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절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18절에는 소망을 붙잡으려 나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19절에는 이 소망이
휘장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휘장 안은 바로 지성소입니다.
땅의 성소가 아니라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의 닻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묶여 그리로 던져졌습니다. 다만 우리의 육체는 풍랑이 이는
이 세상 바다에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닻은 이미 하늘 지성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흔들리는 것은 육체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뱀에게 저주를 했습니다.
뱀아 ‘너는 종신토록 흙만 먹어라’(창3:14) 그래서 사탄은 발뒤꿈치를 물어뜯습니다.
우리 육체밖에 못 씹습니다. 왜냐하면 뱀의 먹이는 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체대로
살면 마귀의 밥이 되는 겁니다. 육체를 마귀의 총사령부로 사용하는 겁니다.
흙인 육체는 하나님이 공개적으로 뱀에게 주신 밥입니다. 그래서 ‘혈과 육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하시는 겁니다. 반드시 물과 성령으로 나야만 하는 겁니다.
재미있는 말로 육으로 난 것은 6.25입니다. 거기에는 항상 사탄과 전쟁 중입니다.
영으로 난 것은 0입니다. 거기는 무풍지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혈과 육을 피해야 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요6:63) ‘만일 그리스도 영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는 육체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롬8:9) 그래서 우리는 육체에 빚을 진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에 대한 부담이 없다는 겁니다. 육체대로 살아야 될 어떤 부담도
느끼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육체에서 해방되려면 육체에 대해서 부담이 없어야 됩니다.
죄에 부담도 없고 육체에 대하여 빚을 갚아야 될 부담도 없고 육체를 보호해야 할
부담도 없어야 합니다. 오직 나는 성령을 좇아 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럼 육체는
자동으로 따라옵니다. 우리의 영혼이 닻이 하늘 지성소에 꽂혀있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가는데 몸이 따라가는 건 당연한데 입으로 공포만 쏘는 것이 문제입니다. ‘
어떤 이가 성경공부시간에 마음은 교회에 있다고 말을 합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한 겁니다. 결국 영의 힘이 약한 겁니다.
육신의 빚을 지고 있는 겁니다. 육신이 피로하기 때문에 쉬어줘야 한다는 겁니다.
이미 이 사람은 육신에게 빚을 지고 있어서 육신에게 상을 줘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욕심대로 살았기 때문에 육신을 내가 혹사 시켰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육신에 대한
부담을 갖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육신이 원하는 대로 해 줘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곤해서 교회에 못 간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아 사는 비결은
롬8:12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육신에게 빚 진 자가 아니로되 육신에게 빚을 져서
육신대로 살다가 사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 받고 살아난 것은 오직
영에 빚을 지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영으로 사는 부담만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으로 살아라 그러면 너희가 살리라 하십니다.
롬8: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있으면 우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습니다. 이미 과거가 된 믿음입니다.
10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믿음의 현재입니다. 또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현재이며
미래입니다. 이 세 요소 중에 우리가 육신에게 빚을 지고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12-13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간혹 가다 왜 영적인 감옥에 갇히느냐면 육신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왜 무의미하고 답답해지느냐 육신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육신의 빚이
너무 많은 겁니다. 육신을 기쁘게 해 주고 편하게 해 주느라고 바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을 좇아 사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바빠서 못하고
피곤해서 못하고... 등등의 말입니다. 14절“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절“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히6:20절로 돌아옵니다.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그리로 앞서 가셨다’ 주께서 하늘 지성소로 가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그 안에 몽땅 담아 끌고 가셨습니다. 우리를 그의 몸 안에 넣고
그리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체 가운데 있지만 우리의 영혼의 닻이
이미 거기에 들어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들어가 계십니다. 휘장 안,
지성소, 곧 손으로 짓지 않은 하늘 지성소 우리를 위하여 여신 길이며 만드신 처소,
그리고 그 분과 하나가 되는 영생인 겁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스라엘의 여정과 같이
애굽에서 광야 그리고 가나안 이 세단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너머로 건너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육신을 쳐서 복종시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영원한 나라는 지금 현재 우리가 영으로 누릴 수가 있고,
우리 육신의 장막이 벗는 날에는 손으로 짓지 않은 하나님의 장막이 우리에게
덧입힐 것입니다. 그 때는 사망이 생명의 삼킴이 됩니다.
이 원리는 번데기가 나방이 될 때 새로운 생명이 그 속에 터져 나옵니다.
새 생명에 의해 번데기 껍질 곧 이 사망의 껍질이 뚝 떨어져 나가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형태로서 나방이 되는 겁니다. 우리 속에는 이와 같이 생명의
요소와 죽음의 요소가 함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면 영은 의롭게
되었으나 몸은 죽은 것이기에 죽음의 요소가 있습니다. ‘영으로는 산 것이니라’
영의 산 것, 곧 그 생명이 우리 육신이 땅으로 돌아갈 때는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이
새로운 형상으로 완성 되면서 육신의 껍질은 허물을 벗듯 뚝 떨어져 나갑니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몸을 입습니다. 모두가 이 절차를 다 보면 좋겠지만
번데기가 한 번도 나방이 되는 걸 보지 못합니다. 번데기는 늘 죽는 줄만 압니다.
그런데 그 번데기가 나방이 되어 훨훨 날아다닙니다. 번데기는 나방의 역사를
기록할 수 없습니다. 죽어야 나방이 되니까요.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생명 곧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있으면 너희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시리라’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절대 죽지 않았습니다. 몸은 죽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은 그대로 입니다. 그 안에 자가발전기가 돌고 있어요. 우리도 그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있으면 너희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시리라 현재도 그리스도로 인해 살고 장차 전혀 다른 형체,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고 영광스러운 형체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이 하십니다.
이게 바로 고후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더럽고 지저분한
세상이 폭삭 무너지고 나서 천당에 가면 아름답고 큰 맨션에서 살겠지’하고요.
장막이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장막은 우리 육체입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장막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나님의 장막이 덧입혀지는데 그 때는 사망이 생명의 삼킴
바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전15장54절 이후에 보면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건 우리 육신으로 고함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영이 고함치는 겁니다.
언젠가는 사망의 요소인 네가 끝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내 속에 있는 생명의 영이 너를 삼켜버릴 것이라는 믿음에 의한 소망의 확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은 견고하고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일에 더욱 힘쓰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에 힘쓰라는 말은 빗자루 들고 청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집을
지어 나가라는 것입니다. 교회 헌금하고 청소하는 일은 믿음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그 정도는 상식입니다. 이런 일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주의 일이 아닙니다. 요6장에
보면 주님께 무엇을 해야 주의 일을 하오리까 하고 물으니 주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주의 일이니라 그럼 우리가 지금 안 믿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믿는 것이 전부 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믿음으로 오래 참아 기다릴지니라.
이 말씀을 이루어 가는 과정 속에서 교회의 공동체에서 헌금도 하고 선교도 하고,
봉사 전도 구제도 있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이룬다든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교회 짓고 주일학교 교사하고
성가대하고 이런 것만 하나님의 일인 줄로 압니다. 예컨대 찬양도 노래 잘 하는 것이
찬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수들이 믿음도 없이 찬양을 하는 건 찬양에 대한 모독입니다.
전에 J라는 가수가 ‘예수 나를 위하여’ 하는 찬양을 구성지게 불렀는데
사실 그 가수는 그 찬양에 상응하는 믿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히6장처럼 우리의 심령의 땅이 비를 받아서
밭을 가는 자들에게 채소가 되어 주님 앞에 제물로 올라가면 이것이 바로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가 됩니다. 우리 속에서 주님에 대한 감사가 입술로 나오면 바로
찬미의 제사가 됩니다(히13:15)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하고 그 일을 이루어야 함은 우리의 영혼의 닻이 이미 하늘에 던져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를 따라 그리도 따라가는 방법이 중요한 겁니다. 성령으로 육체를 복종시켜
주께로 가는 겁니다. 내가 주께 붙잡힌 것을 붙잡으려고 달려가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순종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육체의 빚을 너무나 많이 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육체를 따라 가면
우리가 어디에 다다르겠습니까? 바로 사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를 보면 너희는 바알을 섬기고 아세라신을 섬겨라 나와 나의
집은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다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도 이런 결심이 서야 됩니다.
‘나는 지금부터 육체의 빚을 진 자가 아니다. 나는 육체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해 주지
않겠다’ 딱 잘라야 합니다. ‘나는 오직 영에 빚진 자이기 때문에 영을 따라 살겠다’
결단 하십시오 그럼 성령께서 우리에게 항상 승리를 안겨줄 것입니다. 왜 낙심이 되고
속이 상하고 시기 질투 분노가 일어납니까? 이는 내 육체를 보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에겐 사랑 희락 화평 자비 양선 이런 열매들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히5장에서 시작되는 신앙의 초보와 완전한 자에 대해 말씀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5장 11절에서 7장 1절로 바로 연결됩니다. 그 사이의 말씀은 삽입구입니다.
5장 11절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이렇게 전제를 하고 신앙의 초보가 뭔지, 완전하데 나아가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완전함의 결과가 뭔지, 그 완전한데 이르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그리고 하나님의 맹세로 하는 게 뭔지 쭉 설명하고 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 영혼의 닻을 하늘 지성소에 들여 놨기 때문에
우리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서 영원한 제사장을 따라 그리로 들어간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신 분이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7:1절에 와서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이제 멜기세덱에 관하여 다시 설명해야 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히7장이 뒤따릅니다.
|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감사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