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성 칼럼](33) 제주 올레길 14코스(저지예술정보화마을-한림항) 걷기
저지마을→오시록헌농로→굴렁진숲길→도래낭길→월령선인장군락→금능해수욕장→협재해수욕장→옹포포구→한림항
거리 및 소요시간: 19.9km, 5~6시간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 아침, 202번 버스를 타고 한림환승정류소에서 내렸다. 30여 분을 기다린 뒤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오전 8시 30분경 저지마을에 도착했다.
올레 14코스 시작 인증을 하고 안내센터 직원과 인사도 나눴다. 이곳까지 접근성이 조금 불편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오늘 걸을 길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올레 14코스는 숲길과 농로, 돌담길이 특히 인상적인 코스다. 중간중간 돌길이 이어져 발에 무리가 갈 수 있어 트레킹화나 등산화를 신고 걷기를 권한다. 후반부는 바다와 비양도를 바라보며 걷는 해안길로 이어진다.
옆지기와 서로 “파이팅!”을 외치며 길을 나섰다.
저지예술정보화마을을 지나 저지오름 오른편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한적한 농촌 풍경 속 밭길이 펼쳐진다. 돌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지고, 걷는 마음도 자연스레 풀어진다. 특히 사유지를 내어주어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오시록헌 농로에 들어서면 돌담 너머 초록빛 밭이 시야 가득 펼쳐진다. ‘오시록헌’은 ‘아늑하다’는 뜻의 제주어다. 제주올레에서 밭길의 느낌이 포근하고 편안해 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름처럼 이 길은 참 따뜻하고 아늑했다. 흙냄새와 바람, 새소리가 어우러져 평화로운 풍경을 완성한다.
이어지는 굴렁진 숲길도 인상 깊다. 제주에서는 움푹 파인 지형을 ‘굴렁지다’라고 하는데, 제주올레에서 새롭게 개척하며 ‘굴렁진 숲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폭신한 흙길을 따라 숲을 걷는 기분이 참 좋았다.
숲길을 벗어나 물이 마른 하천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선인장이 가득한 월령리 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울창한 나무숲과 독특한 색깔의 현무암 돌무더기가 어우러져 있고, 특히 선인장이 자생하는 넓은 군락지로 유명하다. 선인장 열매인 백년초는 건강식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월령리 해안으로 향하는 길에는 ‘무명천 진아영 할머니 삶터’가 있다.
1949년 12월, 진아영 할머니는 경찰이 쏜 총에 턱을 맞고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후 55년 동안 무명천으로 턱을 감싼 채 살아야 했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음식도 편히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머니를 ‘무명천 할머니’라고 불렀다. 할머니의 삶은 제주 4·3의 아픔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준다.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슬픈 역사다.
이어지는 월령리 바다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고 잠시 풍경을 바라보며 쉬어간다. 이곳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선인장이 자생하는 월령리 선인장군락지다. 해류를 타고 남방에서 떠밀려온 선인장이 바닷가 모래땅과 바위틈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검은 현무암과 보랏빛 선인장 열매가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월령마을을 지나면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색을 자랑한다는 금능해수욕장과 협재해수욕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금능해수욕장과 협재해수욕장은 올레 14코스의 선물 같은 구간이다. 모래사장을 밟을 때마다 바다가 반짝이며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비양도가 점점 가까워지고, 파도 소리는 마음을 씻어내듯 청량하게 울려 퍼진다. 그 순간 길은 나에게 자유를 선물한다.
코발트빛 바다는 수심도 얕아 아이들과 물놀이를 즐기기 좋아 여름철이면 많은 피서객이 찾는다고 한다. 어린이날인 오늘도 비양도가 지켜보는 모래사장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해지는 섬 비양도(飛揚島)는 화산섬으로, 제주 화산섬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섬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올레 코스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언젠가 별도로 탐방할 계획이라 더욱 기대된다.
길은 협재에서 옹포를 지나 한림항 초입으로 이어진다. 한림항은 비양도로 향하는 배를 탈 수 있는 항구다.
마지막 스탬프를 찍는 순간, 하루의 여정이 완성되었다. 한림항의 바닷바람은 마치 “수고했어요”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나 역시 옆지기에게 조용히 말했다.
“함께라서 더 좋았어. 오늘도 수고했어.”
한림매일시장의 활기찬 소리를 뒤로한 채, 올레꾼의 발걸음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올레 14코스는 비교적 긴 코스지만, 중산간 지역의 돌담길과 밭길, 숲길을 지나 돌이 덮인 해안길과 고운 모래사장길, 정겨운 마을길까지 다양한 풍경을 품고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이 길은 단순히 걷는 길이 아니었다. 자연과 마주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여정이었다. 숲의 고요함과 바다의 청량함이 교차하며 걷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길, 그것이 제주 올레 14코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