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보산 앞에 자리잡은 회암사
회암사지에서 천보산을 바라보며 조금 오르다보면 새로 세운 회암사가 있는데
대웅전의 위치가 천보산의 기를 받는 좋은 위치로 보인다. 오른쪽 능선 위에
회암사지 유물들이 능선을 타고 묘자리 마냥 일렬로 죽 늘어서 있다.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맨 위쪽에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그 아래 중간에 회암사를 창건한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맨 아래에 무학대사 부도 및 쌍사자석등,
무학대사비가 자리잡고 있다. 이중에서 무학대사 부도와 석등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회암사무학대사홍융탑(보물388호)과 석등(보물389호)
회암사지부도(최근에 이름이 바뀌었다. 회암사무학대사홍융탑 보물388호)는
여느 부도와는 다르게 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몸돌에는 용과 구름이 조각되어
있고 특히나 지붕돌은 8각으로 경사가 급하며 사자머리를 조각한 솜씨는 아주
색다른 느낌을 준다. 조선 전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이 부도는 규모가 웅대하고
모양도 가지런하다. 무학대사 묘비의 기록으로 미루어 1407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회암사무학대사홍융탑(보물388호)과 석등(보물389호)
무학대사부도 바로 앞에는 보물 389호인 회암사지쌍사자석등(이것도 최근에
이름이 바뀌었다. 회암사무학대사홍융탑 앞 쌍사자석등으로...)이 있다.
사자 2마리가 힘겹게 석등을 주둥이로 받치고 있는데 이 사자는 암,수 한쌍
이라고 한다. 앞에서 봤을 때 오른쪽 사자는 넓적 다리도 통통하고 갈기도
힘이 있어 숫사자로 보인다. 동양의 전통사상에서는 항상 앞에서 봤을 때
오른쪽이 남성이 된다. 이를 좌상우하(左上右下)라고 표현한다.
물론 돌아가신 영혼은 반대가 되지만....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
무학대사부도 위쪽으로 나옹선사의 부도와 지공선사의 부도가 있다. 이 능선은
천보산의 강한 기를 받은 명당의 터로 생각되는데 19세기초에 이 아무개란
사람이 자기 조상의 묘자리(여주의 영릉자리)를 빼앗겨 자손들이 발복하지
못한다고 이 자리에 있는 무학대사탑을 비롯 다른 부도를 모조리 부셔버리고
자기 조상의 묘를 쓰려고 했다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학대사의 부도와 석등은 차마 부시지 못하고 온전하게
남겨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른 부도와 석등, 무학대사탑비는 19세기
순조 때 조성한 것들이다.
선각왕사비(보물387호 모조비)
무학대사부도가 있는 능선 우측 즉 백호자락에는 선각왕사비가 있습니다.
보물 387호인 회암사지 선각왕사비(檜巖寺址禪覺王師碑)는 고려말의 승려인
나옹(懶翁)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나옹(1320∼1376)은 1344년에 회암사로 들어가 불교에 입문하였는데 1358년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구월산과 금강산 등에서 은거하다가
회암사로 다시 돌아와 절을 크게 새로 지었고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만을 행하였으며 입적한 후 시호를 ‘선각’이라 하고 그 이듬해에 비를
세웠다. 1997년 비각에 화재가 발생하여 비가 훼손되어 현재는 경기도박물관에
보존하고 현장에는 원형 그대로 모조비를 세워 놓았다.
선각왕사비에서 바라본 천보산
비가 있는 위치는 천보산 아래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는 곳인데 이런 곳에는
지기를 보호하기 위해 이런 비나 탑을 세우곤 하는데 이를 비보탑(비)라고 한다.
현장에는 원래 귀부가 놓여 있는데 훼손이 심해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선각왕사비 비문의 글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권중화가 쓴 것으로
비의 글씨는 예서체로서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이후 고려말에
와서 처음인데 예서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회암사지를 나와 바라본 천보산
답사를 시작할 때는 햇볕이 따가울 정도였는데 날씨가 흐려져 곧 비가 올 것
같은 모습으로 변해있다. 해도 어느덧 서쪽으로 기울어 있어 다음 답사를 위해
서둘러야 했다. 일행중에 한분이 차를 가지고 오셨는데 차에 수박이 있다고 해서
반가운 마음에 염치 불구하고 손을 내밀었다. 회암사지에서 답사 끝내고 먹은
수박이 어찌나 맛있던지 그 맛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양주향교... 앞의 느티나무가 연륜을 말해준다...
양주역까지 버스를 타고 나와 한참을 기다린 후 다른 버스로 갈아타고 양주
관아지로 향했다. 양주향교를 먼저 둘러보았는데 최근에 복원을 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곳에 있는 나무들은 수백년을 버틴 나무들인 것으로 봐 이곳 향교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듯 하다. 양주목 관하에 향교는 이곳 한곳 뿐이라하니 당시의
명문학교였던 셈이다. 항상 문을 잠궈 놓는다는 얘기를 들어 아예 들어갈 생각도
안했는데 일행중에 행동으로 실천하시는 분이 있어 문을 밀어보고는 열린다고
큰소리로 다들 불러 모은다. 그래도 한덩치하는 나는 발길을 돌릴 수가 없다.
귀찮아서.....ㅎㅎ
양주관아지에 복원한 동헌
양주관아지를 들어서는데 마침 해설사님이 퇴근을 하려다 우리를 보시고
고맙게도 해설을 지원해 주신다. 답사는 역시 해설을 들으며 하는게 제맛이다.
아는 만큼만 보일 뿐이라서...
양주관아는 양주목으로 승격된 세조 때는 현재의 양주역 부근에 있었는데
그 유명한 연산군 때 양주목이 임금의 사냥터로 되면서 금표 밖으로 쫒겨나게
되어 없어졌다가 다시 중종 때 현 위치로 관아를 옮겨 일제시대까지 이어졌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버렸다.
양주관아지에 전시된 송덕비
양주관아지에는 동헌이 복원이 되어 있고 인근에 산재되어 있던 송덕비를
한곳을 모아 전시해 놓았다. 비가 모두 18기인데 17기는 송덕비이고 나머지
1기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유허비이다. 관아지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관아지는 불곡산을 주산으로 청룡에는 용암산, 백호에는 칠봉, 개명산
(해발621m), 앞쪽 조산에는 도봉산이 멀리 있어 풍수적으로 길한 터에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과거 20여년전에 이곳에 근무를 했을 때 불곡산(佛谷山)에
수시로 산불이 나 산불 끄러 출동했던 기억이 많이 난다. 이름에서 불이라는
글이 있어 그러는지......
어사대 비각
동헌 뒤편에는 어사대비가 있다. 이 비는 1792년(정조 16) 9월 정조대왕이
광릉(光陵)에 들른 뒤 환궁하던 길에 양주관아에 유숙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백성을 위해 향연을 베풀고 신하와 더불어 사대(射臺)에서 활을 쏜 후 잔치를
베푼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요즘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이
현장지도를 했다고 비를 세우는 것과 같은 이치로 당시에 임금에게 아부했던
기념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유양폭포...
양주관아지에서 빼놓지 말고 답사해야 할 곳이 있다. 관아지 뒷편으로 계곡이
펼쳐져 있는데 그곳 경치가 장난이 아니다. 늦은 시각이라 약간 어둑했는데도
상당히 멋진 풍광을 보여줬다. 그곳에는 금화정이라는 정자가 복원되어 있고
계곡 끝에는 유양폭포가 있는데 지금은 수량이 부족해서 폭포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하지만 수량이 풍부할 때는 아주 멋진 모습을 보여주리라 기대가
된다. 폭포 앞에 있는 돌 여기저기에 각자로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며 마음을 가다듬던 사대부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금화정...
양주관아지에는 특이한 건축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양주별산대놀이마당이다.
산대란 일종의 무대로 가면을 쓰고 벌이는 놀이를 산대놀이라 한다. 이 산대
놀이는 본산대놀이가 있고 약간 별종이라 할 수 있는 별산대놀이가 있는데
양주별산대놀이는 한양의 본산대놀이의 이종이라 할 수 있다. 본산대놀이는
전해지지 않고 양주별산대놀이만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전해져
오고 있다.
양주별산대놀이마당
그런데 놀이마당이 양주관아지에 위치한 것은 조금 어색하다. 어찌보면
양반의 본고장이랄 수 있는 이곳 관아지에 양반을 비아냥거리며 기득권층에
비난을 퍼붓는 별산대놀이마당을 세운 것은 조금 어색하고 또한 큰 길에서
한참을 올라와야 만날 수 있는 이곳에 얼마나 많은 분들이 관람을 할지 그것도
의문이 든다. 이왕지사 만든 것이니 운영을 잘해서 우리의 전통문화가
계속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양주전통문화관...
해설사님께서 특별히 늦은 시각인데도 양주전통문화관을 보여주셨다. 그곳에는
양주의 문화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잘 준비되어 있으니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은 꼭 한번 들르시길...
양주관아지 우측에는 양주대모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점령한 전략적 요충지로 개성 쪽에서 서울로 오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으로 한강의 요충지인 광진, 북쪽으로 임진강가의 요충지인
적성(積城)과 매우 가깝다. 이곳을 지척에 두고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바람에 답사를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다음 기회에 꼭 방문해야 할 곳이다.
돌아오면서 양주막걸리가 좋다는 해설사님의 말을 믿고 인근의 식당에서
곡차를 즐기면서 마무리를 했는데 항상 느끼는거지만 마무리 곡차가 없다면
뭔가 일을 치르고 뭐 한가지 빠뜨린 것처럼 개운하지 않으니 이건 나만의
중독증세인지 원......
<끝>
모차르트 / 바이올린 소나타 B 플랫 장조 K 454 Jascha Heifetz
2악장 Andan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