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31년도에 중구 남외동 248번지, 즉 지금의 병영1동 주민자치센터 바로 뒤쪽 병영장터의 한 모퉁이에 있는 대지 157평의 비교적 넓은 집에서 3대째로 태어났다. 병영 3·1만세운동 때 일제가 쏜 흉탄으로 4명이 순국한 자리가 바로 나의 집 대문 앞이었다.
일제가 저지른 태평양전쟁 4년간을 초등학교(학성공립심상소학교학성공립국민학교)에서 식민지 전시교육을 받다가 해방 5개월 전에 일본인 교장 이름의 졸업장을 받았다. 울산농업중학교에 다닌 6년간도 6·25가 터져 마지막 6학년 2학기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전세가 호전된 이듬해에 학성공원에서(학교 교사는 육군병원으로 사용) 주로 박관수 교장선생님의 논리학 강의로 보수교육을 받아 51년 7월5일자로 졸업장 420호를 우송받았다.
이를테면 나의 학창시절은 전쟁으로 얼룩진 불행한 시기였다고 할 것이다. 아무튼 나서 자란 20년간의 향수는 해가 쌓일수록 깊어만 갔다. 60여년이 지난 아련한 추억들을 더듬어 몇 가지만 적어 보기로 한다.
#산전물 예찬
▲ 동천의 철교 위에 선 울산농고 10기 향우들.(앞줄 오른쪽이 필자) 이들은 화봉·염포 등 이십리 학교길을 걸어서 다녔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의 양이 줄지 않으며 주변에 황톳물 홍수가 넘쳐나도 결코 흐려지지 않는 물. 여름엔 시원해서 좋고 겨울엔 따사롭기까지 하는 산전샘물은 시간마다 80섬의 물을 쏟아내어 400여년 동안 병영인 자자손손 몸속에 이어 흘러 올곧고 따사로운 심성을 심어 주었다.
먹는 물, 빨래 물, 농사 물로 어느 한방울도 헛되지 않게 정지말(井之末)로 굽이쳐 흘러 ‘자축인묘’땅에 복을 심는 땅띠(地支)에 이르니, 가내로 흘러 들어온 약수물과 만나 땅띠못을 이루어 송사리, 붕어, 미꾸라지 함께 기르며 수련꽃 고이 피워준 정(精)과 생(生)을 베풀었다. 산전 샘물은 비록 67년도에 그 수명을 다 하였지만 크나큰 은혜는 영남 제1이었다는 긍지를 안으며 병영인의 가슴속에 영원히 머물 것이다.
#간이역 애환
장난감 같은 가시황차(소형기차) 선로가 걷히고 동해남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병영에도 역이 생겼다.
기차가 서는 역이라고는 하나 시설이 보잘 것 없는 간이역이었다. 아마 울산 본역과의 거리가 2.3㎞로 가까워 그랬던 것 같다.
남행(부산행)이나 북행(청량리행)열차가 잠깐 섰다 가는 역이었지만 일방통행의 플랫폼에는 언제나 승객과 전송객으로 붐비었다.
방어진·남목 양남·정자 등지에서 버스로 오가는 기차승객들이 병영역을 즐겨 이용하였기 때문이었다.
가내골 철교 옆의 시그널이 떨어지고 학성공원 옆으로 북행열차의 검은 모습이 나타나자 안절부절 하던 한 여인이 기어이 고개를 떨구었다. 사랑하는 님을 떠나보낼 시각이 순간순간으로 다가오기 때문인 것 같았다. 증기를 뿜으며 잠깐 머물렀던 무정한 기차는 정든 님을 싣고 동천철교위로 사라져갔다. 여인은 기어코 수건을 눈에 갖다 대었다.
병영간이역은 이렇게 젊은 여인들을 가슴 태우며 눈물을 젖게 하는 애수의 정거장이기도 하였다.
#병영장터 이야기
한말 개화의 바람을 타고 열린 5일장(병영장은 3·8일장)으로 남밖에 널따란 장터가 마련되면서 갖가지 행사가 열리는 장소가 되었다.
역사적으로는 3·1순국의 현장이요, 큰 줄다리기, 서낭치기놀이 등 병영 특유의 전통을 이어가는 문화의 재현장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놀이터였다.
새벽같이 서기 시작한 저자는 팔딱팔딱 뛰는 정자생선이 있는가 하면 먼둥이 트기 바쁘게 나선 가대 나무지게도 있었다. 설이나 추석 때 대목장이 서면 단골로 오는 박상틀이 자리 잡는다.
아이들은 귀를 막으면서도 튀겨 나온 박상 줍기에 바빴고 전 앞에서 동냥질하는 품바각설이 또한 빼 놓은 수 없는 시골장터 풍경이었다.
해방이 되어 전기가 들어오자 가끔 활동사진이나 신파연극의 공연장이 되기도 하였다. 병영간선도로를 오르내리며 울려대는 북소리 나팔소리는 베름, 곽남 양 언덕에 메아리져 처녀들의 저녁 짓는 손을 바쁘게 하였다. 더벅머리 총각들은 공연장에 깔 방석을 들고 와 팔뚝에 입장 도장을 받고는 싱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