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孝子]
조선 시대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효성으로 어버이를 잘 섬긴 자녀.
개설
효자는 부모를 효성으로 극진하게 섬기는 자식을 일컫는다. 효(孝)는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정성껏 모시는 것뿐만 아니라 사망한 뒤에도 극진히 제사를 모시는 것 등을 포함한다. 조선 사회에서는 가정에서의 효도를 국왕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지배 이념으로 보아서 적극 장려했다. 반대로 불효하거나 역적이 나올 경우에는 유교의 강상(綱常)을 범한 죄로 간주되어 그 집안이나 마을 또는 고을 전체가 처벌받고, 고을의 지위까지 격하되어 소속된 주민들은 막대한 부역 등을 부담하여야 했다. 서산 지역에는 아래와 같은 효자들이 기록과 정려를 통하여 전해지고 있다.
기록 효자
『호산록(湖山錄)』 고금인물조를 보면, 노비인 계복(戒福)을 비롯하여 유흡(柳洽), 안천년(安千年), 이수(李秀), 이유성(李惟誠), 이이수(李壽), 조존세(趙存世)[1562~?], 최달제(崔達悌)[1669~1731], 한희(韓熹), 황필대(黃必大) 등을 효자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여지도서(輿地圖書)』 인물조에는 효자로서 유희원(柳希瑗)과 한우승(韓遇升)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정려 효자 1910년 이전에 건립되어 서산시에 현존하는 정려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국현남 정려는 1695년(숙종 21) 서산시 부석면 지산리 서당골에 건립되었다. 기응세 정려는 1584년(선조 17) 명정되어 경기도에 건립되었다가 1819년(순조 19) 서산시 팔봉면 덕송리에 중건되었다. 김가근 정려는 1774년 명정되어 1964년 서산시 운산면 갈산리 여미리마을에 정려를 건립했다. 김학방 정려는 1889년(고종 26) 명정되어 서산시 대산읍 대도로리에 건립되었다. 안만흥 정려는 1584년(선조 17) 명정되어 서산시 팔봉면 덕송리 대봉마을에 건립되었다. 임영주 정려는 1892년 명정되어 2009년이 되어서야 서산시 지곡면 화천3리에 건립되었다.
최효민(崔孝敏)은 1737년(영조 13) 명정되었고, 그의 아들 최만징(崔萬澄)은 1831년(순조 31) 명정되었다. 최효민·최만징 정려가 현재 서산시 음암면 도당리에 있으나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최몽량(崔夢[1579~1627]과 그의 10세손 최호주(崔鎬周)[1844~1893]의 정려는 현재 서산시 지곡면 산성리에 있다. 최몽량의 정려는 1757년(영조 33) 건립되었으며, 최호주의 정려는 1902년에 명정되었고, 최호주의 아우 최호문(崔鎬文)의 처 나주 정씨(羅州 丁氏)의 열행으로 1920년에 정표(旌表)를 세워 삼강정려(三綱旌閭)가 되었다.
참고문헌
『호산록(湖山錄)』
『여지도서(輿地圖書)』
『서산시지』(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6-1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