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릴...
내가 그와 함께 학교를 다녔고, 그와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그가 지휘를 공부할 때 그를 반주했던 일은 평생 잊지못할 영광이 되었다.
빈 국립음대 지휘과는 엄격하고 다양한(내 생각엔 너무나도 많은) 과목들을 좋은 점수(?)로 통과를 해야 졸업할 수 있다. 지휘과 학생들의 실습은 아주 오래전부터 '프로 아르테 오케스트라'라는 단체가 맡고 있다. 이 단체는 시간당 아주 작은 급여를 받으며 일을 할 수 있으며, 대다수는 나와 같은 그 당시의 학생들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했고, 또는 비정규직 음악가들이 많이 참여하는 단체였다. 그때 그 당시 학생이었던, 지금의 나의 보스인 리 신차오, 그리고 루체른 심포니의 상임이었고 지금은 벨기에 왕립 오케스트라 상임인 크리스티안 아르밍, 휴스턴 심포니와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방송교향악단 상임지휘자, 런던 필하모닉 수석 객원 지휘자인 안드레스 에스트라다 등등의 엄청난 지휘자를 반주할 수 있었다. 리 신차오와 크리스티안 아르밍...은 하거 클래스의 대표 학생이었고, 키릴과 안드레스는 라요비치 클래스의 대표 학생이었다.
그들은 그 당시 아직 지휘자가 아니었다. 나와 똑같은 학생이었고, 지휘를 하고 나면 바로 교수님께 꾸중을 듣는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그 누구도 상상 못할 꿈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키릴이 언젠가 쉬는 시간에 자판기 커피 마실 동전이 부족해 뻘쭘하던 나에게 동전 두 개(2쉴링)을 건내주며 한 말이 기억이 난다. "음악 전공중에 시작하기 가장 쉬운 전공이 지휘이고 가장 실패하기 쉬운 전공이 지휘다..." 나는 그말에 용기를 얻어 지휘 공부를 시작했다. 학교 학생이라는 어드벤티지와 친구들에게 도움받으며 공부해둔 덕분에 지휘과에 합격은 했지만, 시작하자마자 그만 두어야 했다.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많은 수업들과 첼로 연습을 할 시간이 도저히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피아노를 전공자처럼 치는 것은 둘째치고, 악보를 읽고 지휘봉을 움직이는 것은 둘째치고....(사실 악보 보고 지휘봉 움직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 같다.) 바닥을 기어야 할 정도로 자신을 버려야 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키릴, 신차오, 안드레스, 크리스티안도 너무나도 힘든 수업을 다 통과하고 지휘 실습을 할 때면 항상 옷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나타났다. 허름한 옷을 입어도 환하게 웃는 그들의 얼굴 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이겨냈는지... 지휘 공부를 시작하고서야 깨달았다. 나는 그들과 같을 수도 없고, 뛰어넘을 자신조차 없었기에 그만두었고, 지금도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디가서 나는 지휘를 했던 사람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는다. 나는 지휘자라고 불리우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고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빈 국립음대 지휘과는 6년(과거엔 8년)간 사람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다. 세상의 종말이 다가와도 차분할 수 있는 강심장과, 머리속이 아무리 복잡해져도 중심을 잃지 않는 냉철함으로 완전 무장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그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겸손함까지...
우리 학교를 나온 클라우디오 아바도, 주빈 메타, 주세페 시노폴리, 마리스 얀손스 등등... 그들을 비롯해서 지휘를 잘하건 못하건, 우리 학교 지휘과를 나왔다고 하면 나는 그 모든 고통을 이겨낸 그들에게 크나큰 존경심을 느낀다.
내가 부산에 온 이유도,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대표 학생으로 있었던 리 신차오가 부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그 당시 말 한 마디도 섞지 못했던 것은 먼 훗날이 지나도 후회할 것 같다.
수많은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며 생기는 것이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과 음악에 대하는 철학적인 자세이며 그를 바탕으로 생겨나는 겸손함일 것이다.
지긋지긋한 보수적인 학교를 졸업하고 받는 졸업장은 겸손함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실 키릴이 지휘를 잘 하는 지휘자였다고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실습중에 지휘보다도 말을 많이 해서 교수님께 지적을 많이 받았었다.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동안 돈 후안만 한 오케스트라에게 그가 했던 말을 난 잊을 수 없다.
"이 곡은 정말 어려운 곡이고, 저조차도 그 어려움에 정말 짜증나는 곡입니다. 저는 여기 올라온 것이 여러분들을 지휘하러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 주시고 저는 여러분을 끝까지 돕겠습니다."
사이먼 래틀 후임으로 키릴 페트렌코가 상임 지휘자로 내정되었다.
그와 함께 있었던 시간들은 내가 절대 자랑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에게 보내는 겸손한 박수와 찬사, 그리고 그의 계속적인 겸손함이 음악세계에 지속적인 긍정의 힘으로 남게 되었으면 좋겠다.
몇달 전, 우리 보스와 함께 객원 지휘자 초대에 관하여, 내가 키릴에게 쪽지 보내보겠다고 말했던 것이 정말 부끄럽다...
우리 보스가 사실 그 당시 지휘를 더 잘했는데... 키릴 다음 베를린 필 상임으로 리 신차오 화이팅!!
그리고 빈 국립음대 화이팅!!
<부산시립교향악단 첼로 수석 이일세>
첫댓글 오오..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겸손함...예술을 하던 안하던, 지휘를 하던 안하던 가장 중요한 덕목이겠지만...특히 눈에 들어오네요.
부산 문화회관의 박 모씨만 리신차오의 진가를 모르고 있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