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사 서약했는데도 요양병원선 연명치료”
[’웰다잉' 준비하는 사람들] [下]
최은경 기자
입력 2021.02.02
“작년에 위암 3기 진단이 나와 수술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항암 치료를 받아요. 다들 위암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같은 병실에 입원해있던 환자 2명이 암이 전이(轉移)돼 떠났습니다. 죽음이 남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요. 마지막 순간 자녀들이 죄짓는 기분 들지 말라고 존엄사를 결심했지요.”
지난 27일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를 찾은 A(여·67)씨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사전의향서)를 작성하면서, 목소리는 떨렸지만 본인이 바라는 임종 모습을 분명하게 밝혔다.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면 항암제 투입 등 무의미한 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A씨의 결심엔 3년 전 모친을 떠나보낸 경험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누워만 있을 뿐인 모친을 위해 A씨가 연명 치료 중단 의사를 밝혔지만, 오히려 병원 측으로부터 ‘다른 가족들의 뜻은 뭐냐’는 식으로 추궁을 당했다고 한다.
◇무의미한 연명 의료 반대, 의료 현장에선 ‘절대다수’
국립암센터에서 작년 한 해 사전의향서 상담을 받은 암 환자는 500명이 넘는다. 국립암센터 진유정 사회복지사는 “A씨처럼 투병 생활을 하며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부모님이나 같은 암 환자 등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전의향서를 쓰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는 신종 코로나 사태로 고령층의 외출이 크게 제한됐지만 25만7526명이 사전의향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의료 현장에선 “많은 노인들이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결정하는 데 반해 제도적으로 미비한 점이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표적인 게 요양병원 문제다. 현행법상 존엄사를 택한 사람들이 쓴 사전의향서는 ‘의료기관윤리위원회’가 설치된 병원에서만 조회할 수 있다. 그런데 전국 요양병원 1585곳 가운데 68곳(4.3%)에만 이 위원회가 설치돼 있다. 대부분 요양병원에서 임종을 맞는 환자들은 존엄사를 원해도 본인 뜻과 달리 연명 의료 시술을 받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국립암센터 김열 공공보건의료사업실장은 “권역별로 묶은 공용 의료기관윤리위원회가 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치매 환자-적극적 존엄사 논의도 시작해야”
존엄사 논의 범위를 지금의 ‘회생 가능성이 없는 말기 환자의 연명 치료 여부’에서 점차 확장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영호 서울의대 교수는 “10년 뒤 베이비부머가 70대 중반으로 접어들면 다양한 ‘죽음’과 관련한 사회적 요구가 거세질 것”이라며 “본인이 원하는 죽음의 형태를 어디까지,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지 지금부터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아시아 문화권인 대만과 일본을 참고할 만하다고 말한다. 대만은 2000년 아시아 국가 최초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말기 환자가 연명 치료를 거부할 수 있도록 존엄사법을 만들었다. 작년엔 가족들이 동의하고, 의료진도 회복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한 경우에 한해 ‘지속적 식물상태' ‘회복 불가능한 혼수상태' ‘심각한 치매나 불치병 환자'에게도 존엄사를 허용하도록 했다.
‘노인 대국’으로 불리는 일본의 경우 ‘존엄사법’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2006년부터 종말기 의료 결정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연명 치료 중단을 허용하고 있다. 특히 집에서 통증을 관리하며 임종을 맞도록 하는 ‘가정형 호스피스’의 보급률이 높다. 허대석 서울대 의대 교수는 “우리나라는 조사해보면 노인 절반 이상이 ‘거동이 불편해지더라도 여생을 현재 집에서 보내고 싶다’고 하는데도 77%는 의료기관에서 사망한다”며 “임종 순간에 대한 본인 의사가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네덜란드·벨기에 등 일부 국가는 적극적 존엄사에 해당하는 안락사도 20년 전부터 허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