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8.21일의 上京은 여러가지 목적이 있었다. 우선은 21일 오전에 경기도 용인 단국대학교에 가서 둘째딸의 졸업식에 참여해야 했고, 그날 저녁 왕십리에서 무학국민학교 동기회인 삼무회 정기모임에 참여하고는, 그 다음날 8.22일, 한국100명산 중의 98번째 산인 강원도 화천과 경기도 가평 경계지에 있는 화악산 등반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친구들과 만난 뒤에 수색의 단미 친정에 가서 하루밤을 보낸 뒤 8.23일 원자력병원에서 암투병 중인 조재춘 형의 병 문안을 한 뒤, 귀향하는 것이 이번 나들이의 일정이었다. 자! 시간이 없어서 이제 서둘러 떠난다.
8.21일 아침 6:35분에 경주를 출발, 경부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린다. 중간에 졸려서 현재 운전은 단미가 한다.
오전 11시 넘어서야 경기도 용인 죽전 단국대학교에 도착했다. 오전 10시에 혜당관에서 전체 졸업식이 있었고 11시에는 각각 단과대학에 돌아가서 각 학과별로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막 의식이 시작된 강의실에 원중이가 뛰어들어가면서 바로 둘째누나한테 달려갔다. 원중이와 둘째딸 민희와의 사이는 매우 돈독한 사이이다. 하기야 지금 졸업하는 이 전공, 특수교육학은 막내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원중이가 둘째누나를 이 대학으로 오게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민희는 수석이나 차석 졸업이라고 했는데 내가 도착하니 대표로 앞에 나가서 우등상을 받고 있었다. 어쩐지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민희 또한 어렸을 때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가족 식사는 민희 숙소가 있는 안산으로 와서 한다. 늘 우등생이었던 둘째딸 강민희는 지방 국립대학 영문학과를 다니면서 수능시험에서 제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음에 늘 불만이었는데, 외국에 1년 공부하러 다녀오던 차에 막내의 자폐증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다시 공부를 하여 단국대학교 특수교육학과에 새로 입학했다. 그것도 수석으로..........그리고 오늘 3년만에 조기졸업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조기졸업을 한 만큼 성적이 아주 우수했다. 평점이 4.3점을 상회했을 정도로..........
원중이한테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둘째누나와 함께 있게 하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 우리는 우리대로 서울에 오면 볼 일이 많으니까.....안산의 둘째딸 숙소에 원중이를 데려다 준다. 원중이는 둘째딸을 너무나 좋아하기에 우리가 떠나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왕십리에서 있었던 무학국민학교 동기회에 참석한다. 국민학교 동기들은 만나면 늘 반갑다. 친구들이 위에서 부터 쭉 보인다. 왼편 위부터 이형섭, 신아영, 김형철, 전종성, 박태순, 홍대중, 박종환........오른편에는 홍정일, 장남진회장, 안 보이고, 이성표, 원성진, 이혜란(전혀 안 보이지만 안다..ㅋ), 이효숙(맞나?)...........그리웠던 친구들, 왕십리에서 만났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친구 김형철 그리고 단미와 함께 화악산 등반을 위해 북으로 올랐다.
무심코 네비게이션에 화악산을 찍었는데, 의례 경춘도로를 달려 가평에서 명지천으로 해서 화악산으로 안내할 줄 알았으나, 우리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네비게이션에 속고 말았다. 내 차의 성능 좋은 네비게이션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달리던 나를 46번 국도인 경춘도로로 안내하지 않고 47번국도인 구리-퇴계원-진접-내촌-신팔-화현-일동-이동(이동은 이미 화악산의 위도보다 북쪽이다)으로 올라가 도평에서 백운계곡으로 틀어서 결국 우리를 백운산의 백운계곡 앞으로 안내했다. 이를 어쩌랴? 우리를 북으로 올렸다가 다시 내리려고 하는 모양이다. 이제는 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한북정맥의 좌측에 있었기에 한북정맥의 우측에 있었던 화악산으로 바로 넘어가는 길은 없다. 아마 네비게이션은 당시에 우리 차가 서울의 공릉동에 있었기에 바로 이어진 47번도로를 타게 해 진접 방향으로 차를 안내한 모양이다.
우리는 광덕산과 백운산을 잇는 광덕고개(카라멜고개)를 꼬불꼬불 넘어 강원도 화천으로 들어가서 사창리에서 75번국도를 타고 다시 큰 고개인 도마치고개를 넘어 도로 경기도 가평으로 넘어와 석룡산 입구를 지나 드디어 화악산 입구인 관청리에 도착한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지났다.
벌써 오후 3시이니 과연 등반이 될런지는 산 들머리에 가서 판단해야 할 지경이었다. 관청리 마을의 어느 아저씨는 "이 산을 너무 쉽게 보지 마세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높은 산입니다. 굳이 올라가겠다면 음식과 랜턴을 챙기세요. 그리고 유사시에 관청리에서 올라갔다고 119로 신고하세요."라고 걱정스럽게 주의를 시킨다. 하긴 나도 조금 걱정은 되지만 오랜 세월 겪었던 야간산행과 산에 대한 경험과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도로 나를 격려하는 김형철의 동조 등에 힘 입어 일단 산에 오르고 본다. 형철이도 어디 올라가고 싶어서 올라가고 했을까? 내가 반드시 올라가야 한다고 하니 그냥 따르는 것이겠지. 가다가 악조건이 되면 후퇴하면 되겠지........싶었다.
산에 오를 준비를 하는 단미.
저 위에 보이는 산은 화악의 입구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곧 알게 되었지만 화악은 생각보다는 훨씬 더 거대산이었다. 하긴 고도가 1,468m나 되고 주변의 산세가 예사롭지 않으니 내가 경기도 산을 너무 우습게 보긴 본 것 같다. 사실 경기도에서는 크게 높은 산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한국100명산 중 98번째 산인 화악산은 경기도 가평군과 강원도 화천군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가 1,468m이다. 동쪽의 응봉(鷹峰:1,436m), 서쪽의 국망봉(國望峰:1,168m)과 함께 한북정맥(한강 북쪽 산줄기를 일컫는 말로 일명 광주산맥(廣州山脈))의 주봉(主峰)을 이루며, 경기도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가평천 계곡을 사이에 두고 경기도 2위 봉인 명지산(1,267m)과 마주보고 있는데, 가평읍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져 있고 경기 5악 중 으뜸으로 친다. 화악산을 중앙으로 동쪽에 매봉, 서쪽에 중봉(1,450m)이 있으며, 이 3개 봉우리를 삼형제봉이라 부른다. 산의 서, 남쪽 사면에서 각각 발원하는 물은 화악천을 이루며 이것은 가평천의 주천(主川)이 되어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이제 산행을 시작한다. 오후 3:35분이라 등반을 시작할 시간이 아닌데도 나를 믿는 건지, 아니면 나의 산에 오르려는 강한 고집을 깨트리지 않으려고 하는 건지 그는 아무런 말 없이 그저 묵묵히 산에 오른다. 분명히 오후 3:35분은 이 큰 산에 오를 수 있는 시간은 아니다. 산에 오르면 반드시 하산 때 고생을 하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캄캄한 밤이 되니까.......밤의 산은 위험하기 그지 없다. 그것도 이 큰 산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가다보니 길이 애매한 데서 이상하다 싶어 앞을 보니 맹독을 품은 독사가 지키고 섰다. 맹독이 있음을 어떻게 아냐고? 뱀은 사람이 셋이나 와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맹독이 있으니 자신이 있다는 얘기다. 이 뱀을 보고 즉시 판단한다. 아! 이 길은 아니다. 길을 잘못 접어들었구나. 그리곤 다시 back한다. 이런 것이 산에 대한 경험이다.
그렇지. 이 길이구나. 상수도 보호한다고 큰 철문을 막아 놓아 우리는 길을 놓쳤던 것이다. 우리는 철문을 열고 큰골로 들어간다. 하지만 길은 맞는데 너무 우거져 있다. 사람들이 자주 찾지 않는 산인 것이다. 역시 걱정이 되는 것은 독사들이다. 이런 지형에는 독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등산로와 떨어져 흐르던 태고의 큰골을 드디어 만나고 이제 건넌다. 크게 아름다운 계곡은 아니지만 물은 깨끗하기 그지 없다. 이 위에는 아무도 없기에 물이 깨끗할 수 밖에 더 있겠는가?
어제 비가 많이 왔다는 데도 물이 이렇게 맑다니.........역시 맑은 계곡이다. 이 물들은 골짜기마다 흘러 나와 가평천으로 흘러들어 명지산 앞에서 멋진 계곡을 만들어 낸다. 결국에 이 물들이 흘러가 북한강의 물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진 몇장 찍다 보면 둘은 앞으로 나아간다. 시간은 없고 속도는 내야 하는 데, 사진 촬영은 성가시기만 하다. 카메라가 성가시다라는 느낌은 자꾸 커져 그것이 나중에 카메라를 부숴지게 하는 큰 요인이 되게 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한 장씩 촬영할 때마다 둘은 앞에서 점점 멀어진다.
큰골의 맑은 물.
도리어 둘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둘의 얼굴에는 걱정하는 모습이 전혀 없는데 산을 아는 건지, 아니면 나를 지나치게 믿는 건지........알 수가 없다. 하긴 나도 이 산이 이만큼 큰 산인지는 몰랐다. 정상 갔다 내려오다가 1시간 정도만 야간산행하면 하산 완료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오산이었다. 산은 생각보다 높았고 우리는 쉬지 않고 내려왔으나 밤 10시에야 하산을 완료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사진이나 많이 찍어두자. 이 화악산 큰골에 언제 다시 오겠느냐?
숲길에 접어들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오후 5시경이다.
관청리를 떠나서 현재 2.2km 왔고 정상까지 2.8km 남았으니 아직 반을 오지 못했다. 더우기 큰골이 지나면 가파른 된비알이 시작된다니 반은 커녕 1/3도 못 왔다.
간혹 빛이 있는 곳으로 얼굴을 내 밀면 이런 밝은 산 풍경도 나온다.
경기도 가평군 북면 끝자락에 강원도와 경계를 이루면서 높게 솟아 있는 화악산은 경기도의 최고봉일 뿐만 아니라 경기 5악(화악산, 운악산, 관악산, 송악산, 감악산)중에 으뜸이다. 정상 주변은 군사지역으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정상 서남쪽 1km거리에 있는 중봉이 화악산 정상을 대신하고 있다. 정상 신선봉(1,468m)과 서쪽의 중봉(1,450m), 동쪽의 응봉(1,436m)을 삼형제봉이라 부르고 있다.
점점 어두워지는 화악산 큰골 위 화악산 사면
앞으로는 어두워져 촬영이 어려우니 더 찍어둔다. 모두들 웃고 있지만 나는 내심 걱정이 앞선다. 가장 큰 걱정이 산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 밖에 없는 헤드랜턴이 가장 큰 걱정이다. 혹 고장이라도 나면 큰 일이기 때문이다. 그 헤드랜턴은 지난번 설악산행 때 하루밤 내내 켰던 랜턴이 아니던가? 그러면 밧데리도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럼 우리가 왜 이렇게 무리한 산행을 감행해야 하는가? 뻔하다. 이 산은 반드시 올라야하는 산인데 지금 못 오르면 다시 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튼 오늘 이 산을 올라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오를 수 있는 중봉을 2km 남겨두고 촬영한 이 사진이 내가 촬영한 마지막 사진이다. 이 사진 촬영 뒤 단미가 나와 형철의 사진을 찍어준다고 하기에 카메라를 건네다가 떨어뜨려 사진기는 돌에 부딪혀 부숴지고 만다. 캬! 미치겠네. 하는 수 없지.
이제 부터는 다른 사람이 촬영한 사진을 퍼 와서 쓴다. 화악은 크다. 아래 골은 우리가 오른 큰골로 보이는 바와 같이 저렇게 깊다. 저러니 맑은 물이 흐를 수 밖에......
화악의 전경. 우리나라에서 가장 춥다는 화악산은 한북정맥의 중간 지점에서 가장 크게 솟은 봉우리이다. 화악산은 산림청 선정 한국 100명산에 선정되어 있는데 그 선정 사유는........경기 제1의 고봉으로 애기봉을 거쳐 수덕산까지 약 10㎞의 능선 경관이 뛰어나며 시계가 거의1백㎞에 달하는 등 조망이 좋은 점 등이 고려되었으며, 집다리골 자연휴양림이 있고, 정상에서 중서부지역 대부분의 산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사유가 되어 선정이 되었다.
우리가 오를 수 있는 정상인 중봉에 서면 사방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일품이며, 북쪽에서 시계방향으로 촛대봉, 수덕산, 명지산, 국망봉, 석룡산, 백운산 등이 바라보인다. 중봉 남서쪽 골짜기에는 태고의 큰골계곡이 있고(우리가 올라 온 계곡), 남동쪽은 오림골계곡이 있다. 북쪽은 조무락골계곡이 있는데 이 모든 계곡 곳곳에는 크고 작은 폭포와 沼가 수없이 이어져 수려한 계곡미를 자랑하고 있다.
화악산 정상은 출입금지 구역이다. 따라서 화악산 산행은 중봉(1,450)이 정상을 대신하므로 처음부터 중봉을 대상으로 산행계획을 짜야한다. 그래도 정상과 중봉은 크게 멀지 않고 지척이다. 중봉에 올라서면 애기봉을 거쳐 수덕산까지 약 10㎞의 능선이 일사천리로 이어져 초겨울 종주산행코스로 적합하다.중봉-애기봉-수덕산을 잇는 능선은 양쪽으로 가평천과 화악천을 끼고 있다. 그래서 가평천 상류인 관청리가 청정지역으로 소문이 나 있는 것이다.
38도선이 정상을 가르고 있는 화악산 정상은 군사시설 때문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바로 옆에 위치한 중봉을 정상으로 여기고 오르는데, 화악의 주능선에 오르면 춘천호를 굽어볼 수 있으며, 중봉 정상에서는 남쪽으로는 애기봉과 수덕산, 남서쪽으로는 명지산을 볼 수 있다. 화악은 산세가 중후하고 험하며, 산 중턱에는 잣나무숲이 울창하다. 우리가 못 가 봤지만 강원도 화천군쪽으로는 수려한 삼일계곡, 용담계곡, 촛대바위, 법장사 등이 있다. 이외에도 조선 현종 때의 성리학자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이 벼슬을 그만두고 정사(精舍)를 지어 후학을 가르치며 은둔하던 화천 화음동 정사지(華陰洞精舍址)가 있다.
이 중봉에 오른 시간이 저녁 6:30분. 이제 어두워지는 시간은 1시간 남았다. 빨리 내려가야 한다. 아직 어두워지지 않는 1시간 동안 재빠르게 하산을 시도해 어두워져서 내려가는 고충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밥 먹을 시간도, 머뭇 거릴 시간도 우리에게는 없다. 하산에는 내가 선두에 서서 달린다. 일단은 주능선 안부인 1.7km까지는 달려야 한다. 거기에서는 3.3km이니 거기서 다시 생각할 일이다. 주능선 안부까지 달려 갔으나 시간은 벌써 7: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서도 지체할 수는 없다. 또 다시 세운 계획은.....시간되는대로 이 가파른 된비알을 내려서야 한다. 그리고는 무작정 달려서 산을 내려온다. 너무 가팔라 발목이 아프지만 하는 수 없다. 계속 달려야 한다. 된비알을 어느 정도 내려왔다 싶을 때에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흐린 날의 산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시계가 가려 길을 잃기 쉽기 때문이다. 하물며 밤의 산은 어떨까? 말할 필요도 없다. 야간산행은 많은 경험과 체력, 장비와 음식 등을 요한다. 밤의 산은 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산세를 가늠할 視界가 없기에 맹인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이런 위험한 야간산행에도 안전산행의 원칙들이 있다. 우선은 장비가 필요한데 랜턴은 필수이다. 랜턴이 없으면 모든 것은 허사다. 우선 랜턴을 밝히고 길을 잘 읽어야 한다. 길이 잘 나 있는 산도 산세 가늠이 안 되어 어려울 수 있지만 오지의 산은 특히 위험하다. 길을 읽을 때에는 모든 감각과 경험을 총 동원해야 한다. 나아가는 방향을 우선 잡고 길을 찾아야 한다. 아니면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풀이 밟힌 흔적,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 소주병, 과자봉지, 나무젓가락, 박카스병 뚜껑....모든 것들이 단서가 된다. 특히 나무가지에 달린 표식기(리본)은 결정적이다. 길을 완전히 잃었을 때에는 물 흐르는 방향으로 따라가야 한다. 물은 작은 골짜기, 골짜기가 내려갈 수록 계류가 모여 큰 계곡이 되기에 결국에는 산 밑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그러기에 물을 따라가면 결국에는 하산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물이 내려가는 길이 험한 것이 문제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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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악산의 야간산행도 마찬가지였다. 화악은 오지 산이어서 야간산행이 어려운 편이다. 7:30분 정도부터 어두워져 밤 10시에 하산 완료했으니 2시간반을 쉬지 않고 길을 찾아 내려온 것이다. 서로 다른 성격가 개성을 가진 3사람이 같이 있었다는 것도 서로간에 도움이 되었다. 나는 야간산행의 경험과 나아가는 전체 방향을 잡았고, 앞에서 랜턴을 효과적으로 앞뒤로 흔들어 주고, 단미는 예의 꼼꼼한 성격대로 리본을 정확하게 찾아냈다. 맨 뒤의 형철은 불빛이 거의 가지 않는 악조건 속에서도 한마디 불평 없이 정확하게 뒤따라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중요한 판단력을 발휘했다. 예를 들면 바위가 흐트러진 계곡 주변에서 길이 사라져서 내가 여기저기 길을 찾을 때, 형철은 길 찾기만 생각하며 상류로 더듬어 오르는 나에게 물 흐르는 방향을 지적해 주었다.
야간 산행의 과정은 촬영을 하지 못했기에 이렇게 간단한 글로 대신한다. 하지만 카메라가 부숴지지 않았더라도 촬영은 어려웠을 것이다. 촬영할 경황이 없었다. 들머리를 800m쯤 남겨 놓았을 때에야 한숨을 쉬며 이제 밥을 먹자고 형철은 말한다. 내 생각에도 이제 랜턴의 밧데리가 떨어져도 물 흐름만 따라 더듬어도 800m야 내려가지 않겠나 하는 안도감에 그러자고 했다. 그 순간 구역질이 났다. 오전 11시에 해장국을 먹고는 지금까지 그대로 왔던 것이다. 그런데 형철은 아침 8시에 아침밥을 먹고 지금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고 했다. ㅋㅋㅋ 우리는 형철이 싸 가지고 온 <전주백반>을 거나하게 먹고 다시 내려왔다. 관청리 마을에 다 다다라서 우리는 벌거벗고 알탕을 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몸에 냄새가 날 지경이었다. 관청리로 내려오면서 단미가 마지막으로 잘못된 길을 바로 잡아주면서 말한다. "북부는 이게 막산입니다! 축하합니다!" 당분간 북부 쪽에 산에 올 일이 없을 거라는 얘기였다. 나의 한국100명산 등반은 이제 2개를 남겨 놓고 있는데 그것은 남부의 홍도깃대봉과 순천 조계산이다.
서울로 오면서 이제는 네비게이션에 의지하지 않고 바로 가평으로 나와서 예전 경춘도로를 타고 서울로 달린다. 우리는 형철의 집이 있는 공릉동으로 와서 밤 12시가 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이름이 있다는 <소문난 멸치국수>집에 가서 맛있는 국수를 먹었다. 우리 고장에서는 잔치국수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멸치국수라고 하였다. 하루 산행이었지만 서로 간에 좋은 추억 거리를 만들었던 형철과 헤어져 우리는 공릉역 부근의 어느 모텔에 든다. 이 근처에 있는 원자력병원에서 투병하는 조재춘 형의 병 문안을 위해서 이 근처에 머무르는 것이다. 조재춘 형은 나와 같이 산에 다니던 형이다. 60이 되어 산에 입문하여 산을 즐기는 호방한 형은 늘 나에게......"雨原 덕분에 새로운 삶을 알았어. 이제 이 새로운 삶이 너무 즐거워. 고마워. 이제 나도 공룡능선 갔다 왔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겠지?"........했다. 그러던 형이 갑자기 임파선 말기암으로 쓰러졌던 것이다. 나의 서울 방문에는 늘 형의 병 문안이 스케줄에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