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는 항주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유명한 미인 서시(西施)를 기념하는 의미로 '서자호(西子湖)'라고도 불린다.
서호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호수에는 소영주, 호심정, 완공돈 등 3개의 섬이 떠있다. 호수의 총 면적은 60.8㎢이며, 그 중 수역의 면적은 5.66㎢이다. 서호는 안개가 끼었을 때나, 달 밝은 밤 또는 일출 때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서호 안과 근처에 위치한 유명한 명소 10가지를 서호 10경(西湖 10景)이라 부르는데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단교잔설(斷橋殘雪), 평호추월(平湖秋月), 소제춘요(蘇堤春曜), 곡원풍하(曲院風荷), 화항관어(花港觀魚)등 이다.
▶ 단교잔설 : 중국의 오래된 신화고사인 백사전(白蛇傳)에서 백소정과 허선이 만난 무대가 된 곳으로 옛날에는 다리 중간에 문이 서있었다고 한다. 문 위에는 처마가 얹혀있었는데 눈이내리면 눈이 처마위로 쌓여 멀리서 바라보면 눈 쌓인 다리가 문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것 같이 보여 단교(斷橋)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 평호추월 : 넓이 400평방미터의 정원으로 호수 수면과 높이가 같아 평호(平湖)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소제춘요 : 소동파가 항주에 지사로 부임했을때 쌓은 둑(제방)으로 사시사철 모두 아름답지만 이름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 봄날 새벽의 경치가 가장 절경이다.
▶ 곡원풍하 : 소제춘요의 북서에 펼쳐진 풍경으로 여름에 연꽃이 피어 특히 아름답다.
▶ 화항관어 : 봄에 모란꽃을 보며 용정차를 마실 수 있는 운치있는 공원으로 누각 등이 세워져 있으며 수많은 모란이 피어있는 목단원(牧丹園)이 유명하다.
항주(杭州)는 중국 7대 고도 중의 하나로 절강성의 성도이며
중국의 동남 연해에 위치한다.
인구 387만, 물고기도 그 미모에 놀라 해염 치는 것을 잊어 가라앉았다는
오월상쟁 시대의 미인 서시(西施), 삼국지의 오나라를 세운 손권(孫權),
시성(詩聖) 백거이(白居易) 등이 이곳 항주(杭州) 출신이다.
5대의 오월국과 남송 왕조 14명의 황제가 237년 동안
이곳 항주(杭州)를 도읍으로 하였던 국가적인 역사문화의 도시이다.
4천여 년 전부터 고대문화가 일어나 춘추시대에는 월(越)나라의 수도였고
후에 남송(南宋)의 수도가 된 역사 깊은 곳이다.
수나라 때 비로소 배 만들기에 좋은 나무가 많이 나는 항구라는 의미로
항주(杭州)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나 서시빈목(西施嚬目)과 같은 고사는
모두 오(吳)나라와 월(越)나라가 이 지역에서 자웅을 결하고 있을 때 나온 말이다.
항주(杭州)는 북경에서 항주까지 수로를 낸 경항대운하(京抗大運河)의 끝자락인데
전당강(錢塘江)이 이 대운하에 물을 보탠다.
북경에서 시작하여 항주(杭州)까지 길이 1,794㎞,
허베이성(河北省), 산둥성(山東省), 장쑤성(江蘇省), 저장성(浙江省) 등
4개 성(省)을 가로 지르며
해하, 황하, 회하, 장강, 전당강의 5개 수계를 연결하고 있는 경항대운하(京抗大運河).
땅을 파고 산을 깎아 세계 최초, 최장의 인공 젖줄을 만들어
텐진(天津),양저우(揚州),우시(无錫),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의
상업과 농업을 살찌우고 동양의 베네치아를 만들어 지상 낙원을 꿈꾸었던
그들은 정녕 누구였단 말인가?
운하의 역사는 기원전 484년 오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인공으로 수로를 파서 장강과 연결한 것이 시작인데
7세기 수나라 때 1차 확장공사를 하였으며
13세기 원나라 때 2차 확장 건설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15세기 말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을 남긴 최부가
경항대운하를 처음 구경하였다고 자신의 여행기에 썼다.
최부는 1487년 9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임명되어 제주에 파견되었다가
다음해 1월 부친상을 당하여 나주로 돌아오던 중
초란도(草蘭島) 해안에서 풍랑을 만나 14일간 표류한 끝에
명나라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도착했는데
왜구로 오인되어 살해될 뻔 했으나 야음을 틈타 관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여 베이징[北京]으로 호송되었다가 5개월 만에 귀국했다.
귀국 직후 성종의 명을 받아 그동안의 견문을 일기 형식의〈금남표해록 錦南漂海錄〉 3권으로 남겼다. 여기 경항대운하(京抗大運河)를 본 소감이 적혀 있는 것이다.
전당강(錢塘江) 북쪽 언덕 월륜산(月輪山)에
전당강(錢塘江)의 물결을 잠재우기 위한 육화탑(六和搭)이 서 있다.
970년에 세워진 위풍당당한 육화탑(六和搭)은 밖에서 보면 13층인데 실제는 7층으로 높이 59.89m. 나선형 계단을 타고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전당강(錢塘江)은 물론 강을 가로 지르는 길이 1,453m의 전당강(錢塘江) 대교가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처음 이 다리의 필요성이 인정되어 다리를 건설하고자 했을 때
난공사가 예상됨으로 저명한 외국의 토목기사와 건축기사를 초빙하여 다리 건설을 맡겼으나 전당강(錢塘江) 바닥이 모래층이어서 다리를 놓을 수 없다며 되돌아갔는데 어쩔 수 없이 순전한 중국인의 지혜를 모아 이 다리를 건설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다리는 중국인의 자존심과 기술력의 상징이 되었고
국보로 정해져 보수 유지는 물론 다리 양쪽에 경계병이 보초를 서며 보호하고 있었다.
'하늘에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蘇州), 항주(杭州) 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고
극찬한 것은 13세기 말 17년 동안이나 중국을 여행하였던
베네치아의 상인이며 교황특사였던 마르코 폴로가 한 말이다.
마르코 폴로는 특히 원나라 세조의 명을 받아
몽골족이 정복한 인구 밀집 지역과 '킨사이'(지금의 항저우[杭州])를 돌아보고
그의 동방견문록에 열정적으로 묘사하였는데
소주를 ‘동방의 베네치아’라고 표현한 것도 그였다.
마르코 폴로가 방문하였던 13세기 말에
90여만 명에 이르는 인구를 포용하여 번화한 시가지를 이루고
10개의 시장에 여러 종류의 상점, 음식점, 극장이 줄줄이 섰다.
떠돌이 연예인, 이국인의 발길도 잦아서
그 번화함이 원(元)이 점령한 뒤에도 수그러지지 않았다고 하니
아마도 그 당시에는 세계 최대, 최고 도시 중의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도 '중국 사람들 최대의 소망은
소주에서 태어나 항주(杭州)에서 용정차를 마시며
광동성의 음식을 먹다가 유주의 나무로 짠 관에 들어 생을 마치는 것'이라니
항주(杭州)는 중국인의 마음속에 영원한 피안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어떤 시인도 항주(杭州)를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오는 날에도 좋다"고
단순 명쾌하게 말하고 있다.
항주(杭州)에 서호(西湖)가 없다면 항주(杭州)에 갈 이유가 없다고 할 정도로
서호(西湖)는 항주에서 가장 아름답고 볼 만한 곳이다.
다른 곳은 다 명성에 비해 실망하더라도
서호(西湖)만큼은 명불허전(名不虛傳), 그 아름다움에 취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예부터 중국인들도 이 서호의 풍광을 아껴 서호(西湖)를 본떠 서태후는 북경에 이화원을 짓고 황산의 당모는 효자호(孝子湖)를 팠다고 한다.
서호(西湖)는 항주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면적 6.38㎢, 둘레 15㎞, 평균 수심은 1.5m이며, 깊은 곳은 2.8m정도 된다. 일 년에 한 번 호수의 물을 가는데 물갈이에 33일이 걸린다. 전당강(錢塘江)에서 물을 끌어 들이고 빠지는 물은 경항대운하(京抗大運河)로 흘려보낸다.
호수를 둘러싼 풍경지구의 총면적이 호수 면적의 10배 정도인 60㎢,
여기 세상의 온갖 기화이초가 철마다 다투어 꽃을 피운다.
봄이면 매화가 피면서 온갖 나무에 연록빛 신록이 물들고
여름이면 모란, 석남화(石楠花), 만수국(萬壽菊), 백일초(百日草)와
더불어 호면을 덮는 백련(白蓮), 홍련(紅蓮)이 만개한다.
가을은 가을대로 물푸레나무 향기가 은은하게 호면에 흐르고 난과 국화가 핀다.
흰 눈이 내리는 겨울에도 꽃은 끊이지 않아 청초한 동백꽃을 볼 수 있단다.
중국의 호수치고는 별로 크지는 않지만 그 아름다움이 빼어나서
호수의 3면을 둘러싼 주변의 풍광이
어느 것 하나 빼 놓을 수 없고 더할 수도 없다.
아귀가 참 딱 들어맞는 풍경이다.
호수의 잔잔한 물과 꽃과 나무,
호수에 노니는 물고기,
호수를 지근거리에서 감싸 안은 꽃과 나무들,
호수의 배경이 되어 나앉은 야트막한 산과
그 산위에 세워진 정자와 누각, 사원과 탑,
그마다 사연과 전설이 달리 있다.
춘하추동 계절을 장식하는 꽃과 나무,
아침과 저녁, 비오는 날과 개인 날이
서로 다른 표정으로, 각각 다른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매료시킨다.
서호(西湖)는 많은 문인 묵객(文人墨客)들이 사랑한 곳으로
특히 백낙천(白樂天), 소동파(蘇東坡)가 즐겨 시를 읊었던 곳이다.
특히 송나라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는 서호(西湖)를
월나라의 미인 서시(西施)에 비유해서 서자호(西子湖)라고 불렀다.
양귀비와 함께 중국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는 서시(西施)가
항주(杭州)의 미인이라는 데서 서호(西湖)를 서시(西施)에 비긴 것이다.
서호(西湖)는 본래 타원형으로 지금보다 작았는데
백거이(白居易)가 항주자사로 와서 백제(白堤)라고 명명 된 제방을 쌓았고
뒤에 소동파(蘇東坡)가 1089년 항주지주사로 와서
대대적으로 준설하고 제방을 쌓아 스스로 소제(蘇堤)라고 이름 붙였는데
호수 면을 가르는 백제(白堤)와 소제(蘇堤)라는 이 두 제방이
서호(西湖)를 외호(外湖), 내서호(內西湖), 악호(岳湖), 서리호(西里湖),
소남호(小南湖)로 나누고 있다.
중국인들은 서호(西湖)의 아름다움을 10가지로 골라 꼽고
이를 서호 10경((西湖 十景)이라고 한다.
백락천(白樂天)이 항주자사로 있으면서 쌓은 제방
백제(白堤)의 양쪽에 버드나무를 심었는데
올올이 가늘게 늘어진 버들개지가 미풍에 흔들리며 푸른 호수를 수놓는다.
겨울이면 호수의 수온이 지면보다 높아 둑 가운데부터 눈이 녹는데
마치 다리가 끊어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단교잔설(斷橋殘雪)이라 한다.
백제(白堤) 서쪽 끝에 '평호추월(平湖秋月)'이라는 비석이 있는데
당나라 때에는 이곳에 '망호정(望湖亭)'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며
명나라 때에는 여기 용왕사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호수 면과 높이가 거의 같은 조망대로 만들어 달을 구경하기에 좋은데
이를 평호추월(平湖秋月)이라고 한다.
서북쪽 비정(飛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연꽃 향기 그윽한 곡원풍하(曲院風荷),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만든 제방에 봄이면 복사꽃이 붉고 버들이 푸른 소제춘효(蘇堤春曉),
5백여 포기의 모란과 2백 종 1만 5천 그루의 꽃에 둘러싸인 홍어지(紅魚池),
거기서 노는 분홍빛 잉어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나타낸 화항관어(花港觀魚),
서호(西湖)의 동남쪽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꾀꼬리 소리 고운 유랑문앵(柳浪聞鶯),
호수 서남쪽에 있는 남고봉(南高峰)과
서북쪽에 있는 북고봉(北高峰)이 산수화처럼 운치가 있는 쌍봉운(雙峰雲),
지금은 종이 없어서 들을 수 없지만
정자사(淨慈寺)와 영은사(靈隱寺)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의 운치, 남병만종(南屛晩鐘),
뇌봉산(雷峰山) 꼭대기 뇌봉탑(雷峰塔)의 석양, 뇌봉석조(雷峰夕照).
이곳 소제(蘇堤) 남쪽 화항지 부근의 부두에서 유람선을 탄다.
유람선은 천천히 호수를 가로질러 달린다.
호수를 보호하기 위하여 기름을 쓰지 않고
충전기를 이용하여 배가 가니 배는 유리바닥을 굴러가는 공처럼 미끈하게 달린다.
서호(西湖)에는 호심정, 완공돈(阮公墩), 소영주(小瀛洲) 등 세 개의 섬이 있는데
그 가운데 소영주가 제일 크고 왕공돈이 가장 작은 섬이며
제일 먼저 인공으로 조성된 섬이 호심정이라고 한다.
이 아담한 작은 섬 호심정에는
호심정, 명추정(明秋亭), 진로정(振鷺亭)이라는 세 개의 정자가 있다.
청나라 건륭 황제가 밤에 서호에서 유람하다가
호심정에 올라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감흥이 일어
'충이(?二)' 두 글자를 남긴 비석이 있다.
주련에 이런 시 한 구절이 있다.
세상과 동떨어진 성난 조수 아침 해를 삼키고
정자 멀리 푸른 물은 청산을 껴안았네.
隔市怒潮呑旭日 : 격시노조탄욱일
遠亭綠水拱靑山 : 원정록수공청산
서호(西湖)에 있는 세 개의 섬 중에 가장 큰 섬이 소영주인데
호수 가운데 섬이 있고 섬 가운데 다시 호수가 있다고 하여
소영주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소영주 앞에 삼담인월(三潭印月)이 있다.
일찍이 소동파(蘇東坡)가 서호(西湖)를 정비하면서
서호(西湖) 안에 만든 인공 섬 소영주 남쪽에
서호(西湖)의 수표석(水標石)으로 높이 2m의 석탑 3개를 세우고
석탑마다 5개의 둥근 등창을 내어 불을 밝혔다.
안개가 많아 달구경이 어려운 항주 백성들은
이 석탑 등창에 밝힌 불빛을 달로 알고 위안을 삼았다.
원나라 때에 훼손된 것을 다시 명나라 때 중건했다고 하는데
'아심상인정(我心相印亭)'이란 정자 앞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참으로 소동파(蘇東坡)다운 발상이요 그 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석탑의 등창 불 그림자가 물에 비치니
달은 그 곱절이 된다는데 이를 삼담인월(三潭印月)이라고 한다.
호수에 비친 달빛은 시인을 취하게 하고,
범인(凡人)을 취하게 하고,
남녀(男女)를 취하게 했으리라.
그들의 인생도 취하게 했으리라.
그래서 호수에 뛰어든 사람이 이태백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푸른 대나무 숲길이 좋은 죽경통유(竹徑通幽)를 지나자니,
백제(白堤)를 만든 백락천(白樂天)의 시가 떠오른다.
山僧對碁坐 : 산승대기좌 : 스님이 앉아 바둑을 두는데
局上竹陰淸 : 국상죽음청 : 바둑판 위 대나무 그늘 시원하네.
映竹無人見 : 영죽무인견 : 대 그늘에 사람은 아니 보이고
只聞下子聲 : 지문하자호 : 바둑돌 놓는 소리만 똑 똑.
서호 10경((西湖 十景)을 돌아보자니 신선이 된 듯 하다.
배에서 내려 소제(蘇堤)를 걸어 나오면 소동파(蘇東坡)가 나는 아니 보고 도포자락을 날리며 하늘만 보고 있다. 통 돌을 깎아 전신상으로 조각 했는데 그 기법이 여간 아닐 뿐 아니라 표정 또한 정답기 그지없다.
할아버지를 오랜만에 뵙는 듯하다.
2. 소동파(蘇東坡)
당송팔대가에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더불어
그 첫머리에 이름을 올린 대문호.
서정적인 당시(唐詩)를 철학적 요소가 짙은 새로운 시경(詩境)으로 개척하고
사(詞)를 시(詩)의 품격으로 승화한 위대한 작가.
문방사우에 식견이 탁월하고 서예 이론에 밝은 송 대 제일의 서예가.
시문서화(詩文書畵) 등에 훌륭한 작품을 남기고
서화 제발의 효시를 마련한 창조적인 예술가.
가위 전통 문인의 인물상을 완전히 구현한 일등 군자.
힘없는 백성의 친구요 어버이로 황권에 맛 섰던 올곧은 인도주의자.
‘동파육’을 개발한 요리가이며 주선의 경지에 든 시음가로 어쩔 수 없는 낙천주의자.
불교와 가깝고 요가를 수행하며 유도를 숭상하던 정치가.
동생 소철과 함께 한 날 과거에 급제 했지만 벼슬 운은 동생만 못했던지
정승에 오른 동생보다 한 품계 낮은 예부상서에 머문 사람.
생가 터에 사당이 세워져 삼소(三蘇)부자 함께 제향 받고
그가 사랑하던 서호(西湖) 가에 석상(石像)이 되어
지금도 도포자락을 날리며 달을 보고 있는 사람.
우리로서는 괘씸하다 아니할 수 없으나
송나라의 대신으로는 국익을 위하여 어쩔 수 없었던 ‘고려 배척론자’
좌담(座談)을 잘하고 유머를 좋아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던 탈랜트.
한마디로 빼어난 팔방미인 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인물.
정적이었던 왕안석마저도
“몇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사람”이라고 극찬 하였던 인물.
오죽하면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아버지가
소식, 소철 형제가 부러워 그 이름을 따서
자식들의 이름을 부식, 부철이라 했을까!
그의 본명은 소식(蘇軾), 자는 자첨(子瞻).
소순(蘇洵)의 큰 아들이며 소철(蘇轍)의 형으로 대소(大蘇)라고도 불리었다.
당의 한유, 유종원,
송의 구양수, 소순, 소식, 소철, 증공, 왕안석 등 8명의 산문 작가를
당송 8대가라고 하는데
한 집안의 삼부자가 다 여기에 포함 되니 실로 고금에 유일한 일이다.
한유·유종원은 육조 이후 산문의 내용이 화려한 사륙 변려체의 문장에서
진한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
유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간결하며 뜻의 전달을 지향하는 새로운 산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소위 고문운동인데
이 운동은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지만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점차 기세가 약해졌다.
그것은 새로운 표현과 착상의 연구가 뜻의 전달성을 희박하게 하고,
도덕 지향적인 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도학 냄새가 짙은 것이 원인이었다.
그 반동으로 당 말기에서 5대에 걸쳐 육조식 탐미적 산문이 부활하였고,
북송의 전성기가 되자 구양수가 한유의 문집을 규범으로 하여,
알기 쉽고 유창한 산문을 만드는 혁신 운동에 앞장서,
이 운동으로부터 소순, 소식, 소철, 증공, 왕안석 등 우수한 문학자가 배출되었던 것이다.
소동파(蘇東坡)는 1036년 북송 인종(仁宗) 3년 12월 19일
쓰촨 성(四川省) 메이산[眉山) 사곡행에서 느릅나무집 아들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에 심취하였다.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이 두 아들을 데리고 상경하여
이들의 시를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고 격찬을 받았는데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때 과거시험의 위원장이었던 구양수(歐陽修)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후원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듬 해 예부의 과거시험에 형제가 나란히 합격하였으나
어머니 정씨의 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가 복상을 마치고
1060년 관리를 뽑는 제과(制科)에 다시 형제가 나란히 급제하였다.
이후 대리평사봉사부첨판이 되어 수도에 남게 된 아우와 헤어져
벼슬살이를 하게 된 동파는 직사관, 판관고원이 되었으나
당시의 황제 신종(神宗)이
부국강병으로 외침을 막고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왕안석(王安石)의 변법(變法)을 채택함으로
소동파(蘇東坡)는 구양수 사마광 등과 더불어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문치주의인 구법(舊法)을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이 일로 왕안석의 미움을 사 밀주지사, 하중부지사, 서주지사, 호주지사 등
지방관으로 전전하거나 중국 각지를 떠돌면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서주지사 시절 1065년 첫 부인 왕씨와 사별하였다.
지방 관리를 지내면서 도처에 그는 족적을 남긴 바 있는데,
특히 항주(杭州)에서 재직하던 시절
수초에 덮이고 메몰 되어 가던 타원형의 서호(西湖)를 준설 확장하고 제방을 쌓아
그 제방을 자기 이름을 따 소파(蘇坡)라 이름 지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소식(蘇軾)은 여러 차례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고려와의 외교 관계가 아무런 이익이 없으니 고려 사신이 송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자고 주장한
고려 배척론자(高麗 排拓論者)이기도 하였다.
그의 고려 5해론은 소식(蘇軾)이 고려를 배척하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첫 번째 해(害)는 고려가 가져오는 공물은 보고 즐기기는 좋으나 무용지물인데
그들에게 내리는 사여품은 백성의 고혈을 흘려서 거둔 것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해는 사신들이 다다르는 곳마다 통행과 장사를 교란시키며
정관(亭館)을 수리하고 장식하는데 백성들을 징발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해는 고려가 송으로부터 받아가는 사여품의 일부가
거란(契丹)에 흘러 들어가 결국 거란을 돕게 된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고려는 의를 사모한다고 하지만 속마음은 실리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고
거란(契丹)에 의해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고려 사신들이 다다르는 곳마다 지형을 그리면서 허실을 엿보고 있으니
주의해야 하는 점을 들고 있다.
다섯 번째 해는 거란(契丹)과 동맹을 맺은 고려와 사신왕래를 하는 것에 대해
거란(契丹)이 트집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거란(契丹)과의 사이가 벌어지면 좋지 않으니 그것이 해라고 하였다.
이렇게 동파(東坡) 소식(蘇軾)은 고려가 거란(契丹)과 동맹을 맺고 있기 때문에
송의 정보를 거란(契丹)에 빼돌릴 수 있는 점을 주로 들어
고려의 사신이 송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소식(蘇軾)은 송의 연호를 쓰지 않고 갑자만을 표기했다는 이유로
고려의 서신을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려 배척론은 소식(蘇軾)만이 아니라 당시 구법당(舊法黨)의 대부분 관료들이
고려와 송과의 관계에 대해 많은 우려하던 점이었다.
송나라가 주변 국가인 서하(西夏)와 요의 강성으로 끊임없이 침입에 시달리고
거란(契丹)과는 1004년 전연(?淵)의 맹약을 맺었으며
서하(西夏)에 대해서는 많은 양의 세폐(歲幣)를 지불하고 있으므로
고려와의 관계를 통한 송의 정보 유출을 두려워하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1079년 그의 나이 44세 때
천성이 자유인이었고 기질적으로도 신법을 싫어하였던 소식은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일이 재앙을 불러 사상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서울로 호송되어
어사대(御史臺)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는 황제에 대한 항명이며 불경죄로 사형에 처해질 일이었으나
아우 소철이 관직을 대속으로 내어놓고 탄원하여
유배로 감형 받아 심한 취조를 받은 뒤에 후베이성[湖北省]의 황주(黃州)로 유배되었다.
이 기간 중 ‘동파육’을 개발하고 1082년 7월 그의 대표작 ‘전적벽부’를 썼다.
적벽부(赤壁賦)가 유명한 까닭은
사물의 서술을 중심으로 한 한 대(漢代)의 장려한 작품에서부터
육조(六朝), 당(唐)시대의 형식적인 소형 작품으로 쇠퇴한 ‘부’의 장르를
생동하는 묘사로,
서정과 사상을 겸비한 문장으로 부활, 완성시킨 작품이기 때문이다.
부(賦)는 시와 산문이 혼합된 한문체의 하나로 글귀 끝에 운을 달고
대(對)를 맞추어 짓는데
때로는 '감상을 느낀 그대로 읊은 글'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3. 적벽부(赤壁賦)
적벽부(赤壁賦는 송나라 원풍3년(1080년) 오대시안(烏臺詩案)이란 필화사건으로
소동파(蘇東坡)가 조정의 비리를 풍자한 혐의를 받아 황주 호북성 단련부사로 좌천되어가자
원풍(元豊) 5年에 그를 위로 차 방문한 무도산(武都山)의 도사(道士) 양세창(楊世昌)과 함께
울적한 심기를 달래느라 황저우성 밖 적비기(赤鼻磯) 벼랑 아래 배를 띄우고
조조의 <횡삭부시>를 연상하며 주흥에 젖었었는데 그 때의 감회를 쓴 것이다.
그 해 겨울 다시 곽구, 고경도와 함께 놀 때에도 지었는데 먼저 것은 전적벽부, 뒤의 것을 후적벽부라 한다.
적벽부는 중국 부문학사상(中國賦文學史上) 최고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적벽부(赤壁賦) / 소식(蘇軾)
壬戌之秋 : 임술지추 : 임술년 가을
七月旣望 : 칠월기망 : 7월 음력 16일 밤. 망월(望月)이 지난 다음 날
蘇子與客 泛舟遊於赤壁之下 : 소자여객 범주유어적벽지하 : 객과 더불어 배를 띄워
적벽 아래 노니는데,
淸風徐來 : 청풍서래 : 맑은 바람은 천천히 불어오고
水波不興 : 수파불흥 : 물결은 잔잔하구나 .
擧舟屬客 : 거주촉객 : 술을 들어 객에게 권하며
誦明月之詩歌窈窕之章 : 송명월지시가요조지장 : ('시경(詩經)'의 '진풍 월출편(陣風 月出篇)'에 나오는)
"달이 떠 환하게 비치니 아름다운 임의 얼굴 떠오르네 .
아리따운 그대여, 마음의 시름 어이하리"라는 시 구절과
(詩經 國風 周南에 있는 관저편(關雎篇)) 부녀자의 행실이 아리따움을 노래 부르니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 소언월출어동산지상 : 이윽고 동산에 달이 올라
徘徊於斗牛之間 : 배회어두우지간 : 북두성(北斗星)과 견우성(牽牛星) 사이를 배회하네.
白露橫江 : 백로횡강 : 흰 이슬은 강에 비껴 있고,
水光接天 : 수광접천 : 물빛은 하늘에까지 뻗쳐 있구나.
縱一葦之所如 : 종일위지소여 : 갈대 같은 배 저 가는대로 맡겨 두니
凌萬頃之茫然 : 능만경지망연 : 일만 이랑의 아득한 물결을 헤쳐노니네.
浩浩乎 如憑虛御風 : 호호호 여빙허어풍 : 넓고도 넓구나! 푸른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타고
而不知其所止 : 이부지기소지 : 그칠 줄 몰라 하네.
飄飄乎 如遺世獨立 :표표호 여유세독립 : 두둥실 떠올라 속세를 버린 채
羽化而登仙 : 우화이등선 : 신선(神仙)이 되어 선계에 오르는 듯 하구나.
於是 飮酒樂甚 : 어시 음주락심 : 이에 술을 마시고 흥취가 도도해서
?舷而歌之 歌曰 : 구현이가지 가왈 :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네.
桂棹兮蘭? : 계도혜난장 : "계수나무 노와 목란(木蘭) 돛대로
擊空明兮?流光 : 격공명혜소류광 : 달빛에 물속이 다 훤한 물길로 흐르는 달빛을 거슬러 오르노니
渺渺兮予懷 : 묘묘혜여회 : 아득하고 먼 내 마음이여
望美人兮天一方 : 망미인혜천일방 : 그리운 님 저 하늘가에 미소 짓누나.
客有吹洞簫者 : 객유취통소자 : 객이 퉁소를 불어
倚歌而和之 : 의가이화지 : 노래를 따라 화답(和答)하네
其聲嗚嗚然 : 기성오오연 : 그 소리 실같이 가늘고도 길게 이어지며
如怨如慕 如泣如訴 : 여원여모 여읍여소 :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눈물짓는 듯 하소연하는 듯
餘音?? :여음요요 : 그 남은 소리 구슬프구나.
不絶如縷 : 부절여루 : 끊어질 줄 몰라
舞幽壑之潛蚊 : 무유학지잠문 : 깊은 골짜기 물에 숨은 교룡(蛟龍)이 춤추는 듯
泣孤舟之釐婦 : 읍고주지리부 : 외로운 과부가 흐느끼는 듯
蘇者楸然正襟 : 소자추연정금 : 감상에 젖은 내 낯빛을 고쳐 바로하고
危坐而問客曰 : 위좌이문객왈 : 옷깃을 여민 채 바로 앉아 객에게 묻되
何爲其然也 : 하위기연야 : "어찌 이리 슬픈 곡조인가 ? " 하니,
客曰 : 객왈 : 객이 말하기를
月明星稀 : 월명성희 : '달은 밝고 별은 성긴데
烏鵲南飛 : 오작남비 :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니
此非曹孟德之詩乎 : 차비조맹덕지시호 : 기백 좋던 조조의 시 한 수가 생각나오.
西望夏口 東望武昌 : 서망하구동망무창 : 동서로 바라보니 하구(夏口) 와 무창(武昌)이요
山川上繆 鬱乎蒼蒼 : 산천상무 울호창창 : 산천이 서로 빽빽이 얽혀 푸르니
此非孟德之困於周郞者乎 : 차비맹덕지곤어주랑자호 : 여기가 바로 조조가 주유에게
곤욕(困辱)을 치른 적벽이 아닌가 ?
方其破荊州 下江陵 : 방기파형주하강릉 : 바야흐로 형주(荊州)를 깨뜨리고 강릉(江陵)으로 내려갈 때
順流於東也 ??千里 旌旗蔽空 : 순류어동야 축로천리 정기폐공 : 강물을 따라 동으로
군단의 함선들은 천 리에 이어지며 깃발은 하늘을 가리었었다.
詩酒臨江 橫?賦詩 : 시주임강 횡삭부시 :창을 뉘어놓고 강가에서 술을 따르며 시를 읊을 적에
固一世之雄也 而今安在哉 고일세지웅야 이금안재재 : 진실로 일세(一世)의 영웅이었건만
이제는 편안히 잠든 신세로다
況吾與子 漁樵於江渚之上 : 황오여자 어초어강저지상 : 하물며 그대와 나는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하며
侶魚蝦而友?鹿 여어하이우미록 : 물고기와 새우를 짝하고 고라니와 사슴을 벗하는 범부의 신세임에랴.
賀一葉之扁舟 : 하일엽지편주 : 한 뼘 좁은 배를 타고서
擧匏樽而相屬 : 거포준이상촉 : 울울한 장부 뜻을 술잔에 실어 서로 권하며,
寄??於天地 : 기부유어천지 : 하루살이 삶을 천지에 부치니
渺滄海之一粟 : 모창해지일속 : 아득히 넓은 바다에 떠 있는 좁쌀 알 같구나.
哀吾生之須臾 : 애오생지수유 : 슬프다! 우리 인생 잠깐이니
長江之無窮 挾飛仙-遊 : 장강지무궁 협비선오유 : 무궁한 천리장강처럼,
하늘을 나는 신선을 옆에 끼고 마음껏 노닐며,
抱明月而長終 : 포명월이장종 : 밝은 달을 품어 안고 길이 살고 싶지만
知不可乎驟得 : 지부가호취득 : 얻지 못할 줄을 내 알고 슬퍼하노니.
託遺響於悲風 : 탁유향어비풍 : 가슴에 쌓인 소리 가을바람에 부치노라!”
蘇者曰 客亦知夫水與月乎 : 소자왈 객역지부수여월호 : 내가 말하기를
"객도 저 물과 달이 다르지 않음을 아는가 ?
逝者如斯 而未嘗往也 : 서자여사 이미상왕야 : 흐르는 물 간다 한들 쉼이 없고
盈虛者如彼 而卒莫消長也 : 영허자여피 이졸막소장야 : 찼다 기움이 저와 같아 스러지다, 길다고는
말 할 수 없으리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 能以一瞬 : 개장자기변자이관지 칙천지증불 능이일순 :
덧없다 생각하면 천지가 한 순간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 : 자기불변자이관지 즉물여아개무진야 : 변함없다 생각하면
만물과 내가 함께 하여 다함이란 없도다.
而又何羨乎 : 이우하이호 : 이에 더 무엇을 부러워 하리요?
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 차부천지지간 물각유주 : 또, 저 천지 사이에 사물마다 제각기 주인이 있으니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 구비오지소유 수일호이막취 : 나의 소유가 아니면 한 터럭이라도
취하지 말 것이나,
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 而得之而爲聲 : 유강상지청풍 여산간지명월 이득지이위성 :
강상청풍과 산간명월은 귀로 들어 소리 짓고
目遇之而成色 : 목우지이성색 : 눈에 비치어 모양을 이루니
取之無禁 用之不竭 : 취지무금 용지불갈 : 금할 이 없고 다함이 없으며
是造物者之無盡藏也 : 시조물자지무진장야 : 조물주의 무궁조화 다함이 없도다,
而吾與者之所共樂 : 이오여자지공락 : 나와 그대 함께 즐겨 누릴 바니 무엇이 서러워 탄식하랴.
客喜而笑 洗盞更酌 : 객희이소 세잔갱작 : 객이 기뻐 웃으며 잔을 씻어 다시 술잔을 기울이니
肴核旣盡 : 효핵기진 : 안주가 다하고
杯盤狼藉相與 枕籍乎舟中 : 배반낭자상여 침적호주중 : 잔과 쟁반이 어지럽게 널부러져
배 안에서 서로 팔을 베고 누우니
不知東方之旣白 : 부지동방지기백 : 동녘 하늘이 밝아 오는 줄도 몰랐더라
4. 동파육
소동파를 거론하면서 ‘동파육(東坡肉)’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서호(西湖) 주변엔 딱 한 군데 누외루(樓外樓) 밖에는 음식점이 없는데
이곳은 아주 유명한 음식점이고 값도 제법 비싸다고 한다.
위치는바로 서호(西湖) 소제(蘇堤) 입구 맞은 편 산언덕의 푸른 기와지붕 집이다
누외루(樓外樓)는 과연 유명 음식점답게 전망과 시설이 좋고
지구상의 각종 인종이 고루 다 모여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는데
보통은 1시간 정도나 기다려야 동파육(東坡肉)을 맛 볼 수 있다고 한다.
소동파가 유배당했던 호북성 황주에서는
돼지고기 값이 무척 싸서 소동파가 평소 즐겨 먹었다.
즐겨 먹기는 먹어도 하루 이틀이지
유배 중이라 여러 사정이 여의치 않아 감수할 뿐이지
소동파라고 왜 새로운 입맛을 추구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돼지고기를 이용한 새로운 요리법을 개발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곧 동파육(東坡肉)이 생겨난 계기가 된다.
이 요리는 질 좋은 돼지 삼겹살을 물을 넣지 않고
대신 소흥의 명주를 넣고 사기로 만든 솥 안에 넣어 덮개를 꼭 덮은 다음
약한 불로 오래오래 삶아서 조려 만든 것이다.
붉은 색갈이 나고 그 즙 맛이 있으며 고기는 아주 잘 익어 부드럽다.
주자지(周紫芝)가 쓴 《동파시화(東坡詩話)》에
소동파가 돼지고기를 먹고 나서
장난삼아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黃州의 맛 좋은 돼지고기 / 값은 진흙처럼 싸지만/ 부자는 거들떠보지 않고 /
가난한 이는 어찌 요리할 줄을 모르네 / 적은 물에 돼지고기를 넣고 /
약한 불로 충분히 삶으니 / 그 맛 비길 데 없어 / 아침마다 배불리 먹네 /
누가 이 맛을 어찌 알겠는가!
그런데 ‘동파육’이 호북성 황주가 아니라
절강성 항주의 명물 요리로 알려지게 된 것은 다 까닭이 있다.
철종의 즉위로 구법파(舊法派)가 득세하자
소동파는 귀양에서 풀려나 항주 태수로 부임하여
폐허가 된 서호(西湖)를 대대적으로 준설하고 보를 쌓았는데
이에 감격한 백성들이 돼지고기를 보내왔다.
소동파는 이 고기에 자기가 좋아하는 술과 양념을 넣어
자기만의 비법대로 요리하니 기름기가 쏙 빠져 물리지 않고
약 불에 오래 삶은지라 부드러웠다. 이 음식을 백성들에게 대접하니
치아가 없는 노인들도 즐겨 먹을 수 있어 큰 환영을 받았다.
이런 대중적인 호응과 지지를 얻어 비로소 ‘동파육’이 된 것이다.
어찌 되었건 이것이 팔등신 미인이 많고 풍광이 수려한 땅으로 알려진
절강성 항주(杭州)의 명물요리 '동파육'의 유래다.
세상에 불후의 명작과 명저를 남긴 이들 치고
유형을 받지 않은 이가 없고 사사로이 아픔을 겪지 않은 이가 없으니
절대의 체념과 고독이야말로 새로운 신념과 창조의 원류가 아닌가 싶다.
사마천이 그랬고 추사 김정희도 그랬고 다산 정약용이 그랬다.
유는 다르지만 이순신도 그랬고 오늘날의 수많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그렇다.
소동파 또한 유배생활이 없었다면 과연 ‘적벽부’를 남길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인간만사 새옹지마 (人間萬事 塞翁之馬)가 아닐 수 없다.
소동파가 50세가 되던 해 철종(哲宗)이 즉위함과 동시에 구법당이 득세하여
소동파는 항주 태수를 거쳐 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의 대관(大官)을 역임하였다.
황태후(皇太后)의 죽음을 계기로 신법당이 다시 세력을 잡자
그는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섬[海南島]으로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 중,
휘종(徽宗)의 즉위와 함께 귀양살이가 풀려 조봉랑이 되고 다시 등주지사가 되었다.
다시 벼슬이 翰林學士,·병부상서(兵部尙書) 등에 이르렀는데
1101년 7월 28일 66세를 일기로 장쑤성[江蘇省] 상주(常州)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시호(諡號)를 文忠이라 하였다.
저서로는 <東坡全集> 40권, <易傳>, <書傳>, <論語說> 등이 있다.
첫댓글 항주하면 떠오르는 것들 서호 서시 소동파 그리고 서호주변에 비싼 차집과 고급스러운 레스토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