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프랭클린 자서전]
따지고 반박하는 사람치고 일이 잘 풀리는 사람이 없다
그 해에 보스턴으로 가는 길에 뉴욕에 들렸다가 우리 주의 새 지사로 그때 막 영국에서 도착한 모리스 씨를 만났다. 우리는 그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모리스 지사는 영주들이 보내는 훈령 때문에 끊임없이 문제가 일어나자 더는 견디지 못하고 사임한 해밀턴 씨의 뒤를 이어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의 험난한 앞날이 눈에 보이지 않느냐고 내게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반대로 아주 편할 수도 있습니다. 주의회와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나더러 논쟁을 피하라는 거요? 내가 논쟁을 좋아한다는 걸 당신도 알지 않소? 그건 내 유일한 낙이라오. 그래도 당신의 의견을 존중해서 가능하면 논쟁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요.”
모리스 씨가 논쟁을 좋아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말을 워낙 잘하고 특히 궤변에 능해서 누구와 말싸움을 해도 지는 법이 거의 없었다. 모리스 씨에게 듣기로는, 옛날 그의 아버지는 저녁 식사가 끝나면 아이들을 앉혀놓고 서로 논쟁하게 하는 걸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모리스 씨는 어릴 적부터 논쟁하는 분위기에 익숙했던 것이다. 하지만 논쟁을 즐기는 것은 별로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봤을 때, 꼬치꼬치 따지고 반박해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 사람치고 일이 잘 풀리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하다. 그렇게 해서 승리를 쟁취할 때도 있겠지만 절대 호감을 얻을 수는 없다. 타인의 호의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인데 말이다. 우리는 헤어져 그는 필라델피아로, 나는 보스턴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뉴욕 시에서 주의회의 의사록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걸 보니 모리스 지사가 나와 약속을 했는데도 벌써부터 의회와 한바탕 싸움을 벌인 것 같았다. 싸움은 그가 지사직을 그만둘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도 그 싸움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의회에 돌아가자마자 온갖 위원회에 불려다니며 모리스 지사의 연설과 교서에 답해야 했고, 의원들은 그때마다 내게 초안을 작성하라고 했다. 모리스 지사의 교서나 우리의 대답이나 모두 실랄햇고 때로는 점잖지 못한 욕설이 오가는 때도 있었다. 내가 주의회 편에서 글을 쓴다는 걸 모리스 지사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둘이 만나면 서로 으르렁거릴 거라고 다들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리스 지사가 굉장히 호인이어서 둘이 서로 반대편에 있다고 해도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우리는 가끔 식사도 같이 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양쪽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어느 날 오후 우리는 길에서 만났다. 모리스 지사는 “프랭클린,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저녁 식사나 합시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손님들이 오기로 했어요”라며 내 팔을 잡고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저녁 식사 뒤에 와인을 마시면서 즐겁게 얘기를 나누던 중에 지사는 <돈키호테>에 나오는 산초 판자의 생각을 아주 대단하게 평가한다며 농담처럼 말했다. 산초 판자는 돈키호테가 나라를 하나 주겠다고 약속하자 흑인들의 나라를 달라고 하는데, 국민들과 뜻이 맞지 않으면 팔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옆에 앉아 있던 그의 친구 하나가 내게 말했다.
“프랭클린, 어째서 당신은 늘 그 빌어먹을 퀘이커 교도 편을 드시오? 팔아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소? 영주들이 당신에게 값을 후하게 쳐줄 텐데 마이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사가 그 사람들을 아직 팔아버릴 정도로 검게 만들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사는 교서를 낼 때마다 주의회에 먹칠을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주의회는 먹칠을 당한 즉시 깨끗이 씻어내고는 자신들이 받은 것보다 더 지독하게 지사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 모리스 지사는 결국 검둥이가 되는 쪽은 자신일 거라고 판단했는지 해밀턴 씨처럼 싸움에 염증을 내면서 사직했다.
이런 논쟁은 모두 세습 권력자인 영주들에게 그 원인이 있었다. 영주들은 그들의 주에 방위비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온갖 비열한 수단을 동원해 대리인인 지사에게 훈령을 내려서 자신의 소유지가 과세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내용이 명시되지 않으면 어떤 조항도 통과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는 지사에게 훈령대로 따르겠다는 각서까지 받았다. 주의회는 3년 동안 이 부당함에 맞섰지만 마침내는 굴복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모리스 지사의 후임이었던 데니 대위는 과감히 이 훈령에 불복했다. 이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겠다.
어음 발행으로 군사 식량을 조달하다
이야기가 너무 급하게 진행되는 것 같다. 모리스 지사 때 있었던 일을 좀 더 얘기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즈음 프랑스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매사추세츠 주정부는 크라운 포인트를 공격하기로 계획하고 퀸시 씨를 펜실베이니아로, 훗날 지사가 된 포널 씨를 뉴욕으로 각각 보내 원조 요청을 했다. 그때 내가 주의회에 있어 그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데다 퀸시 씨와 고향도 같았기 때문에 퀸시 씨는 의회의 도움을 받도록 힘써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나는 의회에 그의 청을 전했다. 의회는 이를 받아들여 군사 식량 비용으로 1만 파운드를 원조하기로 동의했다. 그런데 지사가 비록 필요한 세금이라 해도 영주의 소유지를 과세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조항을 넣지 않는다면 이 안(여기에는 국왕에게 헌납하는 비용도 포함되어 있었다)에 동의할 수 없다고 나섰다. 뉴잉글랜드에 원조하는 안을 통과시키고 싶어 했던 주의회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퀸시 씨도 지사의 동의를 얻어 내려고 애썼지만 지사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지사와 상관없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했다. 공채국의 보관 위원들 앞으로 어음을 발행하는 것이었다. 주의회는 법률에 따라 어음을 발행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공채국에는 잔고가 거의 없었으므로 나는 기한을 1년으로 하고 5부 이자를 붙여 어음을 발행하자고 제안했다. 이 어음으로 군사 식량을 충분히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의회는 곧바로 내 제안을 채택했다. 즉시 어음이 발행되었으며 나는 어음에 서명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다른 지방에 대출해준 유통지폐에서 나오는 이자와 소비세로 얻어지는 세입으로 어음을 지불할 계획이며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어음은 신용을 얻었다. 그래서 식량을 구입할 때도 어음이 사용되었고 현금을 가지고 있는 부자들이 어음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어음은 그냥 쥐고만 있어도 이자가 붙고 언제든 현금처럼 쓸 수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이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음은 불티나게 팔려 2-3주만에 바닥이 나버렸다. 이렇게 해서 내가 제안한 방법으로 중요한 문제 하나가 해결되었다. 퀸시 씨는 주의회에 정중하게 서한을 보내 감사함을 전했고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것에 기뻐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그는 나에 대해 친밀하고 진심 어린 우정을 간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