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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과 사람 .◀ 종종 11월이면 평안남도 양덕군에 있는 중공군 묘지를 백발의 중국여인이 찾아오고는 하는데, 이 여인이 북한을 방문하면 북한정권에서 직접 안내하며 예를 갖추기 바쁩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유송림(劉松林) 또는 유사제(劉思齊)라고도 불리는 마오 왜냐하면 유송림의 남편인 마오안닝(毛岸榮)이 6·25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하여 그곳에 묻혀있기 때문입니다. 정권을 획득하고 죽을 때까지 철권 통치자로 중국을 지배하였던 마오쩌둥의 첫째 아들은 사실 6·25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일부자료에는 자원해서 참전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의 아버지인 마오쩌둥의 지시로 그는 전쟁터로 나갔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전쟁과 사람 ' 카테고리의 다른 글 YOUR COMMENT IS THE CRITICAL SUCCESS FACTOR FOR THE QUALITY OF BLOG POST
1952년 12월, 수십 기로 이루어진 전투기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김포공항에 비행기가 도착하였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린 인물은 제2차 대전의 전쟁영웅이자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확정된 인물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였습니다. 그는 선거 기간 중 6·25전쟁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만일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 그 즉시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공약을 내세웠고 이를 실천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국군 수도사단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좌에서 우) 밴 플리트 제8군사령관,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제2차 대전 당시 아들 존과 함께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좌에서 우로)미제3사단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클라크, 밴 플리트]
[제3사단을 방문하여 아들 존 소령과 면담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밴 플리트, 이승만 대통령, 아이젠하워]
[휴전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던 클라크 장군의 아들은 참전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6·25전쟁과 미군의 참전을 떼어놓고 이야기하기 힘들지만 이처럼 고위 미군 장성이나 정치인의 자제들이 앞 다투어 전쟁에 참전하였다는 점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드는 대목임에 틀림없습니다. 총 142명의 장성의 아들들이 참전하여 이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들이 참전의사를 밝혔을 때 대부분의 부모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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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25일, 미 제24사단의 일선 중대장으로 근무하던 샘 워커 ( Sam S. Walker 1925~ ) 대위는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에게 호출 당하여 도쿄의 극동군사령부를 방문하였습니다. 야전의 말단 지휘관인 젊은 워커대위는 맥아더의 집무실에서 거물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샘이 경례를 하자 담담하면서도 서운한 표정의 맥아더가 무겁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전 미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대장의 묘]
[방한한 콜린스 미 합참의장에게 아들 샘 워커를 소개하는 월튼 워커
[당시는 1.4후퇴 직전이라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맥아더는 그의 충실한 수하였던 월튼 워커의 죽음을 몹시 애통해하였습니다. 때문에 혹시나 최전선에서 사상을 당할 수도 있던 그의 외아들을 안전한 본국으로 전보시킴과 동시에 유해를 직접 운구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유엔군사령관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자가 이들 부자에게 베풀 수 있었던 최고의 배려였습니다. [맥아더는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지만 사실 그것은 배려였습니다] (평양에서 맥아더를 영접하는 월튼 워커)
[미 육군대장 당시의 샘 워커]
[밴 플리트 미 제8군 사령관]
“밴 플프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너무 위험하고 무모하다.” [실종된 벤 플리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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