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충주락클라이밍
 
 
 
카페 게시글
등반자료실 스크랩 김기섭 시인악우님 이야기...
다부(이동기) 추천 0 조회 123 15.10.13 15:4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아래의 글은 마음을 같이하는 악우의 이야기를

링크된 주소에서 두고두고 보려고 옮겼습니다,

 

 

 

백두산에서 자생하는 가솔송은

가끔 쇠랑에게서 그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http://www.cnanews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

 

 

너무도 산을 사랑하며 좋아한

그의 이야기 입니다

 

 

등반을 하거나 또는 등반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한번 쯤 이 사람의 이름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김기섭.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17개의 바윗길을 개척한 산악인이다. 그 어느 곳보다 멋진 바윗길을 개척하고 또 그에 버금갈 만큼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 ‘아름다운 시인’으로 불리는 산악시인 김기섭. 신이 그의 재주를 시기하여 등반 중 추락으로 인한 부상으로 하반신 마비와 양 손가락 마비와 투병하는 시인 김기섭 씨를 CNA 뉴스가 만났다.

 

지하철 2호선 왕십리역사 2층은 생각보다 더 혼잡했다. 교통카드를 찍고 출구로 나갔더니 혹시 이곳이 약속장소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른 광장이 나왔고, 잠시 헤매다가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니 그곳은 엉뚱하게 쇼핑센터였다. 그때 다행히 눈이 밝은 신희수 기자가 출구 옆 또 다른 지하철 출구광장에서 휠체어에 탄 채 활동보조인 정동주(46) 씨와 함께 취재팀을 기다리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김기섭(53) 씨였다.

김기섭, 생각만 해도 긴장되고 떨려오는 이름이다. 산악인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이름 김기섭. 그는 북한산 인수봉과 백운대 그리고 설악산 토왕골의 노적봉과 미륵장군봉, 영월 서강 등에 바윗길을 개척했다. 그것도 무려 열일곱 개나.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바윗길을 하나 든다면 1989년, 만 28세의 나이로 설악산 노적봉에 개척한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일 것이다. 난이도가 높지는 않지만 토왕골의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즐기면서 리지등반을 하며 올라 선녀가 하강하듯 유려하고도 웅장한 토왕폭을 바라보자면 오래된 카메라를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빼어난 경치에 넋을 잃게 되는 가히 설악산의 기념비적인 바윗길이다.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은 듣기만 해도 시적인 영감이 떠오를 만큼 감흥을 돋구어주는 이름도 독특하다. 이 길이 개척될 때만해도 바윗길의 이름은 산악회 이름을 이용한 두 글자의 무미건조한 형태가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이라니, “무슨 바윗길 이름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우스꽝스럽게 지었느냐”는 말들도 했지만 그가 붙인 서정적인 이름의 바윗길들은 이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산악활동에 대한 열정을 불러 일으켰고 산악인들의 정서수준을 두 어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도 듣게 되었다. 오늘을 등반하는 암벽등반가들은 그에게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김기섭 씨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친 등반을 즐기고 바윗길 개척에 매진할 때의 그 강인해보이면서도 힘이 넘치는 듯한 모습까지는 아니어도 인자하고 여유로운 웃음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의 손은, 거친 바위를 타고 올라 힘차게 해머를 두드릴 때와는 달리 작고 부드러웠다.

아직 봄이라고 하기에는 차갑고 쌀쌀한 날씨, 취재팀은 왕십리 역사 앞 작은 공원에서 지나가는 행인을 배경삼아 사진촬영을 했고 평소 그가 휠체어 운동을 할 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다음 왕십리의 한 곱창집에 자리를 잡았다.

“요즘 자주 찾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요. 사고 후에는 연락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부르면 올 사람이야 있겠지만 그러면 부담을 주게 될까봐 여간해서는 전화하지 않죠. 이 동네에는 특별한 식당이 없습니다. 왕십리는 곱창집이 제일 낫죠.”

모처럼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면 그는 왕십리를 대표하는 서민음식인 돼지곱창에 소주 한잔 걸치기를 즐긴다. 예전 그의 주량은 엄청나서 2홉들이 소주를 자그마치 다섯 병까지 마셨지만 요즘에는 한 병에서 두 병으로 만족한다. 요즘 그가 가장 보고 싶은 이는 자유등반가 손정준(손정준클라이밍연구소) 소장이다. 그에게 ‘스포츠 클라이밍을 가르쳐 준 인간성 좋은 후배’이기 때문이다.

김기섭 씨의 기억은 또렷한 편이었지만 그의 발음은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다소 어눌하다고 느낄 정도로 정확하지 못한 편이다. 하여 인터뷰 내용은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 추가로 보완했음을 미리 밝혀둔다.

또한 그가 쓰는 글에는 쌍시옷과 쌍디귿이 없다. 김기섭 씨는 누워서 보조기를 끼우고 컴퓨터 자판을 치는데 옆으로 누워서 컴퓨터를 하다 보니 쉬프트키를 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두 사고의 후유증 때문이며 우선 그 이야기를 먼저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당대 최고의 바윗길 개척자이자 서정적인 암벽시인 그리고 기존의 질서에 대항하여 바윗길에서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혁명까지 노래했던 이 아름다운 시인에게는 신의 질시 아닌 질투가 있었다. 추락사고였다.

 

 

김기섭 씨는 등산학교 강사답게 등반시 두 조의 프렌드와 한 조의 너트세트 그리고 길고 짧은 20개의 퀵드로를 갖고 다니면서 촘촘하게 확보물을 치며 안전등반을 강조했었다고 한다. 등반에 앞서 항상 조심했고 쉬운 바윗길이라고 해서 얕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운명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운명의 날은 2006년 11월 19일 오전이었다. 코오롱등산학교 강사였던 김기섭 씨는 그날 꼭 등반을 부탁한 일행들과 북한산 인수봉을 올랐다. 그리고 인수B 코스의 항아리크랙에서 약 5미터 아래지점인 레이백 크랙에서 날개를 뜯다가 10여 미터를 추락하고야 만다.

“헬기를 타고 가는데 손가락과 발가락이 움직이질 않았어요. 선인봉 박쥐길에서 추락할 때나 인수봉 건양길에서 추락할 때는 움직였었는데 말이죠. 그 와중에도 물리치료를 받고 빨리 나아서 등반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선등이 몸에 익은 사람들은 확보물을 잘 설치하고 조심하는데 정작 내가 그렇게 당할 줄을 몰랐죠.”

사고가 나던 날 그는 원고청탁 마감이 가까워서등반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도 있었다고 말한다. 추락거리는 그렇게 길다고 할 수 없었지만 애석하게도 경추 6번과 7번에 심한 골절상을 입게 된다.그 때문에 그는 양손가락과 하반신 마비라는 판정을 받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긴 투병기간…

김기섭 씨는 월간 마운틴이 창간되던 2001년부터 3년간 창간멤버이자 기자로 일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남선우(現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이사장, 대한산악연맹 부회장) 님의 창간 주창에 민병준, 김기섭, 이철규 세 사람이 가세했고 형편이 여의치 않아 맨몸으로 부딪쳐가며 창간을 준비했다고 한다. 김기섭씨는 당시 '익사이팅 마운틴'이라는 꼭지를 맡아 새로 생긴 바위의 루트들을 찾아 글로 옮겼고 나름대로 공을 많이 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게 되는 클라이머들이 그의 글을 읽었으며 팬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반가움과 함께 더욱 분발하여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요즘 그는 마치 입시준비생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생각과는 달리 운동시간이 결코 적지 않다. 투병하고 있는 병의 속성상 신체의 움직임이 적어 근육이 손실되고 방광이 위축되기 쉽기 때문에 꾸준한 운동으로 체중을 유지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의 식사량은 일반인의 1/3도 채 되지 않는다.

 

 

“아침 6시에 기상해서 아침식사를 하고 머리를 감은 다음 약 1시간 반 동안 휠체어를 미는 운동을 해요. 10시쯤에는 집으로 돌아와서 카테터(catheter 체내에 삽입하여 소변 등을 뽑아내는 도관)와 방광으로 연결된 관으로 소변을 보고 모로 누워서 노트북을 앞에 두고 PC를 통한 활동을 하죠. 시를 쓰기도 하고 페친들의 글에 답글을 쓰기도 합니다.”

점심식사 후에는 침대에서 내려와 다리에 전기자극을 약 30분간 주는 물리치료를 한다. 그리고는 다시 침대로 올라가 컴퓨터를 만지고 저녁식사 후에는 공원으로 내려와 두 시간 이상 휠체어 운동을 한다. 정상인보다도 훨씬 많은 운동량이다. 김기섭씨는 이 같은 하루 일정이 병원의 스케줄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또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녹색병원으로 가서 물리치료를 받는다.

그는 하루에 열 두 개비의 담배를 태운다고 했다. 기상 후 침대에서 두 개비, 아침식사 후에 두 개비, 운동 후에 두 개비, 점심식사 후에 두 개비, 저주파 치료 후에 두 개비, 저녁식사 후에 두 개비와 같은 식이다. 김기섭씨는 “건강을 위해서 담배를 끊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일까?

“이 병이 통증과의 싸움이에요. 양팔과 무릎 아래에 하루 종일 통증이 있습니다. 하루에 두 번 약을 복용하는데 약의 성분이 방광의 용적이 줄지 않도록 하는 것과 통증을 줄여주는 거예요.”

더 이상 물어 무엇하랴. 거의 매일 똑같은 스케줄에 통증과 싸우고 있는 김기섭씨, 그에게 흡연은 고통의 순간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는 명상의 시간에 다름 아닐 것이다.

 

 

김기섭 씨는 동학운동 100주년이 되는 1994년도, 북한산 백운대에 ‘시인 신동엽길’, ‘녹두장군길’, ‘김개남장군길’을 냈다. 2003년도에 설악산 미륵장군봉에 개척한 체 게바라길까지 합쳐서 놓고 보면 그는 반체제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면서 부분적으로는 기존의 질서에 대항하는 혁명적 사상을 가졌을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그의 손을 통해 개척된 바윗길을 마저 소개하자면 1996년도에 설악산 토왕골과 북한산 노적봉에 각각 개척한 ‘경원대길’, 1997년도에는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부근에 새로 개척한 또 하나의 명품 리지길인 ‘별을 따는 소년들’, 1998년 도봉산 자운봉에 개척한 ‘배추흰나비의 추억’, 1999년 제주도 중문암장에 개척한 ‘어느 모델의 하루’와 ‘푸른 물결의 선율’ 그가 가장 아끼는 바윗길 중의 하나인 설악산 만경대의 ‘별길’(1999년), 설악산 석황사골의 ‘몽유도원도(2001년)’와 ‘체 게바라’(2003년) 2004년도에 북한산 노적봉에 개척한 ‘즐거운 편지’, 2005년도 홍천강에 개척한 ‘별과 바람과 시가 있는 풍경’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후배들이 2012년도에 개척완료한 영월 서강의 강변리지 '봄날은 간다' 등이다.

그는 자신이 개척한 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길이 의외로 한라산 남서벽이라고 했다. 확보물을 전량회수한 남서벽길은 스스로 생각해도 가장 살 떨리며 빛나는 등반이었다는 것이다.

“한라산 남서벽은 요반구락부 시절 이종철이란 선배님과 등반하러 갔는데 그 벽을 알파인 스타일로 하려고 했어요. 그 벽에 대한 사전 지식은 없었고 해머 기능이 있는 아이스 바일과 볼트, 하켄, 프렌드를 가져갔습니다. 설동에서 하루 잔 뒤, 벽 앞에 보이는 크랙선을 따라 서로 선등을 서며 올라갔는데 주로 프렌드와 하켄이 소요 됐어요. 장비 숫자가 적으니 전량 회수할 수밖에 없었고요. 문제는 확보지점에 링볼트를 설치해야 하는데 바위 암질 상태가 진흙이 단단하게 굳은 상태에서 볼트 박는 게 무의미했어요. 음, 바일 피크로 바위에 찍으면 피크가 약간 들어갈 정도로 연했어요. 그리고 확보지점에 하켄을 박더라도 흔들릴 정도니 서로 추락 안 하길 바랄 뿐이었지요”

그가 선등을 설 때 슬랩 상의 눈이 크러스트 된 약 30m 구간을 아슬아슬하게 횡단해야 했다. 태양은 떠올라 바위면을 달궈 검은 벽에서 수증기를 발산하고, 크러스트 사면을 밟으면 무거운 배낭 때문에 밀리고, 그렇다고 배낭을 내려놓을 수도 없고, 당연히 볼트를 설치할 수도 없고, 빠른 시간 내에 돌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만약 미끄러지면 확보지점이 워낙 취약해 둘 다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 등반에서 다행히 살아남아 지금까지 왔습니다. 만약 지금 그런 길을 개척하라고 하면 겁이 많아져서 안 했을 겁니다. 그리고 보면 저만큼 죽음에 많이 노출된 등반가는 드물 거란 생각이 듭니다. 1년 아니면 2년 간격으로 바윗길을 개척했으니 말입니다”

김기섭 씨는 올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영월 서강에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개척을 시작하여 후배들이 완성한 뜻 깊은 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노래 '봄날은 간다'와 같은 이름을 가진 등반 루트가 영월 서강에 잇ㅅ다.

이 루트 이름은 백설희의 노래 제목에서 빌려온 것이지만

이미 다치기 전에 개척하면서 마음속으로 이미 지어놓은 이름이다.

그 길에 서면 서강의 풍광이 압권인데

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강의 물 빛ㄱ갈이

ㅂ바져 죽고 싶을 정도로 환상적이며, 탐미적으로 아름답다.

지금도 눈 감으면 선연히 ㄷ더오르는 풍경의 치열함...

그러나 나는 이 길을 완성시키면 개척 등반에서 영원히 손을 ㄷ데야한다.

그게 어ㅈ절 수 없는 나의 운명이다.

그 날이 ㅂ발리 왓ㅅ으면 좋겟ㅅ다.

몸이 다치는 바람에 근 5년 넘게 정체된 그 길은

엉덩이에 ㄱ고리를 달고잇ㅅ는 느ㄱ김이어서

ㅂ발리 ㄱ고리를 ㄷ데어내고 싶은 게 나의 마지막 바람이다.

 

 

그의 생활비는 줄이고 줄여 월 백 만원 수준이다. 정부에서 지급해주는 장애인 수당은 월 15만원에서 20만원에 불과하다. 그는 이 수당으로 암보험과 화재보험에 가입했다. 복지사각지대에 있는 분이 화재로 목숨을 잃는 일이 생기자 자신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생각에 보험에 가입했다고 한다. 그에게 “백만 원이 생기면 무엇에 쓰고 싶으냐?” 물으니 “디지털 카메라가 갖고 싶은데, 요즘 자꾸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한다.

그의 생활비는 사고 이후 줄곧 동생들이 부담하고 있다. 3남2녀 중 장남인 그는 사고당시까지 미혼이었다. 앞으로 동생들마저 수입이 끊기게 되면 그 이후로는 정말 대책이 없다. 다소 잔인할지 모르지만 그에게 운명에 대해 물었다.

“사고는 신의 뜻이었다고 생각해요. 당시 죽었다면 며칠 슬퍼하고 말았겠죠. 그러나 질기게 살아남아 가정경제를 파탄시켰죠. 그러나 어차피 살아난 목숨이니까, 어차피 주어진 삶이자 생명이니까 받아들일 수밖에 없죠.”

신이 재주를 시기한 아름다운 시인 김기섭. 올해에는, 봄이 오면, 꽃피는 영월 서강에서 자신이 개척한 ‘봄날은 간다’를 지켜볼 수 있을까. 

김기섭 씨와 만나고 싶다면 그의 시를 진지하게 읽어보거나 그의 블로그(http://blog.daum.net/san62)를 찾아가면 된다. 그곳에서 그의 소박하지만 흥미로운 일상과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더러는 전인권의 ‘운명’을 들으며 그의 또는 나의 운명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 그와 ‘페친’이 된다면 그는 언젠가 조용히 찾아와 ‘좋아요’를 누르고 가거나 소박한 댓글을 달고 갈지도 모른다.

그가 “오랜 노력 끝에 이제는 술을 혼자 마실 수 있는 것은 물론 술도 따를 수 있다”며 기자의 잔에 술을 넘치지 않게 가득 따라주었다. 소주 한 잔에 설악의 토왕폭이 불쑥 솟아오르고 또 한잔 술에 영월 서강의 풍경이 떠오르는 듯 했다.

김기섭 씨는 몸이 다시 예전과 같이 건강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설악산 노적봉 '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을 등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아름다운 풍광 속에 다시 서고 싶다고. 그리하여 올 봄 속초로 여행을 가면 소공원에서 노적봉을 바라보겠노라고 했다. 소주병이 비워지는 사이 어느새 어둠이 깔렸다. 별이 술잔 위로 또 그의 눈동자 위로도 떨어졌다. 그를 닮아 빛나고 아름다운 별들이 무수히 쏟아지는 것 같기도, 어디선가 골짜기를 타고 하켄을 박는 우렁찬 해머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김기섭 약력

 

1962년생

1982년 설악산 울산바위에 ‘요반길’ 개척

1984년 한라산 남서벽 개척(확보물 전량 회수)

1989년 경원대학교 졸업

1989년 설악산 노적봉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개척

1993년 북한산 백운대 ‘시인 신동엽길’ 개척1994년 북한산 백운대 ‘녹두장군길’  ‘김개남장군길’ 개척1996년 설악산 토왕골 ‘경원대리지’ 개척1996년 북한산 노적봉 ‘경원대길’ 개척1997년 설악산 토왕골 ‘별을 따는 소년들’ 개척1998년 도봉산 자운봉 ‘배추흰나비의 추억’ 개척

1998년 진도 동석산 리지 개척 1999년 제주도 중문암장에 단피치 ‘어느 모델의 하루’ ‘푸른 물결의 선율’ 개척1999년 설악산 만경대 ‘별길’ 개척2001년 설악산 석황사골 ‘몽유도원도’ 개척

2001년부터 3년간 월간 마운틴 창간멤버이자 기자

2002년 소매물도 단피치 '풍경', '아름다운 날들', '쪽빛' 개척2003년 설악산 석황사골 ‘체 게바라길’ 개척2004년 북한산 노적봉 ‘즐거운 편지’ 개척2005년 홍천강 ‘별과 바람과 시가 있는 풍경’ 개척

2006년 코오롱등산학교 강사

2006년 11월 19일 인수봉 인수B코스에서 등반중 추락, 양손가락과 하반신 마비

2012년 영월 서강의 강변리지 '봄날은 간다' 개척(경원대 후배들이 완료) 

 

 


김성율 발행인  kimgmp@hanmail.net

<저작권자 ? CNA NEWS, >

 

 

 

마음으로 등반을 한땀한땀 더듬어가며

무한세상을 향한 그의 의지를 보는듯해서

참으로 많은 생각합니다!

 

욕심같지만

건강을 회복하여

다시 그가 산으로 향하는 모습

볼수 있기를 갈망하는 마음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을

한아름 가득담아봅니다

 

 

쇠랑_()_

 

 

 

 

 
다음검색
댓글
  • 15.10.19 17:39

    첫댓글 무순 운명의 장난 같은 실화 네요, 언젠가 많이 이야기 들업본 기억이 남니다. 그리고 인수 b는 우리도 한번 등반 했던 길 같습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