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하고 투명한 슬픔을 연주하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이루마. 그 역시 자신의 음악세계를 닮아 정적일 것이라는 섣부른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루마는 다변가에다 아주 활발했다. 사진 촬영 내내 재치 있는 말과 장난기로 좌중을 연신 웃겼고, 하나의 질문을 던지면 그와 연관된 곁가지 질문을 스스로 만들어가며 길게 대답했다. 이루마의 음악과 이루마의 평소 모습, 한마디로 반전이다. 턱수염과 모자, 편하게 걸친 셔츠도 평소 이미지를 확 달라 보이게 했다.
“제 모습이 원래 이래요. 제 음악 때문에 사람들이 선입견을 갖고 계시는 것 같아요. 이루마 하면 점잖고, 피아노 음악처럼 조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에요. 클래식은 제 음악의 일부일 뿐이에요. 하고 싶은 음악이 무척 많았는데, 클래식도 그 하나죠. 얼마 전부터 새로운 시도를 하나 둘 하고 있어요.”
그는 힙합 가수 MC스나이퍼의 곡을 만들어준 데 이어, 지금은 속사포 래퍼 아웃사이더의 곡을 만들고 있다. 피처링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작곡하고 연주도 했다. MC스나이퍼의 경우 그쪽에서 이루마에게 의뢰했고, 아웃사이더는 이루마가 먼저 제안했다. 힙합과 클래식,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조합은 이루마 내면에 부글거리던 폭발적인 끼와 만나면서 새로운 느낌의 음악을 탄생시켰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음악을 쓰고 싶었어요. 잔잔한 음악만 써온 터라 늘 갈증이 있었죠. 이제 그 시기가 온 것 같아요. 다른 가수들을 통해 대리만족하는 방식이에요. 분출하는 음악을 하는 가수들에게 곡을 만들어주고, 내가 만든 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리 만족하는 거죠. 앞으로도 다양한 시도를 할 예정인데, 어쩌면 제 이름이 아닌 가명으로 활동할 수도 있어요.”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하면서 그는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한 면을 발견한다.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 특별 게스트로 출연한 그는 연주 중 일어나서 손을 흔들며 관객에게 몸으로 호응하는가 하면, 무아지경에 빠져 희한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둘 다 전례 없고, 자신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본령은 클래식이라고 못 박는다. “클래식한 면을 계속 유지할 것이고, 피아노 위주의 느낌도 버리지 않을 것”이라며 “클래식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오가며 밸런스를 맞출 예정”이라고 했다. 본격 클래식 협주곡을 작곡해보고 싶다고도 했다.
이루마는 지난 5월 7집 정규앨범 〈기억에 머무르다〉를 냈다. 첫 음반을 발매한 2001년의 기억과 감성으로 되돌아가 그때의 투명과 순수를 담으려 했다. 피아노와 작업 방식도 당시를 재현했다. 1집 때에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쓰다가 2집부터는 야마하를 사용해왔지만 이번 음반을 내면서 다시 스타인웨이로 돌아갔다. 대강의 멜로디만 써놓고 즉흥연주로 완성한 1집 때처럼 이번에도 3일 만에 작곡과 연주, 녹음을 모두 마쳤다. 또 하나, 인위적이지 않은 잔향과 울림을 살리기 위해 콘서트홀 녹음방식을 택했다. 그는 “홀 녹음은 스튜디오 녹음과 달리 편집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담은 크지만 그만큼 자연스러워요. 연주자 입장에서는 당당하죠. 거짓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연주니까요”라고 말했다. 그가 직접 고른 음반 재킷의 색상은 민트(일명 티파니 그린)다.
“기억은 머무르지만 그 기억들이 또 다른 기억을 만들어준다는 밝은 의미를 담고 싶었어요. 아내한테 고백할 때 티파니 반지를 선물했고,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굉장히 좋아했죠.”
그는 한동안 ‘이루마스러운’ 곡을 만들지 못했다. 그의 음악을 관통하는 감미롭고 투명한 슬픔의 원천은 외로움이다. 그는 “영국에 유학 갔을 때에도, 한국에 와서도 혼자였기 때문에 외로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5년 전 미스코리아 출신 아내 손혜임씨와 결혼하고 다섯 살배기 딸 로운이를 두면서 외로움이 없어졌다. 그에게 가족은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대상이다. 앨범에도 아내와 딸의 이니셜을 넣었고, 일명 ‘딸바보’로 소문나 있다. 로운이 손을 잡고 어린이 뮤지컬 〈로보카폴리〉 〈우당탕탕 아이쿠〉를 보러 다니고, 집에 돌아와서는 로운이에게 그 뮤지컬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해준다. 친구도 집 근처에서 만나고, 만난 지 얼마 안 돼 집에 빨리 가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인다. 그의 친구들은 “널 만나면 불안해. 집에 빨리 보내줘야 해서”라고 한단다. 영감의 원천이던 외로움이 사라지자 곡이 안 나왔다. 11년 전 감성을 끄집어낸 것은 이런 이유가 크다.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곡이 너무 안 나왔어요. 그래서 한동안 곡을 안 쓰다가 녹음하는 날 곡을 쓰기로 했죠. 제 앨범 재킷을 찍어주시는 안홍철 작가가 영국에서 찍어 온 풍경 사진을 보면서 곡을 썼어요. 그분의 감성과 느낌을 빌린 거죠. 또 2001년 작업 당시 풍경을 회상하면서 곡을 만들었어요. 시외에 있는 녹음실에 가던 중 정류장을 놓친 기억, 되돌아 걸어오는 길에 보았던 눈, 녹음실에 들어섰을 때의 냄새, 습한 느낌 같은 것들 말이에요.
결혼 후 많은 것이 달라졌어요. 외로움은 사라졌지만 새롭고 다양한 감성이 그 자리를 메워가고 있어요. 평생 순수한 사랑에 대한 음악만 쓸 수는 없잖아요? 식상할 수도 있고. 오히려 다양한 음악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해요.”
영국 퍼셀특수음악학교와 킹스컬리지런던을 졸업한 그는 “작곡가의 곡을 그대로 외워서 치는 게 재미없고 자신도 없어서” 연주가 대신 작곡가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조지 윈스턴같이 대중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던 바람대로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는 작곡가가 됐다. ‘River flows in you’ ‘Kiss the rain’ ‘Maybe’ 등의 곡은 어딜 가도 쉽게 들을 수 있는 명곡으로 자리 잡았다.
이루마는 스스로 “경험주의자” 또는 “리얼리스트”라고 말한다. “직접 겪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곡을 만든다”는 그의 음악세계는 공감대가 넓다. 그 공감대는 외국에까지 뻗쳐 있다. 특히 독일에서 ‘River flows in you’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독일 현지에서 앨범이 발매되고 독일 TV쇼에도 출연했다. 머지않아 프랑스・호주・뉴질랜드・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지에서도 앨범을 발매할 예정이다.
이루마는 이루고 싶은 것이 많다. 2006년 <톱클래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영화도 만들고 싶고, 시나리오도 구상 중이며, 레스토랑도 운영해보고 싶다. 무료 음악스쿨을 열 예정이고, 궁극적으로 문화부장관을 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얘길 꺼내자 “그때는 군대 가기 전이라서 그래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라며 멋쩍게 웃었지만 그는 하나하나 이루는 중이다. ‘병원 콘서트’와 ‘학교 콘서트’를 하며 나눔기부를 실천하고 있고, 유아용품 제조회사 ‘몽드드’의 공동대표로 이름을 올린 사업가이기도 하다.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하는 한편 더 클래식한 음악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는 오케스트라도 조직 중이다. 오는 9월 8일에 있을 ‘파크 콘서트’도 오케스트라와 함께한다. 유키 구라모토, 스티브 바라캇과 함께 올림픽공원에서 열리는 파크 콘서트에서 그는 자신의 곡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해 연주한다.
“파크 콘서트는 피크닉처럼 음식을 먹으면서 공연을 볼 수 있는 편안한 공연이에요. 유키 구라모토와는 여러 번 공연했지만 스티브 바라캇과는 처음이에요. 유키 구라모토는 클래식하고 스티브 바라캇은 팝적인데, 저는 딱 중간 성향이죠. 굉장히 재미있는 공연이 될 것 같아요. 깜짝 게스트도 초대했어요. 새로운 형식의 공연이라 부담도 되고, 기대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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