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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를 보는 새로운 눈
―하종오 시집 『입국자들』(산지니, 2009)에 대하여
이은봉
1954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시인 하종오가 문단에 처음 선을 보인 것은 만 21세 때인 1975년이다. 이 해에 그는 『현대문학』지에「허수아비의 꿈」ㆍ「사미인곡(思美人曲)」 등의 시를 추천받아 문단에 나온다. 어찌 보면 이는 그 자체로 시인 하종오의 조숙함을 드러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이러한 얘기를 하는 까닭은 그가 아주 일찍부터 우리 시사의 선편(先鞭)을 쳐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에는 한국시단에서 쉬지 않고 선진적인 역할을 해온 것이 그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가 한국시단의 한 영역을 차지하게 된 것은 1980년 김명수, 김명인, 정호승, 이종욱, 김창완, 권지숙 등이 주도하던 『반시(反詩)』동인에 참여하면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이를 계기로 그는 명실상부하게 1980년대의 정신과 함께 하게 되었고, 나아가 대표적인 1980년대의 시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첫 시집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1981) 이후에 간행된 일련의 시집, 즉 『사월에서 오월로』(1984), 『넋이야 넋이로다』(1986), 『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들들하고』(1986),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1989) 등의 시집이 이른바 1980년대의 정신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그의 시정신은 대강 ‘정’이니, ‘님’이니 하는 말들과 뒤얽히면서 당대의 가치를 반영한다. 『정』, 『깨끗한 그리움』, 『님시편』(1994) , 『쥐똥나무 울타리』(1995), 『사물의 운명』(1997), 『님』(1999) 등이 그 것인데, 이들 시집에는 얼마간 형이상학적인 의지가 함유되어 있어 짐짓 관심을 끈 바도 있다. 나름대로는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이들 시집에 담겨 있는 세계는 하종오 본래의 시정신과 다소간 거리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의 경우 무엇보다 지나치게 관념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생활의 현장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시인 하종오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오늘의 현실이 이루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또다시 생생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2004년에 간행된 시집 『반대편 천국』(문학동네)에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이 시집의 시들은 서울을 주된 거주지로 하되 강화도 불은면에 마련한 땅과 집을 오가며 겪은 체험을 담고 있어 훨씬 더 현장감을 준다. 그 중에서도 제2부에 수록되어 있는 일련의 연작시 「코시안 가족」 및 「코리안 드림」은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과 아픔을 담고 있어 자못 주목이 되고 있다. 한국의 역사와 사회에서 마련한음지로 부각되고 있는 이들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는 시인 하종오가 자신의 시세계를 새롭게 형성하도록 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 문제야 말로 2000년대에 들어 그가 새롭게 이루는 시세계의 핵심 소재로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들 문제에 주목하는 동안 그것은 외국인 노동자의 차원에서 이주 노동자의 차원으로, 나아가 다문화 이주민의 차원으로 심화ㆍ확대되어온 바 있다. 그리하여 이제는 이 땅의 ‘입국자’들이 단지 노동자의 형태로만 살아가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혼이민의 형태로 이 땅에 정착하고 있는 다문화 가족만 하더라도 이미 또 다른 사회문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작업이 주목이 되는 까닭은 그동안 시인 하종오가 남달리 이들 이주민의 문제에 대해 집중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문제를 집중해온 것이 위의 시집 『반대편 천국』(문학동네)만은 아니다. 이외에도 2000년대 들어 간행한 여러 시집에서 이들 문제에 대해 섬세하게 노래해온 것이 그인데, 이어지는 시집 『지옥처럼 낯선』(랜덤하우소, 2006년), 『국경 없는 공장』(삶이보이는창, 2007), 『아시아계 한국인들』(삶이보이는창, 2007) 등이 그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시집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다양한 시적 사유를 통해 우리 사회의 소외된 삶을 줄곧 응시해 온 바 있는 시인이다. 이 중에서도 『국경 없는 공장』은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이주 노동자의 삶을 그리고 있어 관심을 끈 바 있고, 『아시아계 한국인들』은 내국 식민지화된 차별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다문화 가정의 이주 여성들의 삶을 그리고 있어 관심을 끈 바 있다. 이들 시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국사회가 제국주의적 면모를 갖기 시작한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물론 이들 제국주의적 면모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것이 시인 하종오이거니와, 이는 최근에 간행된 시집 『입국자들』(산지니, 2009)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이 시집 『입국자들』은 모두 제4부로 구성되어 있다. 탈북과 그 이후의 고난ㆍ가난ㆍ그리움 등 탈북자 문제를 소재로 하고 있는 〈국경 너머〉가 제1부를 이루고 있고, 몽고ㆍ중국 등에서 한국으로 이주해온 이들과, 현지의 가족들을 다루고 있는 〈사막 대륙〉이 제2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이들의 한국생활을 소재로 하고 있는 〈이주민들〉이 제3부를 이루고 있고, 한국에서 고국으로 귀환한 자들과 한국에 간 이들을 기다리는 현지의 가족들을 다루고 있는 「귀환자들」이 제4부를 이루고 있다.
이번의 그의 시집 『입국자들』은 당연히 위에서 열거한 여러 시집의 뒤를 잇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시집 『입국자들』은 대한민국의 현실과 관잇고 맺고 살아가는 이주민 및 그 가족의 삶을 아주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어 좀 더 주목이 된다. 이주민들을 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이 주목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데, 이와 관련하여 정작 기억해 맺할 것은 그가 이들 이주민 및 그 가족을 하나하나 깨어 있는 인격으로, 살아 있는 개인으로 호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을 일일이 호명의 는 것은 그가 이들을 저 자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뜻의 현실그가 이아들이고 있다고 해서 노예화되고 기계화되어 있는 이들의 삶이 일거에 극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베트남 인 트렁 씨와
미얀마인 윙툰 씨는
몽골인과 중국인이 부럽다
다 같이 공장에서 잘렸어도
다 같이 불법체류자가 되었어도
한국인과 생김새가 닮은
몽골인과 중국인은
말을 하지 않으면
건설현장에 막일하러 가도
지하도에 노숙하러 가도
거리에 무료 급식 받으러 가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한국인과 생김새가 닮지 않은
베트남인과 미얀마인은
어디에서든 금방 드러나
그런 일자리도 찾지 못하고
그런 잠자리도 얻지 못하고
그런 먹을거리도 받지 못하고
불법체류자로 붙잡힐 수도 있어
공장 밖에 찾아가볼 데가 없다
베트남인 트렁 씨와
미얀마인 윙툰 씨는
스리랑카인 친구와 네팔 친구가
임금 체불 당하고도 다니는
기숙사 있는 공장에 취직한다
―「외모」 전문
이 시에서 베트남 인 트렁 씨와 미얀마인 윙툰 씨는 정확하게 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가 이들을 이처럼 정확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들의 인격과 저 자신의 인격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들은 삶의 현장에서 “한국인과 생김새가 닮”지 않아 몽골인이나 중국인과는 달리 차별을 받는다. “다 같이 공장에서 잘렸어도/다 같이 불법체류자가” 되지는 않는 것이 이들이다. 외모의 차이 때문에 먹고 사는 일에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는 나름대로는 커다란 차이로 존재하는 아시아계 이주노동자들의 심리적인 소외감을 다루고 있다. 물론 그것은 “몽골과 중국”에서 입국한 이주노동자가 “한국인과 생김새가 닮”아 베트남이나 미얀마에서 입국한 이주노동자보다 취업에 유리하다는 데서 발생한다. 이 시에는 이처럼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는 “몽골인과 중국인”을 부러워하는 “베트남 인 트렁 씨와/미얀마인 윙툰 씨”의 심리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들의 심리는 근본적으로 취업에 불리하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물질적인 소외감, 즉 경제적인 소외감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이 땅의 이주 노동자들 사이에도 계급문제, 곧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깊이 도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땅에서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다 보면 이주 노동자들은 아무래도 기계화되고 사물화될 수밖에 없다. 이 시에서 “한국인과 생김새가 닮지 않은” “베트남인 트렁 씨와/미얀마인 윙툰 씨”가 결국 “스리랑카인 친구와 네팔 친구가/임금 체불을 당하고도 다니는/기숙사 있는 공장에 취직”하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기숙사가 있는 공장에서 취직하지 않고 따로 숙식을 해결하다가 불법체류라는 신분이 밝혀지면 강제로 추방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온갖 차별적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 땅에 거주하는 이주 노동자들이다. 인간 이하의 아주 모멸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이들 이주 노동자들의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이처럼 핍박을 가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낮은 국가의 구성원에 대해 거듭해서 배타적인 차별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배타적인 차별의식의 배후에는 천박한 경제적 식민지 의식이 자리해 있다.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나라에 대한 터무니없는 우월감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이주 노동자들은 온갖 모멸적인 대우를 받더라도 한국에서 살면서 어떤 막일이라도 하려고 한다.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살면서 일을 하게 되면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을 갖고 한국에서 살려고 하는 것은 조선족의 경우에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한국서 막일하다 다리를 다쳐 일할 수 없는”, 지금은 강제로 추방을 당해 중국의 베이징을 떠돌고 있는 조선족자치주 출신의 박씨가 이를 잘 증명해준다.
한국에서 막일하다 다리를 다쳐 일할 수 없는
박씨는 베이징에 와도 할 일이 없다
단칸방에서 한데 바람소리 듣는다
혼자 속울음 우는 시간이 깊어진다.
어머니는 저 세상 어디에 있을까
박씨는 한 번 더 건강한 몸으로
오로지 한국 가서 돈 벌어오고 싶다
다시는 조선족자치주에서 농사지으며
푸석한 흙바닥에 몸 부리고 싶지 않다
다시는 푸성귀나 키워 뜯어먹으며
평생 밭고랑 이끌고 다니고 싶지 않다
한국에서도 베이징에서도 무력한
박씨는 누구도 돈 벌려는 자신을
함부로 손가락질할 순 없다고 소리친다
바람소리에서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귀에 익은 속울음소리 들으며
생각해보면 박씨는 눈물 자주 흘렸다
오늘밤에는 절름거리는 몸속에서
유산 한 푼 남기지 않은 어머니가 와서 울고 가면
목돈 챙겨 집나간 아내가 울고 가고
그 울음들에 겨워서 눈물 흘리다가
박씨는 바람 소리에 속울음소리 묻으며
밤 내내 저린 다리 주무르다 벌떡 일어선다
―「속울음소리」 전문
제목은 ‘속울음소리’로 되어 있지만 이 시는 ‘조선족자치주’ 출신의 떠돌이 노동자 ‘박씨’의 삶과 캐릭터를 다루고 있다. 이 시의 재미는 기구한 운명을 지닌 ‘박씨’의 삶과 캐릭터를 읽어내는 과정에 발생한다. 이미 자본주의의 단물을 맛본, 그리하여 돈을 벌려는 욕구가 강한 것이 이 시의 서정적 주인공인 박씨이다. 박씨는 심지어 “누구도 돈 벌려는 자신을/함부로 손가락질할 순 없다고 소리”를 치기까지 한다. 돈에 대한 집착이 너무도 강한, 말 그대로 전형적인 속물인 이 인물에 대해서는 실제로도 누구 하나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그가 속물적 특성을 본질로 갖고 있는 자본주주의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에서 막일하다 다리를 다쳐 일할 수 없는” 사람이 그이다. “다시는 조선족자치주에서 농사지으며/푸석한 흙바닥에 몸 부리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그가 간절하게 “한 번 더 건강한 몸으로/오로지 한국 가서 돈 벌어오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는가. “절름거리는 몸속에” 들어와서 울고 가는 “유산 한 푼 남기지 않은 어머니”까지, “목돈 챙겨 집나간 아내”까지 못 잊는 것이 그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시를 통해 박씨의 인물형상을 살펴보는 일은 웬만한 단편소설을 읽는 것에 못지않은 재미를 준다. 그와 동시에 이 시는 아시아 전체에 흩어져 살고 있는 조선족 교포들의 삶에 대한 성찰과 반성도 갖게 한다. 물론 이 시에서의 반성과 성찰은 조선족 교포들의 삶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하종오의 이 시집 『입국자들』에는 북조선 출신의 이주 노동자들도 적잖이 등장하고 있다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재배하우스」 「목련」 「말투」「초청」 등 이 시집의 모두에 실려 있는 시들에서 살펴볼 수 있는 인물형상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물론 시인 하종오가 북조선 출신의 입국자들이라고 해서 몽고,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스리랑카, 필리핀 등 다른 아시아 입국자들에 비해 특별한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에는 북조선 출신의 인물형상 또한 낯설고 어색하게 살아가고 있는 다른 나라의 입국자들과 동등한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 북조선 출신의 입국자들 역시 아시아 다른 나라의 입국자들과 똑같이 낯설고 어색한 인물형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집에 객관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중에는 고국으로 귀환한 자들도 없지 않다. 이들의 캐릭터와 삶을 객관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예는 우선 위의 시 「속울음소리」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시에 그려져 있는 인물형상은 주체로서의 인물형상보다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이 좀 더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해야 마땅하다. 물론 이는 화자로서의 인물형상보다는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이 좀 더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은 이른바 ‘그’로서의 인물형상을 가리킨다. 하종오 시의 인물형상에 ‘나’로서의 인물형상보다 ‘그’로서의 인물형상이 좀 더 많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이들 인물형상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는 무엇보다 그가 이들 인물형상을 주관적인 감정보다는 객관적인 지성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물론 각각의 인물형상을 동시에 등장시키고 있는 예도 없지 않아 더욱 주목이 되는 것이 그의 시이지만 말이다.
젊은 여자가 식사 주문을 받으러 와서
이북사투리를 쓰면
오십년 전 전쟁 때 월남하지 않았으니
탈북자라고 나는 단정한다
처음에는 수저를 갖다 놓고
다음에는 반찬 접시들을 갖다 놓고
마지막으로 밥과 국을 갖다 놓은
젊은 여자는 주방 앞에 손 맞잡고 서서
뭔가 바라본다
손님이 점심 먹든 말든 무관심한
젊은 여자의 눈길 따라
내가 창 밖 내다보니
왼팔로는 어린애를 들어 안고
오른손으로는 우유곽 잡고는
어린애에게 빨대 물린
허름한 한 어머니가 걸어가고 있다
젊은 여자가 북한에 두고 온 자식도 저만한가
갑자기 밥맛이 없어지는데도
끼니때 놓친 나는 숟가락 놓지 못한다
―「젊은 여자」 전문
이 시의 서정적 주인공은 말할 것도 없이 탈북자인 ‘젊은 여자’이다. “밥과 국을 갖다 놓”는 것으로 손님의 밥상을 다 차린 이 여자는 지금 “주방 앞에 손 맞잡고 서서” “창밖을 내다” 보고 있다. 창 밖에서는 “왼팔로는 어린애를 들어 안고/오른손으로는 우유곽 잡고는/어린애에게 빨대 물린/허름한 한 어머니가 걸어가고 있다”. 이 모습을 바라보며 주방 앞의 젊은 여자는 “북한에 두고 온 자식도 저만한가” 하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시는 탈북자인 젊은 여자에 대한 시인의 측은지심을 기본 정서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상으로서의 이 시의 인물형상인 ‘젊은 여자’는 이렇게 그 캐릭터를 정리해볼 수 있다. 하지만 탈북자인 젊은 여자만 이 시의 인물형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니다. 젊은 여자의 행동에 따라 반응하는 화자, 즉 ‘나’도 부족한 대로 인물형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나’는 인물형상이라고 하기 쉽지 않을 정도기 쉽동상이라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다른 시와는 달리 이 시에는 대상에 대한 화자의 반응이 훨씬 적쟹하는 화드러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이 시의 화자인 ‘나’는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여자의 행동 때문에 “갑자기 밥맛이 없어지는데도/끼니때”를 놓쳐 “숟가락 놓지 못”하는 것이 ‘나’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시에는 아쉬운 대로 주체로서의 인물형상과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이 익히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에 드러나 있는 인물형상처럼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인물형상이 모두 점잖고 순수한 지는 잘 알 수 없다. 귀환자들 중에는 한국의 고용주에게서 배운 나쁜 버릇을 자국에서 되풀이하며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자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더러는 서로 사기를 치기도 하고 위장 결혼을 할 한국여자를 찾아 밤거리를 헤매기도 하는 것이 이들 이주 노동자들이다. 시인 하종오에 의해 그려지는 아시아의 떠돌이 노동자들이 모두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에 그려져 있는 대부분의 이주 노동자들은 다음의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긍정적인 캐릭터를 갖고 나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남아에서 한국에 취업 온
청년 넷이 밴드를 만들어 연습하다가
저녁 무렵 도심 지하보도에서
처음 한국인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공연 준비를 마치자
노인네들이 몰려와 둘러섰다
기타는 스리랑칸 베이스는 비에트나미즈
드럼은 캄보이단 신시사이저는 필리피노
허름한 옷차림을 한 연주자들은
낡은 악기로 로큰롤을 연주했다
노인 한 분 나와서 몸 흔들어대자
다른 노인 한 분 나와서 몸 흔들어대고
노파 한 분 나와서 몸 흔들어대자
다른 노파 한 분 나와서 몸 흔들어댔다
막춤을 신나게 추던 노인네들은
연주자들이 부루스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노인 한 분과 노파 한 분
다른 노인 한 분과 다른 노파 한 분
양손으로 살포시 껴안고
양발로는 엇박자가 나도 돌았다
미소 짓던 동남아 청년 넷은
저마다 고국에 계신 노부모님에게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적 없었다 싶으니
더 정성껏 연주하고
노인네들은 저마다 자식들이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적 없었다 싶으니
더 흥겹게 춤을 추었다
-「밴드와 막춤」 전문
이 시에는 “동남아에서 한국에 취업”을 와 “밴드를 만들어 연습하”고 있는 “청년 넷이” 등장한다. 기타를 맡은 스리랑칸, 베이스를 맡은 비에트나미즈, 드럼을 맡은 캄보이단, 신시사이저를 맡은 필리피노가 그들이다. 국적은 다르지만 이들 인물형상은 “저녁 무렵 도심 지하보도에서” “한국인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공연을 시작한다. 이 시가 특별하게 생각되는 것 중의 하나는 이 시에 등장하는 인물형상이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네 명의 연주자들 이외에도 여러 명의 노인과 노파들이 등장하는 것이 이 시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허름한 옷차림을 한 연주자들”이 “낡은 악기로 로큰롤을 연주”하자 노인들이 한 분 “한 분 나와서 몸 흔들어”댄다. 노인들만이 아니라 노파들까지 나와 “몸 흔들어”댄다. “동남아 청년”들이 “부루스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이들은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급기야 “양손으로 살포시 껴안”고 부르스를 추기까지 한다. “동남아 청년 넷은/저마다 고국에 계신 노부모님에게/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적 없었다 싶으니/더 정성껏 연주”한다.
이 시는 이처럼 긍정적인 동남아 청년의 인물형상을 다루고 있다. 동남아의 청년들은 노부모님을 생각해 “더 정성껏 연주하고”, 한국의 노인네들은 자식들을 생각해 “더 흥겹게 춤을 추”는 장면이 인상 깊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 하종오는 자신의 시에서 이주민들의 국적과 이름, 그들이 처한 상황과 행동, 그리고 그들의 심리까지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물론 그의 이들 시의 경우 동일한 패턴이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어 다소간 지루한 느낌을 주기는 한다. 활기 있는 문장이나 변화 있는 화법을 통해 각각의 시에 무한한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것이 주관적 정조를 활용해 대자유의 정신을 추구하려는 의지보다는 이미 우리 사회의 중요한 현실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인 이주 노동자들의 캐릭터와 삶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의지에서 비롯되지만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시가 보여주는 이러한 한계는 끝없이 염결하려고 하는 도덕적인 열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도덕적 열정이 다시 한 번 뒤집혀진 채 단련되어 시인 하종오가 좀 더 빨리 자신에게는 한없이 엄격하지만 남에게는 더없이 너그러운 경지에 이르기를 진심으로 빈다. 그럴 때 거칠 것 없는 대자유의 경지와 함께 오늘의 현실이 처한 민족문제를 보는 눈도 화끈하고 화통하게 열릴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내일을 여는 작가》 2009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