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姜邯贊)의 옛 이름은 강은천(姜殷川)이고, 금주(衿州) 사람이다. 5대조 강여청(姜餘淸)이 신라에서 이주하여 시흥군(始興郡)에 살게 되었는데, 곧 〈이 곳이〉 금주이다. 부친 강궁진(姜弓珍)은 태조(太祖)를 섬겨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되었다. 강감찬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하고, 뛰어난 지략이 많았다. 성종(成宗) 때에 〈과거〉 갑과(甲科)에서 장원으로 뽑혔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현종(顯宗) 원년(1010)에 거란(契丹)의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서경(西京)을 공격하였는데, 아군이 패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여러 신하들이 항복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강감찬이 홀로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그 죄가 강조(康兆)에게 있으니 걱정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적은 수의 군사로써 대항하기가 어려우니[衆寡不敵], 마땅히 적의 기세를 피하였다가 서서히 부흥할 수 있는 방도를 도모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왕에게 남쪽으로 피난 갈 것을 권유하였다.
〈현종〉 2년(1011)에 〈강감찬은〉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었다가 다시 한림학사승지 좌산기상시(翰林學士承旨 左散騎常侍)로 옮겼고, 중추사(中樞使)로 승진하였다. 〈왕에게〉 요청하여 사직단(社稷壇)을 수리하고,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의주(儀注)를 의논하여 정하게 하였다.
이어 〈강감찬은〉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옮겼고, 강감찬(姜邯贊)에게는 12결의 땅이 개령현(開寧縣)에 있었는데, 왕에게 아뢰어 군호(軍戶)에게 공급하였다.
〈현종〉 9년(1018)에 〈강감찬은〉 서경유수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西京留守 內史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에 제수되었는데, 왕이 손수 고신(告身)을 쓰며 말하기를, “경술년(현종 원년, 1010)에 오랑캐의 전란이 있어서 적들이 한강(漢江) 변까지 깊숙이 침범해 왔다. 당시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야만인[左袵人]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큰 영예로 여겼다.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이 침입하니 병사가 100,000명이라 하였다. 당시 강감찬(姜邯贊)은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가 되었는데, 왕은 그를 상원수(上元帥)로 임명하였고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하였으며,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종검(朴從儉)과 병부낭중(兵部郞中) 유참(柳參)을 판관(判官)으로 삼아 군사 208,300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흥화진(興化鎭)에 이르러 기병 12,000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후에, 큰 동아줄을 소가죽에 꿰어서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고 그들을 기다렸다. 적들이 오자 막아 놓았던 물줄기를 터놓고 복병을 돌격시켜 크게 패배시켰다. 소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개경으로 진격하자, 강민첨은 자주(慈州)의 내구산(來口山)까지 쫓아가서 다시 크게 패배시켰다. 시랑(侍郞) 조원(趙元)은 또 마탄(馬灘)에서 공격하여 목 벤 것이 10,000여 급(級)이었다.
이듬해 정월, 강감찬은 거란군이 개경 가까이 오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으로 하여금 병사 10,000명을 거느려 급히 〈개경으로〉 들어가 수비하게 하고,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역시 군사 3,300명을 원군으로 보냈다. 이에 거란이 군사를 돌려서 연주(漣州)·위주(渭州)에 이르자, 강감찬 등이 기습하여 500여 급을 목 베었다. 2월에는 거란군이 귀주(龜州)를 통과하자 강감찬 등이 동쪽 교외에서 맞아 싸우니, 양쪽 군사들이 서로 대치하며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였다. 김종현이 군사를 인솔해 그곳에 이르니,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서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아군이 그 기세를 타고 용기백배하여 격렬히 공격하니, 거란 군사들이 북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아군이 그들을 추격하여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렀는데, 시체가 들을 덮었고 사로잡은 포로, 노획한 말과 낙타, 갑옷, 병장기를 다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으니, 거란의 패배가 이토록 심한 적은 없었다. 거란의 왕이 패전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사자를 소손녕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네가 적을 얕잡아보고 적국 깊이 들어가 이런 지경이 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려는가? 짐은 너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그런 후에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강감찬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개선하여 포로와 노획물을 바치니, 왕은 친히 영파역(迎波驛)까지 나와 영접하였다. 비단을 누각에 묶고 풍악을 준비하여 장군과 병사들을 위해 잔치를 열었고, 금으로 만든 꽃 8가지를 몸소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왕이 왼손으로 〈강감찬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술잔을 잡고서 위로와 감탄의 말을 그치지 않으니, 강감찬은 감당할 수 없다며 사의를 표하였다. 드디어 역의 이름을 흥의역(興義驛)으로 고쳤고, 역리(驛吏)들에게 관대를 하사하여 주리(州吏)·현리(縣吏)와 같게 하였다.
강감찬(姜邯贊)이 표문을 올려 나이를 이유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궤장(几杖)을 하사하며 사흘에 한 번만 조회에 나오도록 하였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檢校太尉 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天水縣開國男) 식읍(食邑) 300호를 더해주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현종〉 11년(1020)에 다시 표문을 올려 사직을 요청하자 허락하였고, 특진 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特進 檢校太傅 天水縣開國子) 식읍 500호를 더해주었다.
강감찬(姜邯贊)이 수도[京都]에 성곽이 없다 하여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요청하니, 왕은 그 건의를 따라 왕가도(王可道)에게 명령하여 축조하게 하였다.
〈현종〉 21년(1030)에 〈강감찬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다.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군개국후(開府儀同三司 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特進 檢校太師 侍中 天水郡開國侯) 식읍(食邑) 1,000호를 주었다.
얼마 후에 〈강감찬이〉 죽으니 84세였다.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인헌(仁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백관에 명령하여 장례에 참석하게 하고 조문[弔], 조사[誄], 부의[賻], 증직[贈] 등은 모두 시중(侍中) 유진(劉瑨)의 예에 따르게 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어떤 사신(使臣)이 밤중에 시흥군(始興郡)으로 들어오다가 큰 별이 인가(人家)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관리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사신이 기이하게 여기고는 데리고 개경으로 돌아와 길렀는데, 이 사람이 바로 강감찬(姜邯贊)이었다.”라고 한다. 재상으로 있을 때 송(宋)에서 온 사신이 그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절을 올리며 말하기를, “문곡성(文曲星)이 보이지 않은지 오래되었는데,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강감찬(姜邯贊)은 성품이 청렴하고 검약하여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다. 체구가 작은데다가 얼굴이 못생겼으며, 의복은 더럽고 낡아서 보통 사람보다 낫지 않았다. 그러나 엄숙한 얼굴로 조정에 서서 큰일에 임하여 정책을 결정지을 때는 위엄 있는 모습으로 나라의 기둥이자 주춧돌이 되었다. 당시 풍년이 들고 백성이 안정되어 나라 안팎이 평안하니, 사람들은 그 모두가 강감찬의 공이라고 생각하였다. 치사(致仕)하고 성남(城南) 별장[別墅]으로 돌아가서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을 저술하였다.
〈강감찬은〉 후에 현종(顯宗)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문종(文宗)은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 兼中書令)을 추증하였으며, 아들은 강행경(姜行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