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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28일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가 총살당했다. 20년 이상 무단통치를 해온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무렵 ‘정부’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스위스로 탈출하다가 붙잡혔다.
당시 무솔리니는 62세, 클라라 페타치는 33세였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고 나이도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한 도피’ 행각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1896년 4월 28일 ‘근대 신여성의 효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등으로 이름 높은 나혜석이 출생했다. 나혜석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제 1기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진학했다.
23세이던 1919년,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나혜석은 3‧1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이화학당 학생들의 시위를 독려한 혐의로 투옥되었다. 25세이던 1921년에는 서울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회 관람객이 무려 5천 명이었다.
그 후 나혜석은 안동현 부영사로 발령 난 남편과 함께 만주에서 살았다. 그녀는 여자 야학을 열어 교육운동을 펼쳤다. 1923년 3월 의열단의 ‘국내 암살 파괴 계획’에 동참해 신의주로 폭탄이 반입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나혜석은 22세이던 1918년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주인공 경희는 일본 유학 중 잠시 귀국해서 집에 머무르고 있다. 아버지 등 여러 사람들이 ‘여자는 시집가서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편하게 사는 것이 제일’식의 논리로 그녀에게 결혼을 독촉한다. 경희는 ‘여자도 팔다리가 성하면 스스로 일하여 먹고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반박한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페미니즘 문학으로 평가받는 〈경희〉 이후에도 여러 단편소설과 시, 수필을 선보였다. 〈자화상〉 〈무희〉 〈나부 1〉 〈나부 2〉 〈선죽교〉 〈스페인 해수욕장〉 〈해인사 홍류동〉 〈수원성〉 등 유화 작품 창작에도 열정을 쏟았다.
〈파리 풍경〉도 그렸다. 파리가 문제였다. 나혜석은 파리 여행 중 친일파의 ‘정부’가 되었다. 그 결과 이혼을 당했고, 자녀와 만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녀는 행려병자가 되어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아직 세상을 뜨기에는 이른 52세였다.
나혜석은 시 〈인형의 가家〉에서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 기뻐하듯 /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 그들을 기쁘게 하는 / 위안물 되도다”라고 말했다. 친일파의 ‘정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래도 시대를 앞서 살아간 그녀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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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4월 29일) 오후 3시
봉무공원에서 유튜브 촬영 연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