 대한 불신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존재하는 표상은 두뇌의 신경 세포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것이 아니다. 관념이론이 끼친 해악은 단지 마음의 눈을 통해 감각소여나 의미와 같은 대상에 직접적으로 친숙함으로써 어떤 인식론적 권위가 존재한다는 사이비 설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인식론적 해악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론적 해악은 아니다. (4) 인식론적 행동주의가 주는 교훈은 번역이나 지향성에 대해서 또는 다른 존재론적 주제에 대해서 어떤 철학적 논점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철학적 논점이 상실되는 그 곳이 바로 우리가 설명력을 발견하는 곳이며, 거기에서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 불필요함을 알 수 있게 된다.
소여의 신화에 대한 셀라스의 공박은 어린아이나 동물들의 언어 이전의 인지와 양립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관념이라는 관념에 대한 콰인의 비판은 소위 정신과학의 지적인 전통과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 즉 콰인이 주장하는 '번역 불확정성의 원리'나 '지시체 불가해성'은 발화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람에게 믿음을 부여하며 또 문화에 어떤 정신적 영감을 부여하는데 포함되는 문제 사실(matter of fact)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에 객관적 진리를 박탈하는 대신에 도덕성이나 문화의 근거를 명료하게 함으로써, 인식론적 행동주의에 반하는 귀결들을 몇몇 구분들을 통해 옹호할 수 있을 것이다.
콰인은 관념(idea) 이론에 대해서 공박한다. 관념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우리가 발화가 의미하는 것을 말하거나 발화자의 언어적 행동을 해석하기 전에 발견되어야만 하는 내적인 어떤 것의 표현이다. 이러한 관념이론을 포기한다는 것은 의미에 의한 진리, 즉 분석적 진리의 개념을 포기하는 것이고 개념적 진리의 개념을 포기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필연적 진리와 우연적 진리에 대한 칸트의 구분을 폐기할 수 있게 해준다. 콰인에 의하면 개념이나 의미는 지향성의 한 부분이고, 그는 모든 지향성을 폐기하려고 한다. 따라서 콰인은 개념이나 직관의 개념뿐만 아니라 믿음과 욕구 등의 개념도 제거하려고 한다.
콰인은 지향성에 대한 자신의 비판이 분석성에 대한 비판과 동일한 기반에 서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콰인은 개념과 의미가 우리 행동에 대한 설명으로 사용되는 경우 해가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특별한 진리나 지식 주장에 대한 특권적 원천으로 사용되는 경우 해롭다고 말했었어야 했다. 따라서 언어를 어떤 한 방식으로 번역하거나 믿음이나 욕구를 귀속시키는 이유는 내적 정합성에 의해 정당화되고, 사회적 유용성에 의해서 정당화된다고 말했어야 한다. 물론 콰인은 이런 종류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러나 언어적 또는 심리적 진리들은 '문제 사실'을 표현하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콰인이 이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그는 관례에 의한 진리와 감각적 경험에 의해 확증되는 진리에 대한 실증주의의 구분과 유사한 구분, 즉 편리성에 의한 진리와 대응성에 의한 진리를 구분해야만 한다. 의미, 믿음, 명제에 대한 진리는 마치 필연적 진리가 세계에 대한 진리가 아니라는 실증주의의 주장처럼 완전한 의미에서 진리가 아니다. 경험론의 두 독단들을 비판하는 콰인의 전체론과 실용주의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구분이 유지되기 어렵게 한다. 춈스키나 퍼트남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경험론의 전통적 잔재라고 비판하고 있다.
콰인은 존재론적 상대성의 논제를 다음처럼 요약하고 있다. "우리가 도달하게 된 상대주의의 논제는 다음과 같다. 어떤 이론을 다른 이론 속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재해석되는가를 말하는 것을 넘어서 그 이론의 대상이 어떤 것인지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도도 없다. 원초적으로 채택되고 궁극적으로 불가해한 존재론을 기반으로 하는 배경이론에 상대적으로 하위이론과 그 존재론에 대한 언급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런 상대성의 논제는 전체론의 자연스러운 귀결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서 '원초적으로 채택되고 궁극적으로 불가해한 존재론' 따위는 필요없다. 콰인은 자신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지시체 불가해성을 일종의 철학적 논점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아무런 적절성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분석성에 대한 콰인의 행동주의적 접근은 의미의 동일성에 대한 상식적인 입장을 제공해 주는 것처럼 존재론에 대한 콰인의 행동주의적 접근은 '지시체의 동일성'에 대해서 철학적으로는 별 큰 중요성이 없는 상식적인 입장을 제공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
콰인에게 있어서 지칭체의 개념은 의미 개념과 대조된다. 지칭과 외연은 확고한 것이지만, 의미나 내포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번역 불확정성의 논제는 외연과 내포의 구분에 모두 적용된다. 의미와 마찬가지로 외연이나 지칭도 행동적으로 불가해한 것들이다. 콰인은 내포에는 동일성의 규준이 없다는 주장에 의존해서 내포와 외연을 구분하고 있지만, 그러나 외연과 내포에 모두 적용되는 번역 불확정성의 논제에 의해서 우리가 내포 대신에 외연이나 지칭체에 주목할 근거가 마련되지 않는다.
콰인은 존재론과 관련해서 지칭체에 대한 철학적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지칭체에 대한 부여하는 철학적 중요성이 없다면, 존재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나아가 존재론과 지칭체에 대한 콰인의 관심이 그가 주장하는 전체론적 주장, 즉 제일 철학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어떻게 양립될 수 있는지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콰인은 이 경우 셀라스가 그러했듯이 과학의 우선성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비록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향적 표현들을 사용하고 이것을 현실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실재의 궁극적이고 참인 구조는 유기체의 물리적 구성과 행동만을 허용하는 엄격한 도식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도식을 제공하고 명료화하려는 계획은 과학과 연속적이다.
그러나 왜 물리적이며 지칭적이고 외연적인 것만이 선택되는가? 만약 특권적인 인식론적 위치에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것들이 전체적인 점진적 조정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을 구태여 구분하고 다른 하나에 우선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왜 문화 전체가 우리 경험적 탐구의 단위라고 생각하지 않고 단지 물리과학 전체만이 그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바로 여기에서 콰인의 사유 속에서 모순이 있다. 콰인은 "규약이 논리적 진리에다 사실적 진리와 구분되는 어떤 인식론적 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규약성이 번역의 불확정성에 의존해 있다면, 콰인의 앞선 주장에서 보듯이 물리이론은 실재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규약적 작업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만일 논리적 진리가 실용적인 규칙이라면 물리이론은 그러한 실용적 규칙일 수가 없고 실재의 본성에 대한 통찰이어야 한다.
콰인의 곤경은 셀라스와 마찬가지로 카르납이나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로부터 전승된 견해를 보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온다. 그것은 세계를 외연적 언어로 완전하게 기술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진정으로 말썽거리가 되는 것은 지향성(intentionality)가 아니라 내포성(intensionality)이다. 물리주의적 환원이 문제되는 것은 정신적인 것들에 대한 문장이 진리함수적이지 않기 때문이고, 지향성에 대한 동일성 규준이 문제되는 것은 지향성의 문장들이 비외연적이기 때문이다.
콰인의 어려움의 정체가 이런 것이라면 우리는 콰인이 제시했던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콰인의 목적을 실현시킬 수 있다. 즉 세계는 완전하게 진리함수적 언어로 기술될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세계의 조각들은 내포적 언어로서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완전하게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은 설명력이나 실천적 편리성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시간과 공간 영역이라는 관점에서 정의된다. 이러한 논점이, 즉 믿음과 욕구의 어휘를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데이빗슨에게서 발견된다.
데이빗슨(Donald Davidson)은 동질법칙적 일반화와 이질법칙적 일반화를 구분한다. 전자의 일반화는 완결된 법칙의 형식과 어휘로 표현되지만, 후자의 그것은 어떤 법칙이 작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다른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법칙을 진술할 수 있는 그러한 일반화이다. 데이빗슨에 의하면, 우리의 실제적 지식이나 과학은 이질법칙적이다. 데이빗슨에 의하면 심물법칙은 이질법칙적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믿음에 대해서 그리고 신체의 움직임과 신경세포에 대해서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함께 말할 수는 없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언급들이 동일한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어휘선택의 차이에 불과하다. 그것은 어떤 존재론적 차이나 사실적이고 신비적인 영역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외연적, 내포적 구분은 큰 철학적 중요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그것은 환원주의적 감정을 유도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환원주의를 지지해 주는 특별한 이유를 제시해 주지는 못한다.
5. 인식론적 행동주의와 다른 두 가지 대안
인식론적 전통은 지식 획득의 인과적 과정과 그 정당화에 대한 물음을 혼동했다. 소여의 신화에 대한 셀라스의 비판과 분석성에 대한 콰인의 비판은 바로 이러한 인식론적 전통에 대한 비판이다. 우리가 만약 이들의 비판을 인정하고,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된 인식론적 전통, 즉 의식에 나타나는 특권적인 대상에 대한 탐구로서 인식론을 제거할 수 있다면, 인식론이 해야만 하는 어떤 남아있는 일들이 있을 것인가?
데카르트가 하고자 했던 작업, 즉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과학관에 대한 뉴톤적 과학관의 우선성, 그리고 이러한 과학과 수학, 상식, 신학, 도덕성에 대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 내부를 탐구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내적 표상들의 관계에 주목하기 보다는 정당화의 사회적 문맥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나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하여 지지받을 수 있다.
이럼에도 여전히 인식론에 무게를 두는 두 가지 경향이 있다. 그 하나가 논리적 행동주의를 비판하면서 믿음이나 행동의 정당화 작업 없이도 내적 표상의 관점에서 우리 믿음과 행동을 설명하려는 경향이다. 지식에 대한 인과적 설명과 정당화에 대한 혼동이 없다면 지식에 대한 인과적 설명 자체를 반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적 심리학, 또는 인지과학적인 접근은 쉽게 전통 인식론의 연장으로 변형되어 왜곡되는 경향이 있다. 나는 다음 5장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과 춈스키의 긍정에 반대해서 경험적 심리학을 옹호함으로써 이 경험적 심리학을 전통적 인식론으로부터 떼어 놓을 것이다.
또다른 경향의 하나가 언어철학에서 발견된다. 어떻게 언어가 세계와 관계맺을 수 있는가를 규명하면서 어떻게 사유가 세계와 관련맺을 수 있는지를 해명하려고 했던 데카르트적 작업을 언어철학은 다시 불러온다. 지칭과 진리의 개념을 사용하면서 이러한 문제를 해명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언어는 자연에 대한 공적인 거울로서 간주되고, 데카르트와 칸트의 질문이 언어적으로 변형되어 다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는 6장에서 의미론을 인식론으로부터 떼어놓아 순수하게 만들 것이다.
심리학적 설명이 주장하는 내적 표상들이나 의미론에서 주장하는 언어와 세계의 관계는 정당화의 문제와 관계가 없다. 따라서 인식론의 목표로서 특권적인 표상에 대한 추구를 우리는 포기할 수 있다. 17세기 추구되었던 특권적인 표상을 위한 인식론적 노력은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식론적 작업이 여전히 추구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철학을 모든 가능한 탐구를 위한 영원한 중립적인 틀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거울로서 마음은 이러한 틀에 부합하려는 데카르트적 반응에 불과하다. 만약 특권적인 내적 표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지식을 위한 규준으로서 사용될 수 없다. 우리는 거울의 이미지를 포기함으로써 철학이 과학과 종교, 수학과 시, 이성과 감정을 판단하고 적절한 위치로 그것을 배정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포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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