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에큐메니컬 운동을 말하는가?
최재석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예수님의 복음도 한 가지인데,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따라서 그 하나님과 복음을 이렇게도 이해하고 저렇게도 해석한다. 성경을 읽는 사람마다 각자의 안목으로 다르게 보고 다르게 말한다. 그러다 보니 신학자마다 그가 내세우는 신학적 주장이 다르고 때로는 그 주장에 따라서 교파가 달라진다. 그런데 성경 하나를 놓고 그렇게 많은 이론이 나온 것은 코끼리를 만지는 맹인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코끼리의 생김새에 대해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신학자들의 주장은 코끼리의 배를 만지거나 다리를 만진 맹인들의 말처럼 그들의 입장에서 관찰한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들의 이론에 따라서 나누어진 교파 역시 복음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맹인들은 같은 자리에서 코끼리를 만졌지만, 신학자들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성경을 읽었기 때문에 그들의 시각 차이는 맹인들의 것보다 더 크다.
그렇다면 우리가 옛날에 정립된 신학적 이론에 근거한 교리를 지금도 그대로 지키면서 그 교리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런데 우리의 교회가 그 교리에 의해서 나뉘어졌고, 우리는 그 교회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당장 교리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는 내가 소속한 교회가 금과옥조처럼 강조하는 교리가 단편적이라는 인식을 갖고 이웃 교회나 교파의 교리에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을 것이라고, 우리 모두의 교리가 합쳐질 수 있다면 좀 더 나은 성경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속한 교회가 내세우는 교리의 울타리 밖을 기웃거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글로벌 시대, 소통의 시대, 열린 시대, 융합의 시대에 걸맞는 태도다. 그래서 일부 성서 신학자들은 단편적이고 단선적인 접근 방법 대신 종합적 접근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렇게 함으로써 파편적인 신학을 통합해서 성서를 올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를 나누고 교파를 나누어서 서로 대립하고 다투고 경쟁하는 데에 에너지를 탕진해 왔다. 그런데 우리의 경쟁자, 우리를 위협하는 세력은 타 교회나 교파가 아니라, 우리를 뿌리 채 흔들어대는 무신론자들의 집단이다. 지금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상대는 우리의 형제가 아니라 교회를 흔드는 사탄의 세력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는 흔드는 사탄의 세력에 대항해서 우리 믿음의 형제들이 뭉쳐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때에 형제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대화하자는 ‘에큐메니컬’ 운동이 일어났다.
오늘날 에큐메니컬이라는 개념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하나 됨을 의미한다. 20세기 초에 시작한 교단 간의 대화 운동은 기독교의 분리된 교단들의 하나 됨과 협동을 추구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 운동의 역사적 근원은 1805년에 침례교회 선교사 윌리엄 캐리가 4대륙에 있는 모든 기독교 신앙고백들의 보편적 연합을 촉구한 데에 있다. 서구의 선교사들은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들은 본국의 교회를 피선교지에 이식함으로써 피선교지 교회들을 교파별로 분열시키는 문제를 낳았다.
이러한 분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각한 사람들이 피선교지의 선교활동을 연합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교단을 초월한 선교회가 세워졌고 1854년 이후에는 각 교단의 선교 책임자들의 대화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10년에는 영국에서 에딘버러 총회가 열리게 되었고, 이 총회를 통해서 20세기 에큐메니컬 운동이 시작했다. 이와 같은 노력을 통해서 1938년에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가 설립되었다.
현재 개신교의 주요 교단들과 정교회의 교단들이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정식회원으로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1965년의 제2차 공의회 이후 그들도 교회 간의 대화를 적극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초 한국 장로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가 용공이라 하여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분열되었다. 그들이 세계교회협의회를 용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협의회에서 구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에 속한 교회들을 회의에 초대하거나 그들을 회원교회로 수용하여 그들과 소통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합동측을 중심으로 한국 개신교회의 보수 계열 내지 근본주의 계열의 교회들은 세계교회협의회의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교회나 교단간의 대화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컬 운동은 열린 사고, 대화, 소통을 중시하는 현대문화의 요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막을 내린 글로벌 시대에 용공의 문제로 분열된 한국교회의 문제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공산주의 국가에 속한 교회는 기독교인의 모임이 아니라고 보아야 하는가? 그 교회가 공산주의에 의해 변질되었다면,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올바른 신앙의 길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에큐메니컬 운동의 선봉에 서 있는 한스 큉에 의하면, 각 교회가 내세우는 교리는 절대성을 요구할 수 없다. 각 시대는 그 자신의 교회상을 갖고 있으며, 이 교회상은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교회상은 시간적으로 제약되어 있고 변할 수 있다. 교회는 변할 수 있는 역사적 상황의 영향을 받아왔다. 따라서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교회는 이 땅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사 한가운데 있는 현실의 교회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보아야 한다. 교회는 시간과 역사를 벗어나 있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는 왜곡되고 잘못된 형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 교회의 형태는 새로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 새롭게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교회나 교단도 자신이 최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교단은 다른 교단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사도행전이 전하는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를 그 이후의 모든 교회가 그대로 모방해야 할 규범적 교회, 참 교회의 형태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의 형태도 특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을 증언해야 할 역사적 필요를 통해 생긴 것으로, 역사적 제약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형태를 요구한다. 새로운 형태로의 변화는 인간의 결단과 책임을 통해서 일어난다.
한스 큉은 인간으로 구성된 교회에서는 인간의 속성상 잘못된 결단과 잘못된 발전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유롭게 결단하는 인간의 실패로 말미암아 교리와 형태의 불일치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땅 위에 있는 모든 교회는 자기의 것만이 옳다는 독선적인 자세를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용납하면서 대화하고 연합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분열이 초래한 참혹한 결과들, 예를 들어서 독일 인구의 절반을 희생시킨 유럽의 30년 종교전쟁,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종교재판, 추방과 집단살해 등을 고려할 때, 교회의 일치 내지 하나 됨을 찾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교회의 분열은 교회와 복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분열로 인해서 선교가 어려워졌다. 교회의 분열로 말미암아 피선교지의 그리스도인들을 교단별로 나누고 교회분열을 범세계적으로 확장시키는 실수를 범했다. 그래서 교회끼리 반목하고 싸우게 되었다. 이것은 복음의 정신이 아니다.
교회의 존립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명령과 의지에 따른다면, 교회는 하나여야 한다. 교회는 단 하나의 구원 사건, 단 하나의 메시지로부터 온다. 따라서 제자들과 증인들과 봉사자들은 서로 교제하고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하나 됨의 근거이다. 교회는 하나의 에클레시아, 하나의 하나님의 백성,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 하나의 성령의 피조물이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라는 에베소서 4:4-6 외에도 신약성서의 많은 구절이 이를 증언한다.
그런데 이러한 근원적인 하나 됨에도 불구하고 에큐메니컬 운동은 다수의 교회를 전제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다양성을 가진 다수의 교회를 이루고 있다. 각 교회는 그 자신의 언어와 역사와 관습과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자 특성을 가진 교회들이 대화하려면 통일된 조직이나 통일된 유형의 획일성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현 실적으로 각 교회는 예배의 다양성, 신학의 다양성, 교회 질서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구조와 형태와 신학을 가진 다양한 교회들 속에 단 하나의 교회가 존재한다. 각 교회는, 예수님이 지체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 지체들이 모여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이다. 다양한 교회들이 서로 대화하기 위해서는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사랑과 평화를 위해서는 상대를 인정하면서 양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