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Ⅱ를 보고
필자가 유일하게 정독하지 못한 소설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중간중간 독백과 심리 설명이 너무 지루하여 몇 번을 시도하다가 결국 다 읽지 못하고 말았다. 도스토엡스키는 사형수의 신분으로 12년을 살고 감형을 받아서 자유의 몸이 된 후, 이 소설을 썼으므로 당연히 삶과 죽음에 대한 묵직한 주제를 썼으리라.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도 인간의 욕망은 한계가 없음을 몸소 경험한 덕분에 이런 대작이 나왔을 것이다.
뛰어난 심리 묘사와 신에 대한 저항, 도덕과 지적인 긴장감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많은 독자를 사로잡고 있는 작품이다.
극장 입구에 배치한 판넬에서 부터 배우들의 포스가 어마어마하다.
특히 정동환 배우와 김태훈 배우의 카리스마를 기대하며 미리 침을 삼킨다.
워낙 유명한 고전이라 줄거리를 모르는 분이 많지 않으리라 생각해서 내용은 간단하게 정리할까 한다.
이야기는 러시아의 지방도시에 사는 벼락부자 카라마조프 가문 표도르의 아들 네 형제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등장 인물의 심리 상태나 일그러진 본성을 극대화시키는 장치로 커다란 네 개의 거울이 자주 등장한다.
공연은 고전의 감동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제대로 읽지 못한 후회와 다시 읽게 하는 동기부여를 한다.
늘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첫째 아들 드미트리. 상황을 늘 방관자로만 바라보는 척 했지만 사실은 아버지를 미워했던 둘째 아들 이반.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길을 걷고자 했던 수도자 셋째아들 알료사. 카라마조프 가문의 하인의 신분이지만, 실은 혼외자로서 표도르의 서자인 넷째 아들.
이 네 명의 아들 중에서 과연 아버지를 죽인 자는 누구일까?
아버지를 직접 죽이진 않았지만, 자기가 죽이고 싶어 했으니까 죽인거나 다름없다고 끝없이 고뇌하고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둘째 이반의 연기가 압권이다. 지킬 앤 하이드처럼 다중적으로 보여지기도 하면서 광기를 보이는 몸짓은 박수를 보낼 만 하다.
그 때는 근친혼인이 일반화되었으므로 열성인 유전자가 많이 나타났다. 이를테면 지적 미숙아나 경기를 일으키거나 몸이 건강치 못한 자녀가 많았다. 여기서도 결국엔 첫째는 손을 떨고 둘째는 경기를 일으킨다. 하인이 알리바이 조성으로 착란 연기를 해도 당연시 하던 문화다. 하인의 신분 넷째 아들의 몸짓 또한 몸속 갈비뼈까지 꿈틀대며 표현하는 연기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양쪽 갈비뼈가 X레이 사진처럼 석연하게 들어나고 아래 배는 한 줌도 안되게 들어가고 명치밑의 식스팩은 미이라처럼 나타난다. 저 몸을 만들기 위해 몇 달을 고생하며 단련시켰을까. 배우의 열정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네 명 형제들의 연장선상에 우리도 자유롭지 못하다. 수백년 전에 쓰여졌던 소설이 현대적으로 재탄생된 이 연극을 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인가. 연극은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독백(정동환 분)과 함께 막이 내린다. 참고로 극 중에서 정동환 배우는 일인사역을 한다. 그 자그마한 키와 몸에서 어쩌면 그렇게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가 나오는지 경이롭다.
"분노와 증오의 태풍이 당신을 삼키지 않는다면 알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영혼에 필요한 것은 분노가 아니라 사랑인 것을요. 그리고 그것은 행복의 시작이고 구원의 시작이란 것을요."
나는 정동환 님의 낮지만 설득력있는 독백을 여기까지 듣자 소름이 쫙 끼쳤다.
비록 연극이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있지만, 나에게는 입장료 버금가는 선물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의 연극은 나를 한 단계 성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