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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새날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
마가복음 16장 1-11절(마 28:1-10, 눅 24:1-12, 요 20:1-18)
1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9(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 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11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신지 삼일 째 되는 날, 곧 안식일이 지나고 그 이튿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지내심을 목격한 여자들이었습니다(마 27:55, 56, 61)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첫 번째로 목격한 여자들로 나옵니다. 마태는 두 여자, 곧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를 말함. 마 27:56)만을 기록하고 있으나, 마가는 살로메, 누가는 요안나(구사의 아내)와 다른 여자들도 함께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눅 24:10) 다른 여자들에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지내심을 목격한 여자들은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이라고 했는데(눅 23:49,55) 마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목격한 여자들로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도 같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7:56) 마태는 예수님의 장사지내심부터는 그저 간략하게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전날에 향품을 사두었다가(막 16:1) 동이 터오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좀 더 많은 향품을 예수님의 무덤 안에 두기 위해서 입니다(요 19:39). 여자들은 걸어가면서 서로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을 막은 큰 돌을 굴려줄 수 있을까 하여 걱정하였습니다(막 16:3) 그런데 여자들이 무덤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더니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 문을 막았던 큰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 있는데 그 형상은 번개와 같아 찬란하게 빛났고 옷은 매우 눈부시게 희었습니다. 이것을 본 무덤을 지키던 군병들은 겁에 질려서 땅바닥에 엎드러졌는데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마 28:2-4)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가는 여자들 중에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여자들에 비해 걸음이 빨랐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무덤에 빨리 가고픈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여자들에 비해 앞서서 무덤 문에 당도해 보니까 무덤 문이 열려 있어 안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무덤 안은 비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해 갔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고서 이 사실을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리고자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가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고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그 얘기를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이게 무슨 말인가 하여 알아보고자 무덤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세마포만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따로 개여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것을 보고 의아해 하면서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두 제자에 대해서 요한은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요 20:1-10).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얘기하고는 다시 무덤으로 돌아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러는 동안에 다른 여자들이 무덤에 당도해 보니 무덤 문을 막고 있던 큰 돌이 옮겨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은 그것을 보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었습니다(눅 24:3). 여자들이 이를 인하여 근심하고 있는데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주의 천사)이 나타나 여자들의 곁에 있는 것이었습니다(눅 24:4) 그 중에 한 사람은 오른편에 앉아 있었습니다(막 16:5). 여자들이 크게 놀라 두려워하며 얼굴을 땅에 대자(눅 24:5) 주의 천사가 말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마 28:5-7, 눅 24:5-7). 주의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여자들은 두려워하며 무덤에서 나와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빨리 알리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그런 상태에 있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돌아와 울면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자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쪽에 하나는 발이 있는 쪽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들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왜 우는지를 물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누가 내 주를 가져다 어디 두었는지를 알지 못해서 그런다고 대답하고서는 뒤로 몸을 돌이켜 예수님이 서 계신 곳을 보았으나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는 동산지기인줄 알고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알려주면 내가 가져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그제서야 예수님이신 것을 알고는 “랍오니(선생님)여” 하며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잡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다 ”고 하시고서는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하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이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하던 사람들이 앉아서 울며 슬퍼하고 있는 데로 빨리 가서 그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전한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요20:11-18,막16:9-11). 이것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첫 번째로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한편, 예수께서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신 것은 이번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번을 포함해서 모두 열 한 번에 걸쳐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본문에서 무덤에 왔다가 예수님의 시신은 보지 못하고 주의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얘기를 듣고 제자들에게 이 말을 알려 주려고 달려가던 막달라 마리아 외의 다른 여자들은 길가는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들 앞으로 걸어오시며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들은 땅에 엎드려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말씀하셨습니다(마 28:8-10). 이것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두 번째로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여자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외에도 더 있습니다. 모두 열 한 번 나타나셨는데, 세 번째 나타나심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와 빈 무덤을 보고 돌아가 있다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하여 다른 여자들에게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들었으나 믿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그날 오후 어디에선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고린도전서 15장 5절에서 “게바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해 주고 있으며,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열 한 제자와 다른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해줄 때 베드로가 자신도 오늘 만나 뵈었다고 말한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눅 24:33-35).
네 번째 나타나심은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막 16:12-13, 눅24:13-32).
다섯 번째 나타나심은 엠마오에서 두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며 듣고 있던 그날 저녁,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나 주셨습니다. 이 자리에는 도마는 없었습니다(눅 24:36-43).
여섯 번째로 나타나심은 일주일 후에 도마도 함께 한 열 한 제자가 있는 곳에 다시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이 없는 것과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고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막 16:14-18).
일곱 번째로 나타나신 것은 디베랴(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열한)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으로는 이번이 세 번째였습니다. 예수님은 생선과 떡을 준비해 놓고 일곱 제자들과 조반을 같이 하신 후 시몬 베드로와 그에게 맡겨준 일과 그의 장래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셨습니다(요 21:1-23).
여덟 번째로 나타나신 것은 갈릴리 산에서 전에 여자들에게 말씀하시던 대로 제자들에게 나타나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열 한 제자가 경배를 하였으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사도)들에게 자신이 승천하여 영광을 입으시고 다시 성령으로 강림하여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실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8:16-20; 눅24:44-49; 행1:4-5).예수님이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말씀한 ‘제자를 삼아’는 [제자 만들라]는 말입니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통해 이 일을 하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사도)들이 해야 할 임무는 세상 모든 족속에게로 나아가 예수님이 그들 자신의 구원자이시며 주님이시며 왕이심을 확실히 믿고 그분께 자신의 삶 전체와 목숨을 내 맡기고 충성하려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그분의 제자된 표시로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며, 그분의 제자의 도리로서 예수님의 말씀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임무는 계대성을 띠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위임되었으므로 교회는 세상 끝날까지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됨은, 새언약 백성의 모임인 교회의 주인이시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 그분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그분의 제자들을 만드는 일에 온 힘을 쏟는데 있습니다.
아홉 번째로 나타나신 것은 고린도전서 15장 6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열 번째는 고린도전서 15장 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예수님의 동생이었고 후에 예루살렘 교회를 감독하고 활동하던 야고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끝으로 열한 번째로 나타나신 것은 마가복음 16장 19절, 사도행전 1장 6-11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열 한 제자와 함께 하시면서 성령이 임하신 후에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게 될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나타내 보여주신 첫 번째에서 부활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그 모습을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11절).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에서 ‘믿지 아니하니라’는 제자들이 지금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음으로 여기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있으며, 그래서 이 부활의 믿음에 있으면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인데,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여 이 믿음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헤를 받아들이지 않는 불순종의 불신앙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에게서 이러한 의심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고 말하는 것인데도 의심하였습니다. 그래서 11절에서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에 있은 제자들은 12-13절에서도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고 하고 있으며, 14절에서도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고 거듭하여 그들이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는데, 이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본 자들이 전하는 말임에도 믿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모습을 본 자들 중에는 (예수께서 세 번째 나타나심에서)베드로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은 때문에 갖는 의심을 인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완고하여 믿지 않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의심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심으로 그동안 자신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른 것에 의혹을 품고 불신앙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무덤에 장사 지냄으로 죽은 자 가운데 있어야 할 예수님의 몸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함으로, 그래서 무덤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몸이 무덤에 있지 않고 자신들 눈앞에 나타나 그 살아 있는 몸을 보이심으로 그분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란 사실에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기지 않은 현실이 일어남으로 마음에 크게 기뻐하면서도 제자들 중에서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믿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을 예수께서는 그들이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부활하신 복음을 전할 자로 부활 신앙에 있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나타내 보여 예수님이 성경의 예언대로 과연 다시 살아나셨음을 본 목격자가 여자들을 비롯하여서 열 한 제자가 있었으며, 그 외에도 500명이 넘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일시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기도 하였으며, 그리스도와 교회의 핍박자로 있었던 만삭되지 못한 자와 같은 바울도 그 증인이 되었습니다(고전 15:5-8).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바울은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일깨워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전해 받았으며, 또한 그 안에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드린 말대로, 여러분이 복음을 굳게 잡고 있으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지 않았으면, 그 복음으로 여러분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내가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고전 5:1-5, 표준새번역)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무덤에 묻히신 후, 성경대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무덤에 묻히신 후 성경대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인 것입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께서 온 세상에 있는 그를 따르는 믿는 자에게 생명의 주가 되시는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을 세상에 생명을 주는 주가 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일어난 일입니다. 죄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서는 부활이 없습니다. 그들은 죄 값으로 흙에서 나온 대로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그렇게 죽음뿐인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을 생명의 주와 연합시켜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의 부활을 하여 주의 나라에 함께 들어가게 해주십니다.
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대로’ 그대로 되어진,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되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대로’는 구약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메시야]의 죽음과 부활 그대로 되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은 호세아 6장 2절에서의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1)라고 하신 말씀과 요나 1장 17절에서의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라고 행하신 표적에서 볼 수 있습니다.2)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네 차례에 걸쳐서 자신의 죽음과 함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하실 것을 예고하셨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과연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한지 사흘 만에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시기 위하여, 그래서 성경대로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하여 죽음을 당하게 하셨으며, 사흘째 되는 날에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예수님의 시신이 있어야 할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게 하여 그들이 본 것을 증언하게 하시며 또한 죽은 자로서 무덤에 있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그 몸을 친히 보여주심으로 이것을 본 자들이 자신들이 본 것을 증언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하셨다는 사실을 확증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있어야 할 무덤이 빈 무덤으로만 있어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하지 못하며,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는데 그 몸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빈무덤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의 나타남과 그 모두를 보고 들은 사람들 모두의 존재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함에 아무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의심할 어떤 이유가 있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은 의심을 합니다(막 16:11, 13). 그러한 제자들을 예수께서는 꾸짖으셨으며, 사도 바울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전하여 그 사실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아침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여느 때의 아침과는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새아침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어 죽음을 당하셨는데,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아침은 예수님을 주로 섬겨 따르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새아침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죄를 구원하시는 구주로 믿고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가 예수님에게서 바라본 대로 죄에서 구원을 받아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뵌 여자들이 큰 두려움과 기쁨 중에 땅에 엎드려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입맞춤으로 경외의 표를 나타낸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곧 성경대로 되어진 일임을 보고서 예수님을 구주로 바라보는 것에서 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후에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심고 거두는 부활의 원리’에 의해서 가르쳐 집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고린도교회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한 후 우리의 부활을 이야기 하면서 이 부활을 땅에 씨앗을 뿌렸을 때 그 씨앗이 먼저 죽지 않고는 싹이 돋아나지 않는 것을 들어서 썩어질 우리의 땅 위의 몸이 다시 살아날 것과 그때의 우리의 부활은 싹이 돋아난 것의 형상이 땅에 심은 씨의 형상과는 전혀 다른 것처럼 썩을 몸이 썩지 않는 몸으로 욕된 몸이 영광에 가득찬 몸으로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육의 몸이 신령한(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곧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와의 대조되는 비교를 말합니다. 첫째 아담은 사람의 몸을 받아 났지만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는 영적인 분이십니다. 첫 사람 아담은 땅에 있는 흙에서 지음을 받았지만,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인 우리도 모두 아담과 같이 흙으로 지어진 몸인 사람의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후에는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적인 하늘이 몸을 우리가 받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그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 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와 같은 몸, 곧 하늘에서 주어진 몸을 지니게 됩니다. 지금은 우리가 첫 사람 아담과 같은 몸을 지니고 있지만 훗날에는 그리스도와 같은 몸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살과 피로 이루어진 형상의 몸을 땅에 심는 일을 하는 것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오는 전혀 새로운 형상의 몸을 입습니다. 그것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땅 위의 몸으로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몸을 땅에 심으므로 인자가 오실 때 천사들이 부는 나팔 소리와 함께 죽었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순식간에 다시는 결코 죽지 않는 새로운 몸을 가지고 다시 살아날 것이며 또한 아직 살아남아 있는 자들도 그 순간에 땅 위의 몸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히 사는 하늘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에 따른 것입니다.3) 이 예언에서 하나님께서는 시온산에서 왕이 되실 때에 천하 만민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 것인데 그들의 얼굴에서 죽음을 영원히 거둘 것이며, 그래서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온 세상에서 당한 수치도 깨끗이 씻어 내실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인 성경이 사실이 될 것이기 때문에 죽음이 결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생명을 이길 수 없으며, 죄 곧 죽음을 가져오는 독침은 더 이상 아무런 효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폭로하는 율법도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항상 이김을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어찌 이루 다 감사를 드릴 수 있겠는가 라며, 장차 우리에게 얻을 승리는 확정된 확실한 것이므로 주께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에 항상 힘쓸 것과 부활은 분명히 이루어지며 따라서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임을 기억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우리는 흙의 땅을 볼 수 없는 시멘트 문화에서도 화분을 통해서나마 여러 식물을 키우며 꽃의 향기라도 맡을 수 있고자 합니다. 향기를 내는 꽃 중에는 유난히 강한 향기를 뿜는 것도 있는데, 그 향기는 향기를 맡는 사람의 정신을 맑아지게 하며 마음에도 안정과 평온을 갖게 하며 생활을 즐거움을 갖고 하게 합니다. 향기가 그의 마음과 몸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 14-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통해서 승리의 행진에 참여케 하셨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데, 이런 우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분이 이루신 일인 복음이 향기처럼 사방에 퍼져나가게 하십니다. 이 향기는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며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퍼져나가 구원받은 사람이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가 그 향기를 맡게 됩니다. 이 향기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죽음과 멸망의 공포에 찬 냄새를 맡으며 그래서 그 냄새를 맡는 것이 아주 싫고 마땅치 않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구원받은 우리는 이 향기에서 생명의 기쁨을 맡습니다. 바울은 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당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 환영의 인파들이 뿌려 눈발 흩날리듯이 하는 꽃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가 있는 개선행렬의 광경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아침의 그 새로운 날에 생명의 향기를 내뿜어 온 세계의 사람들이 맡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향기에서 죽음과 멸망의 냄새를 맡음으로 그 향기 자체를 싫어하고 거부하며 배척하는데, 우리는 이 향기를 맡는 게 너무 좋으며, 그 향기가 진하게 다가올수록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향기를 맡고 있습니다. 그 향기를 발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견고히 서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그가 바라본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생명과 부활을 얻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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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세아 6장 2절에서의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는 ”그가 분명히 우리들을 살릴 것이다. 2-3일 안에 그가 우리들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는 것인데, 여기서 이틀과 삼일은 다니엘이 말한 바 ’한때와 두때와 반때‘(단 8:25)와 같이 시간의 장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고난을 참고 견디면 견딜 수 잇는 ’인내의 때‘를 말함으로 비록 첫날이 아니요 둘째 날은 아닐지라도 제 삼일에는 반드시 주께서 우리를 일으키시리라는 위로의 약속일 것이다(김희보, 구약 호세아 주해, pp. 170-171). 이러한 사실은 호세아서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연애하여 따르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찢고 치시는 징계를 내리셨으나 그것은 그들을 사랑하사 돌이키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리하신 것이란 것에서(신 32:30 참고) 이스라엘을 회복케 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외에는 저들의 죄와 상처를 온전히 치료하고(출 15:26), 고치시며, 낫게 하실 분이 없다는 것을 저들이 깨닫고 돌이키길 원하시는 것에서 저들을 2-3일 안에 일으키실 기간에 두시고서 그들을 회복케 하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위로에 있게 하신 것이다.
한편, 호세아에게 주신 2-3일 안에 주께서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라는 위로의 약속은 칼빈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생의 거울‘(a mirror of our life)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을 생각하게 하며(김희보, 구약 호세아 주해, p. 171.), 여기에서 우리의 구원과 부활을 함께 보게 되는 것이므로 메시야적 예언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는 결코 비약된 해석은 아닐 것이다.
2) 예수께서는 요나의 표적으로 있은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밤낮 사흘을 있었던 것을 자신과 연관시켜서 자신이 땅속에서 밤낮 사흘 동안 있게 될 것이라고 하시면서 자신을 요나보다 더 큰 분으로 말씀하셨다(마 12:40-41).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삼일 삼야를 물고기 뱃속에 있게 하셨다가 물고기에게 명하여 요나를 육지에 토해 내게 하신 일을 하나님의 뜻의 온전한 성취를 위하여 보냄을 받은 예수께 행하심으로 땅속(무덤)에서 사흘 밤낮을 있음으로 죽은 자 가운데 있었던 예수님을 일으켜 다시 살리심으로 온 세상에 생명의 주를 세우시는 부활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불신앙에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연결하여 ‘저희의 완악함을 인하여’ 표적을 나타내셨음을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않는 악함에 있는 것이다(마 12:38-41).
3) 이사야 25장 8절.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