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권유술협회와 “로베스피에르의 우유”
공권유술협회가 처음 창설된 이후부터 가입한 관장들은 여러 가지 자신들이 원하는 의견을 내놓고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협회장에게 많은 의견을 내왔습니다.
대부분 자신이 운영하는 도장의 발전을 위해 협회가 나서주기를 바란다는 부탁이 많았습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나의 생각은 언제나 도장이 잘되어야 협회가 잘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개개인의 의견을 수렴하다 보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음식점에서 주문을 하나할 때도 자기의 취향에 따라 메뉴를 선택을 하게 되고 똑같은 음식이 나오더라도 기호에 따라 짜게 먹고 싶으면 소금을 치거나 후추를 넣어서 먹기도 하는 그야말로 기호에 따라 각양각색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음식점은 손님하나하나 까다로운 식성을 맞추는게 쉽지는 않겠습니다.
문제는 공권유술협회가 개인의 식성에 따라 제도를 바꾸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개인의 의견에 따라 모든 행정을 이끌어 왔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공권유술 시스템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만, 한편으로 협회의 발전을 후퇴시킨 것이 사실입니다.
만약 일괄된 협회의 시스템을 밀고 나갔다면 공권유술은 국내외쪽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공권유술은 실전무술이기 때문에 강력한 시합의 룰을 만들어 새로운 창시무술의 저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함께 동고동락을 해왔던 어느 관장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나의 말에 그는 극심한 불만을 표출했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수렴하여 시합을 추진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시합을 치룰 때마다 많은 선수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야 했습니다.
게중에는 중상을 입은 선수들도 속출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시합을 만들자고 주장한 관장은 자신의 선수들을 시합에 출전시키지 않았습니다. 부상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선수를 출전시키기 어렵다는 통보였습니다.
“공권유술협회의 단증이 기존의 단증보다 가격이 저렴하면 많은 유단자가 배출할 것이고 그것은 장기적으로 도장이나 협회에 유리할 것입니다.”
어느 관장의 의견에 반대를 했지만 졸지에 고지식한 회장이 된다는 느낌을 받아서 의견을 수렴하였고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고단증을 따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의견을 낸 관장은 공권유술 단증과 무관한 협회의 단증을 뽑는데 열을 올렸습니다.
이러한 관장들의 개인 의견을 수렴하여 생기는 부작용이 15년동안 반복되어 왔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얻는 것이 있었다면 실패의 원인을 15년동안 몸소 체험을 해서 확실한 경험을 얻었다는 것이지만, 사실상 잃는 것이 훨씬 많았습니다.
어떠한 제도나 시스템을 하나를 만드는 데에는 순간적인 아이디어보다는 몇 달, 몇 년을 심사숙고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묻고 또 검토하여 결정을 해야 합니다. 만약 검토과정에서 아니다 싶으면 의견을 낸 사람이 섭섭하다고 하더라도 이해를 해어야 합니다.
일단 한번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게 되면 “하다가 아니면 말지..”라는 행동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실패하여 협회나 도장에 큰 손해가 끼치더라도 돌이킬 수 가 없습니다. 이제는 공권유술의 시스템이 한국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미국, 러시아같은 나라에서 함께 실행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현재만 생각한다면 원래의 의도와 정반대의 참혹한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프랑스 혁명기의 로베스피에르(1758~1794)입니다.
18세기말 프랑스대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로베스피에르는 루소의 자유민권사상을 실행에 옮기려 애썼습니다.
그는 집권 후 시민들이 가장 원하는게 무엇이고 군중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게 무엇인지 찾는데 골몰했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는 생필품 가격이 급등했습니다. 당연히 시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지요.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은 우유값이 오르기 시작하자 광장에 모여 시위를 하기 시작합니다.
로베스피에르는 우유값이 비싸서 제대로 사먹지 못하는 시민들을 위해 우유값을 절반으로 낮추라고 포고령을 내리게 됩니다.
이 포고령을 어기는 사람은 즉각 체포해 가혹하게 처벌했습니다. 우유가격은 순식간에 내렸고 시민들은 환호합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충분히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유를 팔아도 사료 값을 건질 수 없게 된 목축업자들이 줄줄이 도산하면서 젖소를 도살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젖소의 사육이 크게 줄고 우유의 생산량도 급감하면서 우유값은 오히려 몇 배로 폭등합니다.
시민들이 불만을 토로하자 로베스피에르는 이에 또 다른 처방을 내놨습니다.
젖소를 많이 키울 수 있도록 사료 값을 절반으로 내리도록 명령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엔 많은 사료업자들이 쏟아지는 부도를 감당하지 못해 사료생산을 중단하고 결국 밭을 갈아엎었습니다.
또다시 사료 값은 폭등하고 우유값은 혁명전의 10배로 치솟게 됩니다.
“혁명이후 애꿎은 조치로 갓난아이들에게 조차 우유를 먹일 수 없게 되었다!”라고 생각한 시민들은 폭발했고 결국 로베스피에르는 그가 만든 단두대로 끌려가 목이 잘려나갑니다.
시민들을 위해 선의로 시행했던 정책이 반대로 시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로베스피에르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로 인해 1794년 프랑스 혁명도 막을 내립니다.
평생을 사치라고는 모르고 검소하게 산 로베스피에르. 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시장을 이해하지 못했고 무리한 개입으로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공권유술협회가 “로베스피에르의 우유”와는 똑같지는 않겠지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공권유술도장을 위한 일이 오히려 협회와 도장에 발전에 저해를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제주도장에서 여성을 위해 빨간색도복을 제작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전화통화로 설명을 했기 때문에 충분한 해명이 되지 않았겠지만 다행히 제주도장의 배관장이 너그럽게 이해를 해주어서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다른 관장님들에게 설명을 약간 드리자면, 처음부터 우리가 검은색 도복을 착용한 것은 아닙니다.
공권유술이 지금까지 창설된 이레 지금의 검은색 도복이 되기까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하얀색 도복을 착용하다가 유도복같다는 어느관장의 의견으로 인해 도복깃이 검은색으로 바꾸게 됩니다. 합기도복과 같은 디자인이라 별로라는 의견으로 이후 검은색 도복을 착용하다가 도복이 얇다는 관장의 불만이 있어서 이번에는 파란색 도복으로 바뀝니다. 파란색 도복은 가격이 비싸니까 관장들이 다시 검은색 도복으로 바뀌자고 요구하면서 저렴한 가격을 원하게 됩니다.
그래서 검은색도복으로 다시 바꿉니다. 이렇게 도복 하나 가지고 허비한 시간이 무려 7년입니다. 이후 어린이 여름도복을 따로 만들자고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 있어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정작 어린이 여름도복을 다른 관장들이 아무도 주문하지 않습니다.
그 도복을 착용한 곳은 결국 협회수련관 뿐이 없었습니다.
도복이 자주 바뀐 이유는 관장들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고 협회는 그 요구를 모두 수렴했습니다.
그때 도복을 바꾸어 달라고 요구했던 관장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도복을 한번 바꾸어 입을 때마다 공권유술조직의 허술함이 여실히 드러날 뿐 만 아니라 도복을 관장이 멋대로 디자인하게 되어 도대체 어느 단체의 무술도복인지 정체불명의 도복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의견을 낼 때마다 수렴을 하여 만들어진 제도가 오히려 부작용을 낳는 경우가 많게 됩니다.
이제는 어떠한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국의 본부장들과 의견을 나누고 결정된 사항을 통보해야 합니다.
사)대한공권유술협회의 존립여부는 공권유술을 학생들에게 지도하는 지도자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협회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잘 듣고 이것이 협회를 위하고 공권유술을 수련하는 수련생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적극수렴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혹시 의견이 관철되지 않더라도 깊은 양해를 바랍니다.
대부분 과거 해보았던 시스템이나 실패했던 시스템, 아니면 현재 실행되고 있는 시스템이 중복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지 그 의견자체가 나빠서는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