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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어요?
정혁용 소설가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고만고만한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삶에서야 말로 심오함을 발견할 수 있는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직 2편의 단편 밖에 쓰지 못한 추리소설가인 저는...... 그래서 대중에 영합하는 글쓰기를 지향합니다
도끼(도스토예프스키)아저씨 정도 되면 글은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말해도 욕먹을 일은 없을 거다. 누가 자격을 논하겠는가. 이름만으로도 고전의 표상이라고 할 만한 작품들을 쓰신 분인데. 특히나 죄와 벌. 첫 장도 넘기기 전에, 왠지 머리를 싸매고 인간 본질의 바닥을 체험할 준비를 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니 말이다. 게다가 폼도 좀 난다.
-요즘 무슨 책 읽어?
-죄와 벌. 좋더군. 사상도 심오하고. 천 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라 조금 아쉽긴 했지만.
음! 밥맛이긴 하지만 폼은 좀 나는 것 같다. 게다가 이 아저씨의 얼굴은 또 어떤가? 병자같은 창백한 안색. 퀭하지만 어딘가 빛이 나는 것 같은 눈. 반쯤 벗겨진 머리는 오히려 더 그를 소설가처럼 보이게 한다. 굳게 다문 입술은 어쩐지 한마디를 해도 심오함에 깔려 죽을 것 같다. 짱이다. 이런 사람이 창작의 기법을 말해준다면 시비를 걸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딴지를 걸면 조용히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너, 나만큼 쓸 수 있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작가의 일기에서 조금 훔쳐볼 수 있을 뿐 창작에 대해 책을 쓴 적은 없다. 대개의 훌륭한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혹여 있다 해도 글쓰기는 가르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정도다.
음! 이 따위 당연한 사실을 말해주기 위해 책을 한 권 썼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되는 것이 대개의 사람들이 글 쓰는 것을 우습게 아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다(이유는 뒤에 상세히 설명하겠다).
앞서 도끼아저씨 이야기를 한 이유는 네 따위가 무슨 글 쓰는 것을 논한다고, 라며 딴지를 걸 사람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을 긋겠다. 어떻게 써야 되는가, 가 아니라 왜 쓰게 되었는가, 로. 그 정도는 말할 자격이 있지 않겠는가. 내가 잘 쓴다가 아니라 쓰게 된 이유를 말하는 것이니.
간혹 이런 질문을 받는다.
-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가 있어요?
미안하지만 이 질문은 두 가지가 틀렸다. 일단 묻는 사람을 잘못 택했고, 두 번째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어떤 고정관념이냐? 문자를 안다는 것을 글을 잘 쓸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혹시 피아노를 배우고자 한다면 학원에 가서 선생보고 어떻게 하면 잘 칠 수 있어요, 라고 묻겠는가?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는 안 물을 거다. 왜냐? 당연히 연습을 해야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아니까. 그림도 그렇지 않나? 운동도 마찬가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에 관해서만큼은 잘도 부끄럼도 없이 묻는다.
-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가 있어요?
그럼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음악, 미술, 체육처럼 열심히 연습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라고 얘기할 밖에. 다독, 다작, 다상량이라고. 대개의 글쓰기 책이 그런 내용이다. 그럼 또 한마디 하는 것이다.
-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물론 그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당신이 쓰고 있는가, 라고 질문하면 입을 다물 거다.
-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가 있어요?
라는 말 이면에는 이런 생각도 있다. 나도 언젠가는 영감을 받으면 소설 한 권 쯤은 뚝딱 쓸 수 있다고. 내 인생이 열권도 넘는 대하소설이니까, 라고.
실제로 내가 줄곧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었다. 밥맛도 이런 밥맛이 없었다. 하지만 지난 삼년간 이런저런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은, 한글 아는 것을 글쓰기 능력으로 착각한 것이고, 내 인생은 A4 용지 한 장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한글 아는 것을 글쓰기 능력으로 착각하고 살았었다. 어딘가에서 갑자기 슈퍼맨이 나타나듯 영감이 벼룩의 눈꼽만큼만 떨어져도 소설 한 권은 뚝딱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 한글을 아니까. 나머지는 영감이 불러주는 대로 쓰면 되니까. 독서 좀 한다는 사람들 중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나? 나만 그랬던 건가? 아무튼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어서 나도 곧잘 묻곤 했다.
-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가 있어요?
그리고 속으로 생각하는 거다. 사실 영감만 떠오르면 하루에도 소설 한 권쯤은 써낼 능력이 있다는 걸 압니다마는. 웃긴 일이다. 건반을 치는 거야 누가 못하나? 악보를 보고 읽고 따라서 치는 게 어렵지. 붓질이야 누가 못하나? 안목을 만족시키기가 어렵지. 하지만 유독 글쓰기만큼은 쉽게 생각한다. 왜냐? 쉬워 보이기 때문이다. 피아노 연주를 듣는다고 해서 연주는 꿈도 안 꾸는 이유는 그 과정이 대충 짐작이 가기 때문인데, 글쓰기는 그렇게 안보이기 때문이다. 모니터와 키보드만 있으면 되겠거든. 아니면 연필이나 종이라도. 나머지야 평생 접해본 것들 아닌가. 소설이고 시고 수필이고 간에. 기껏 문자 나열하는 게 어려워 보일 리가 없다. 게다가 난 감수성도 예민하니까 썼다하면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석유 시추하듯 빼낼 것 같아 보인다. 그러니 묻는 것이다.
-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가 있어요?
없다. 이유는 앞에서 설명했다. 음악이나 미술은 그런 거 안 물으면서 글은 왜 묻나? 묻는 이유는 나도 쓰기만 하면 얼마든지 잘 쓸 수 있다는 본인만의 근거 없는 자만심 때문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몇몇은 정말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는지, 제대로 된 길을 노력해서 가고 싶어 묻는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잘 쓰는 것은 모르겠지만 아마추어에서 듣보잡 작가가 되는 과정과 그 사이의 감정과 안목변화 정도는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도 독자에서 출발해 듣보잡 작가로서의 초년시절을 보내고 난 뒤에야 비로소 대가가 되는 거다. 대가의 길은 가 본적이 없으니 말해줄 수 없다. 나도 무척이나 궁금하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작가로서의 출발선상에 서는 방법정도는 알지 않겠는가. 일단 그 선상에 서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의 얘기다. 읽으면서 공감이 되면 그 방식을 선택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1. 나에게 재능이 있는가?
나는 노력하면 된다는 사고를 경멸한다. 구라일 뿐이다.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모두가 학창시절에 공부 잘했게. 그런데 어디 그런가? 당사자들이야 노력을 안 해서 그렇다고 하지만 사실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무리 쥐어짜도 노력이 안 나와서 그랬던 거다. 왜? 안 맞으니까. 책만 보면 머리에 쥐가 내리고 딴생각이 드는데 공부가 될 리가 없다. 머리가 좋아도 계속 해야 느는 게 공부인데, 억지로 하다말고를 반복하는데 잘 되리가 있겠는가?
여기서 보통 사람들의 착각. 노력은 열심히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에게 맞는 일일 경우라는 전제가 있어야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사막에서 삽질한다고 물이 나올 리가 없다. 허리 아프고 손바닥만 까질 뿐이다. 보통 부모들이 노력하면 된다고 공부를 강요하는데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그저 웃길 뿐이다. 중간 정도라면 몰라도 어느 정도의 레벨에 들려면 재능이 없으면 안 된다. 아무나 김연아나 최연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솔직히 다른 분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왜 유독 공부는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지 모르겠다. 무슨 근거로? 공부도 하나의 재능일 뿐인데 말이다.
근데 이 재능이란 건 또 뭔가? 내 생각에 재능이란 그 일을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학창시절을 보라. 공부 잘 했던 아이들이어떤 유형이었는지. 당연히 책상머리에 오래 앉아 있던 아이들이었다. 공부하면서. 모두가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라는 부류는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학습을 하는 것이 견딜만한 일인 아이들이었을 거다. 공부하는 게 별로 괴로운 일이 아닌. 예를 공부로 들었을 뿐 모든 일이 마찬가지다. 재능에 대한 이런 일화가 있다.
모파상이 플로베르를 찾아가서 자신의 소설을 보여주며 물었다.
- 선생님. 제가 재능이 있을까요?
플로베르가 말했다.
- 자네가 재능이 있는지는 모르겠네. 그러나 잊지 말게. 재능이란 오래 참고 견딜 수 있는 능력일 뿐이란 걸.
흔히 재능이라고 하면 뭔가를 배우지도 않았는데 잘 하는 것, 남들보다 빨리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틀린 건 아니지만) 그 보다는 견딜 수 있는 힘을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일이 년, 혹은 십년 먼저 한다고 해서 크게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테크닉은 시간이 지나면 대개 비슷해진다. 문제는 무엇을 선택했건 그 일을 계속 하는 것이 재능이다. 잘하건 못하건 간에. 그럼 그 지속을 계속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될까?
즐거워야 된다. 이를 악물고 피눈물을 흘리며 악전고투하면서 가도 상관은 없지만, 매일 매일을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낸다면, 모르겠다. 나 같으면 괴로워서 못 살 것 같다. 게다가 어떤 일에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대개 그 일이 너무 좋아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하다 보니 그 경지에 오른 거지 노력하면 된다고 억지로 자기 최면을 걸어서 간 것은 아닐 거다. 그런 인생을 누가 견딜 수 있겠는가?
여기서는 글을 말하고 있으니, 일단 독서를 좋아하는가, 생각하기를 좋아하는가, 인간을 관찰하기를 좋아하는가, 무엇보다 쓰는 행위를 좋아하는가, 정도가 재능이 되겠다. 책만 보면 머리에 쥐가 난다면 다른 길을 알아보는 게 낫다. 세상에 많은 길을 놔두고 뭣 때문에 글 쓴다고 허비한단 말인가. 본인만 괴로울 뿐이다.
2. 습관은 들어 있는가?
소설가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꿈은 서른아홉에 가졌지만, 사실 어릴 때부터 어렴풋하게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공대 출신에 주위에 소설은 고사하고 잡문이라도 하나 쓰는 사람이라곤 없었기 때문에 그저 막연히 꿈만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글을 쓰겠다는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한 줄도 쓰지 않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 때의 나는 무진장 노력하고 있었다. 거의 책을 달고 살았으니까. 공부는 뒷전이었다. 소설이고 철학이고 역사고 간에 닥치는 대로 읽고 살았다. 일단 기본적인 독서량을 그 시절의 나는 확보하고 있었던 거다.
이게 중요하다.
일단 글을 쓰려는 사람은 많이 읽어야 된다. 당연한 것이 프로 연주가도 매일 열 시간씩 연습을 하는데, 뭔가를 쓰겠다는 사람이 독서를 하지 않는다면 안 쓰겠다는 말과 똑같다. 하늘에서 별이나 떨어지길 기다리는 게 빠르다. 또 그냥 읽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저렇게 다른 방향으로 많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다면 일단 그 사람은 재능이 있는 거고 글쓰기의 세 가지 방법 중 두 가지를 마스터 한 거다. 다독, 다상량. 한 십년쯤 하다보면 그 때는 의식하지 않아도 습관처럼 반복하게 된다(모든 일이, 그래도 프로라는 이름이 붙으려면 한 십년쯤 해야 되지 않나?). 내 경우는 십대 때부터 줄곧 그래왔으니 삼십년쯤 된 것 같다. 세월만 따지면 벌써 대가가 되고도 남음이 있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재능이 박약한 것 같다. 아무튼 여기까지만 된다면 소설가든 시인이던 혹은 칼럼리스트나 수필가를 꿈꾸던 자신을 믿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누가 딴지를 걸어도 신경 쓸 필요 없다.
비로소, 노력하면 된다, 라는 영역에 진입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누가 더 즐겁게 자신의 뼈를 더 깎을 수 있느냐로 결정되는 영역인 거다.
(다독, 다상량의 방법은 다음에 세부적으로 쓰겠다.)
3. 테스트
아래는 모파상이 작가에 대해 묘사한 구절이다. 절절하게 와닿는다면 작가의 길을 선택해도 되지 않을까?
인생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인간은 행복하다. 즐기는 사람, 분수를 알고 따르는 사람은 행복하다. 세상에는 어떤 것이라도 사랑하고, 어떤 것이라도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런 사람들은 태양도 비도 눈도 안개도, 자기 집의 고요함도 떠들썩함도 사랑한다. 자기들이 보는 것, 하는 일, 하는 말, 듣는 것 등을 다 좋아한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은 손자나 아들 사이에 섞여 평온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다. 또한 어떤 사람은 관광 유람의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 어느 쪽이나 따분해지는 일은 없다. 인생은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배역을 연출하고 있는 즐거운 연극과도 같은 것이다. 인생은 특별히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하지는 않지만, 황홀하게 만드는 변화가 풍부한 재미있는 것이다.
언제나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으면서도 싫증이 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언제나 매일 똑같은 가구 속에서 똑같은 하늘 밑에서 똑같은 지평선을 앞에 하고 똑같은 몸짓으로 똑같은 일을 하고, 일이 끝나면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동물을 만나는 똑같은 거리에 나갈 끈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것도 변천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것이 따문하다는 것을 무한한 혐오감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렇지만 이와는 다른 사람들은, 도달할 수 있는 만족의 좁은 범위를 사념의 번뜩임으로 간파하고 행복의 허무함, 현세의 빈약하고 단조로운 기쁨에 낙담하곤 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서른 살이 되면 이미 이것으로 만사 끝장이 나고 만다. 이후로는 뭘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미 어느 것 하나도 그들을 위로해 주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들의 빈약한 환락을 한바퀴 돌아버린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단일한 감정이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것, 자신의 희열, 쾌락, 고뇌, 절말, 어느 것 하나도 당장에 관찰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작가에게 있어 감정의 노출이든 외침 소리든 키스든 솔직히 이뤄지는 일은 없다. 사람은 이유도 잘 모르고 반성도 하지 않은 채, 이해도 납득도 하지 않고 그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갑자기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지만, 작가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작가는 괴로워할 일이 있으면 그 번민을 노트에 적고 기억 속에 분류해 둔다. 작가라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매장하고 묘지에서 돌아와서도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상스런 기분이 드는구나. 고통의 도취와 같은 느낌이구나…..
작가는 느끼고 행동하고 사랑하고 괴로워하는 자기 자신을 관찰하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모네는 죽어가는 아내를 앞에 두고 그림을 그렸었다. 이게 이해가 된다면 당신의 작가적 역량은 굉장하지 않을까?)
P.S.
1. 이 칼럼의 목적은 내가 글을 잘 쓰니 한 수 배워 갈라우? 라는 게 아닙니다. 나도 글을 어느 정도는 쓰고 싶다, 비유하자면 노래방에 가서 안부끄러울 정도는 됐으면 싶다, 라는 분들과 듣보잡 작가라도 좋으니 일단 작가의 길로 들어서고 싶다, 라는 분들을 위해 일단 듣도잡 작가의 수준 정도만 되도 글쓰는 걸 두려워 하거나 표현이 딸린다거나 하는 일은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아무튼 듣보잡이라도 작가가 되는 방법을 설명하는 칼럼입니다. 그러니 문장은 이런 식으로 쓰시오, 같은 얘기는 일체 없습니다. 그건 저말고 대가들이 써놓은 글에서 배우시면 됩니다.
2. 열화와 같은 성원이 있든 없든 한 세번 정도 나눠서 연재를 할 겁니다. 제 주위에는 아무도 글쓰는 것과 관계된 사람이 없어서 혼자서 좌충우돌하면서 쓴다고 등단도 드럽게 늦어서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저같은 사람이 있다면 먼지만큼의 도움 밖에 안된다 하더라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3. 사실 창작에 관한 책은 직업적인 글쓰기를 하게 된 이후에 와닿습니다. 문제는 그 때는 자신도 프로기도 하고(잘 나가던 못 나가던) 이미 본인이 쓰면서 다 겪은 내용이라 고개나 끄덕이는 정도라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자주하는 말이지만 어젯밤 섹스가 아무리 좋았다 한들 듣는 이에게 나의 느낌까지 줄 수는 없는 거죠. 그래서 이 칼럼은 테크닉보다 작가가 될 때까지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4. 16일 안철수의 기자회견을 보고 욱, 하는 마음에 칼럼을 썼는데 오늘 서로의 기자회견 발표를 보면서 지웠다. 음~ 거의 네시간 동안 장문을 썼는데. 근데 어째 나라는 인간이 상당히 할일 없는 사람이라는 자괴감이 드는 이유는 뭘까?
첫댓글 상당히 솔직한 글이군요 .배웁니다 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