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이의 워킹맘이라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아이를 키웠다. 잦은 야근과 출장, 가끔 주말 출근도 해야 했기에 막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친정엄마, 이후엔 시누이와 함께 살았다. 삼시세끼 온전히 내 손으로 차린 날이 그리 많진 않았으니 몸이 편했던 건 사실이고, 근무 중에 아이가 아파 발을 동동 구르던 동료를 볼 때면 난 참 복이 많다고 생각한 적도 많다. 그러나 살림살이도, 육아관도 온전히 나와 같지 않은 이와 아이를 함께 키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로 조심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내 아이를 내가 바라는 대로 키울 수 없다는 생각에 답답했다. 당장 일을 계속하고 싶던 나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직장인으로서의 고단함과 눈치 보는 육아, 머릿속은 늘 할 일들로 복잡했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종종 작은 것 하나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날 더 힘들게 했다. 복잡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조용한 절에 들어가고 싶단 말을 입버릇처럼 했던 나는, 절대신 아무 연고 없는 제주로 혼자가 아닌 아이들과 함께 왔다. 일은 쉴 수 있을지언정 육아는 쉴 수 없었기에. 내가 감당해야 할 여러 역할 중 엄마 역할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한껏 들떴지만, 독박 육아는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만의 시간은 일할 때보다 더 없었다. 초1 귀가 시간은 돌아서면 바로, 어쩌다 겨우 짬이 났을 때는 집안일과 서툰 요리 준비로 또 분주했다. 휴식은 무슨, 더 골병이 들게 생겼다. 할머니나 고모가 아닌 엄마니까, 애들 아빠가 없어도 나 혼자도 아이를 더 잘 볼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더 열심히 했다. 그런데 온종일 함께하는 아이는 평일 퇴근 후 잠깐, 주말에 놀러 다니며 본 아이와 너무 달랐다. 아이들과 종종 부딪쳤고, 감정이 격한 날에는 급기야 아이들에게 “엄마는 너네 키우는 게 너무 힘들다고, 얼른 다들 커버리라고, 스무 살 되면 무조건 다 독립하라고, 엄마는 제발 혼자 살고 싶다.”라고 소리친 날도 더러 있었다. 이제껏 늘 아이들과 함께해왔다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처음 같이 지내는 것처럼 힘들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아이를 키우고 싶다더니 고작 이거냐며 스스로 반문하곤 했다.
어느 날, 뭐라 잔소리한 내게 첫째가 말한다. “할머니, 고모, 아빠 다 너무 원하는 게 다르고 혼내는 포인트도 다른 거 알아? 그거 맞추느라 우리도 진짜 힘들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동안 제일 힘든 건 나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니었겠다 싶었다. 아직 어렸던 너희들은 엄마에게 응석 부리고 의지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늘 바쁘고 지쳐있어 그러지 못했겠구나. 서로 다른 양육자의 태도에 혼란스럽기도 하고, 맞추느라 힘들었겠구나. 이제야 찾아온 엄마와의 행복한 시간도 결국 이런 그림이라니, 너무 미안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내가 달라져야겠다는 생각했다. 이제야 우리는 진정으로 같이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
코로나는 한동안 계속됐고,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더니 아이들은 돌아가며 친구나 공부, 놀이 문제를 토로했다. 그 일이 있을 때마다, 도와주기도, 달래기도 했지만, 급한 마음에 낮버밤반 (낮에 버럭, 밤에 반성)을 반복하기도 했다. 어느새 1년 반의 시간이 지났다. 서로 적응이 된 건지, 비록 밤에만 한 반성도 조금 효과가 있었는지, 이제 조금 살만해졌다.
‘먼 곳 없이 어찌 넓을 수 있으며 기다림 없이 풀 한 포긴들 제 형상을 키울 수 있으랴. (p.406)’ ‘곡식은 비료나 지력으로 자라는 게 아니라 일꾼 발자국소리 듣고 자란다. (p.374)’
故 신영복 선생의 옥중 서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내용이다. 젊은 학자가 하루아침 무기징역수가 되어 20년 20일이라는 긴 세월 옥고를 치르는 동안 가족과 주고받은 서신 모음집이다. 언뜻 이 책이 일반인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되겠지만, 절망의 시간 속에서도 한탄하고 좌절하기보다는 자성의 자세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태도는 가히 본보기가 되고도 남는다.
선생의 투옥 기간 스무 해, 한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 성인이 되기까지의 긴 시간이다. 선생의 고초를 생각하면 내가 가진 자유와 행복이 얼마나 큰지, 아무 제약 없이 아이와 살을 비비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가지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기보다 내가 가진 것,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많은 일에 감사하자. 아이와 마주하는 크고 작은 일을 내가 쳐내야만 하는 숙제가 아닌, 나와 아이들의 삶이자, 추억이자, 우리를 자라게 해 줄 자양분으로 여기자.’
이렇게 부족한 엄마의 자성은 오늘 밤에도 반복된다. 기다림 끝에 풀이 자라고 일꾼 발자국소리에 곡식이 자라듯, 부디 이 자성의 목소리가 우리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뼘씩만 더 자라게 해주기를. 그러다 보면, 오지 않을 것만 아이들의 스무 살도, 어느새 내일이 되어있겠지. 자주 행복하지만 때때로 지치는 오늘이 새삼 그리워지는 날도 오겠지.
수정이 거듭되다보니 선생님들의 합평이 무색하게 글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첫댓글 신영복 선생님 책은 읽고 나서 더 많이 생각나고 오래 가는 느낌이에요.
유미 쌤 퇴고한 글 보며, 글 속에 등장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한 문장을 보며 유미 쌤이 느낀 "언뜻 이 책이 일반이에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태도는 가히 본보기가 되고도 남는다." 공감합니다.
유미 쌤이 아이들과 하루종일을 보내며 느끼는 일상의 수고, 부대낌, 그럼에도 소소한 즐거움, 감사가 잔잔하게 전해지는 글이네요👍
무엇보다 퇴고를 실천한 쌤~ 멋짐요👍👍
혜화샘..저의 복잡다난한 심정을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신영복 선생님 글이 워낙 좋기도 했지만, 한달이나 지나 퇴고하자니 글을 다시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네요. 책 오래 느끼기로는 퇴고 미루기가 최고인 걸까요.. 😅
맞벌이 엄마와 아이들의 고충이 여실히 드러나는 글이네요. 주변의 도움을 받는 동안에도 고민되는 포인트는 직장맘이라면 느낄 법하고요. 첫째 아이의 얘기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아이들의 마음도 들여다 볼 부분 같아요.
복작복작대서 힘들다가도 사소한 행동에 감동받는 게 가족이죠. 오늘의 크고 작은 일에서 의미를 찾고 추억으로 만들려는 깨달음을 얻은 밤이었겠어요^^
다시 육지로 오기 전까지 함께 충분히 웃고 울고 행복하시기를~~
그쵸..첫째 아이는 본의 아니게 여러가지로 부모와 시행착오를 함께 겪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미안하고 또 고맙고요..^^;;
다시 육지로 간다고 마음 먹고 주변에 다 얘기해 놓고도, 요즘 슬 다시 걱정이 되네요.
잘해낼 수 있을런지...ㅠㅠ
영경샘 응원 감사합니다~ :)
우와.... 퇴고본 블로그에 올리려고 이제야 꼼꼼히 읽었는데, 완전히 새롭게 쓰셨네요! 정~~~말 잘 쓰셨어요. 일을 쉬고 육아에 몰입하는 과정이나 이후의 힘든 마음, 책과 함께 연결되는 반성 등 흐름이 자연스럽고요. 마지막에 뭉클. ( i.i)
첫째가 아주 똑부러집니다. 저런 고충을 호소하다니.저도 읽으면서 흠칫 놀랐어요.
유미쌤 좋은 글 감사해요. 쌤의 솔직한 고백과 삶에서 나온 성찰과 진지한 태도(요즘엔 무시받고 있지만 저는 너무 귀한 거라 생각해요)에 맘이 일렁입니다. 충분히 좋은 엄마예요 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