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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宣敎師, missionary]
요약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하기 위하여 이교(異敎)국가, 즉 타국에 파견되는 신부·목사.
본문
넓은 뜻으로는 직접 선교활동에 종사하는 자 이외에 교육·의료사업 등에 종사하는 성직자·평신도도 포함된다. 이집트·로마 등 이방(異邦)에 파송된 사도 바울로 이래, 역대 교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모양으로 국외로 나가 선교활동을 벌임으로써 그리스도교가 전세계에 전파되었다. 중세의 프란체스코회나 도미니크수도회의 수도사들의 선교활동, 16세기의 예수회 수도사들의 동양 전도활동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오늘날과 같은 선교활동의 기초를 닦은 사람은 영국에서 침례회 전도회를 조직(1792)한 W.캐리 목사이다. 그는 1793년에 인도 선교사를 자원, 단신으로 인도에 들어가 크게 활약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아 영국에서는 런던 전도회(1795)가, 미국에서는 미국 해외전도회가 창설되어(1810) 세계 각지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에는 1885년 미국감리회의 아펜젤러 목사와 장로회의 언더우드 목사가 선교사로 공식 입국을 하였지만, 그 이전에 영국 국교회의 토머스 선교사가 평양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바 있었고, 1884년에 알렌 의료선교사가 들어와 고종 황제의 어의(御醫) 노릇을 하는 한편 현대적 병원을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양의학(洋醫學)의 효시였다. 이제는 한국 선교사들도 상당수가 해외선교에 활동하는 상황인데, 한국 천주교회는 포교 200주년을, 프로테스탄트는 100주년을 넘어선 긴 선교 역사 속에서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이룩한 업적은 매우 크다. 선교사는 아직 포교되지 않은 미개척지에 찾아가 일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특별히 교육을 받고 파견되는데, 그 적(籍)은 모국 교회에 있어 대부분의 경우에 모국 교회에서 생활비를 지급받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파송 교단에 그 활동상황을 보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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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천주교
본문
↑ 한국천주교발원지기념비 / 경기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 성지.
18세기 후반에 이익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일부 학자들은 서학(西學)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넓혔는데, 그 중의 일부는 신앙의 차원에서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이벽(李檗)·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 등은 천주교를 신봉한 대표적인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유교의 근본원리인 충효(忠孝)를 바탕으로 하여 천주교의 구세복음사상(救世福音思想)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윤리체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중인(中人) ·상민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이리하여 천주교는 서양의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주체적으로 수용되어 신앙의 터전을 닦았으나, 신자가 늘어갈수록 유교적 전례문제와 기존 가치관과의 갈등을 보였다.
또한, 만민평등을 주장하여 양반 중심의 신분질서에도 위협을 주게 되어, 마침내 조정에서는 사교로 규정하여 금령을 내리고, 순조 때의 신유교난(辛酉敎難), 헌종 때의 기해교난(己亥敎難), 고종 때의 병인교난(丙寅敎難) 등 세 차례의 큰 박해를 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갈수록 번성하여, 1831년에는 조선교구(朝鮮敎區)가 독립되었고, 1845년에는 한국 최초로 김대건(金大建)이 신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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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金大建, 1822~1846]
요약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이다. 금가항 신학교에서 탁덕(鐸德)으로 승품(陞品),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어 미사를 집전하였다. 충남 강경에 잠입하여 각지를 순방하면서 비밀리에 신도들을 격려하고 전도하였다.
본관 김해
별칭 세례명 안드레아, 아명 재복·보명·지식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충남 당진군 우강면
↑ 김대건신부 추모탑과 동상 / 충남 당진군 우강면의 김대건신부 탄생지인 솔뫼 성지.
본문
성인. 본관 김해. 세례명 안드레아. 아명(兒名) 재복(再福)·보명(譜名)·지식(芝植). 충청남도 당진군 우강면(牛江面) 출생. 증조부 진후(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1814년 순교하고, 아버지 제준(濟俊)도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하는 등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7세 때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內四面)으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 모방(P.Maubant)에게서 세례를 받고 예비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상경하였다.
역관(譯官) 유진길(劉進吉)에게 중국어를 배운 후, 모방의 소개장을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조선 전교(傳敎)의 책임을 진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새로운 서양 학문과 프랑스어·중국어·라틴어를 배웠다. 1842년 수업을 끝낸 다음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는 고국에 밀입국을 시도하였다.
처음 의주를 거쳐 서울로 향하다가 감시가 심하여 되돌아갔고, 얼마 후 페레올 주교로부터 고국에 잠입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번에는 두만강변 경원을 거쳐 입국하려다가 또 실패하고, 바쯔자[八家子]로 돌아가 매스트르 신부 문하에서 신학을 연구하였다. 1845년(헌종 11) 단신으로 국경을 넘어 서울 잠입에 성공, 천주교 대탄압 이후 위축된 교세확장에 전력을 기울이다가 다시 프랑스 외방전교회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쪽배를 타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금가항(金家港) 신학교에서 탁덕(鐸德)으로 승품(陞品),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어 미사를 집전(執典)하였다. 8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주교와 함께 상하이를 떠나 충청남도 강경에 잠입하여, 서울을 향하여 각지를 순방하면서 비밀리에 신도들을 격려하고 전도하였다. 1846년 선교사의 입국과 선교부와의 연락을 위한 비밀항로 개설을 위하여 백령도 부근을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후 6회에 걸친 혹독한 고문 끝에 선교부와 신부들에게 보내는 편지 및 교우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쓴 후 26세로 순교, 경기 안성군 양성면(陽城面) 미산리(美山里)에 안장되었다. 1857년(철종 8) 교황청에 의하여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고, 1925년 교황청에서 시복(諡福)되어 복자위(福者位)에 오르고 1984년 4월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시 시성(諡聖)되어 성인위(聖人位)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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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李承薰, 1756~1801.2]
요약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領洗者).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 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했다. 두 번의 배교(背敎)와 복교(復敎)를 반복하며 결국은 순교하였다.
호 만천(蔓川)
별칭 세례명 베드로, 자 자술(子述)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강원도 평창(平昌)
↑ 만천이승훈묘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본문
세례명은 베드로. 강원도 평창(平昌) 출생. 자 자술(子述). 호 만천(蔓川). 1780년(정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심하다가 천주교인 이벽(李蘗)을 만나 천주교에 심취, 1783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인 부친을 따라 청(淸)나라에 가서 베이징[北京]천주교당 북당(北堂)에서 교리 증부를 한 뒤, 이듬해 예수회(會)의 루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해 교리 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을 가지고 귀국, 1785년 명례방(明禮坊:현 명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교회로 삼고, 가성직(假聖職)제도를 채택,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主日)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당국에 발각되어 체포되자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背敎)하고 척사문(斥邪文)을 공표하였으나, 1787년 복교(復敎)하여 자치적으로 교회활동을 개시, 자신이 주교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하였다.
1789년 평택현감(平澤縣監)에 등용되었는데 이듬해 베이징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가성직제도와 자치운동은 위법이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철폐해야 한다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회신을 받고 돌아오자, 그는 제사문제로 두 번째로 배교하였다. 그 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91년(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서학(西學) 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고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다시 배교하고 석방되었다가 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인이 되었는데, 이듬해 주문모를 맞아들인 죄로 최인길(崔仁吉) ·지황(池璜) ·윤유일 등은 붙잡혀 처형되고 그는 예산(禮山)에 유배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의금부(義禁府)에서 취조를 받고 이 해 2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사형되었는데, 1856년(철종 7)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伸寃)되었다. 그러나 1866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한 데 이어 1871년에는 증손 연구(蓮龜) ·균구(筠龜)가 순교함으로써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집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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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 [李檗, 1754~1786]
요약
조선시대 천주교 초기의 교도로 1784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전도부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이를 제지하는 아버지 부만(溥萬)의 자살로 천주교와 절연했다.
본관 경주(慶州)
호 광암(曠菴)
본명 덕조(德祚) 또는 벽(蘗)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경기도 광주
주요저서 《성교요지(聖敎要旨)》
↑ 광암이벽묘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본문
본관 경주(慶州). 호 광암(曠菴). 원명 덕조(德祚) 또는 벽(蘗). 경기 광주 출생. 1777년(정조 1)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등이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하면서, 가톨릭에 흥미를 느껴 1784년 이승훈(李承薰)에게 세례를 받고, 권일신(權日身)과 함께 전도부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1785년(정조 9) 신도 김범우(金範禹)가 적발됨으로써 서학(西學)운동이 표면화되자 아버지 부만(溥萬)은 그를 제지하려다가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이런 사태에 충격을 받아 배교자(背敎者) 이기경(李基慶)의 권고로 천주교와 절연하였는데, 이듬해 흑사병(黑死病)으로 죽었다. 그의 서학사상은 저서 《성교요지(聖敎要旨)》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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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환 [李家煥, 1742~1801]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남인 중 청남 계열의 지도자로 부상하였으나 반대파의 공격이 천주교 신봉 사실을 중심으로 집중되었고, 결국 1801년(순조 1) 벽파가 중심이 되어 시파를 숙청하고 천주교를 탄압할 때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본관 여흥(驪興)
호 금대(錦帶) ·정헌(貞軒)
별칭 자 정조(廷藻)
활동분야 정치
주요작품 《금대유고》
본문
본관 여흥(驪興). 자 정조(廷藻). 호 금대(錦帶) ·정헌(貞軒). 익(瀷)의 종손으로 남인 실학파의 중심에 있었다. 1771년(영조 47) 진사시, 1777년(정조 1)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성 ·개성유수 ·형조판서에 올랐다. 채제공(蔡濟恭)을 이어 남인 중 청남(淸南) 계열의 지도자로 부상하였으나 반대파의 공격이 천주교 신봉 사실을 중심으로 집중되었고, 결국 1801년(순조 1) 벽파가 중심이 되어 시파(時派)를 숙청하고 천주교를 탄압할 때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1784년 생질인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권철신(權哲身) ·정약용(丁若鏞) 등 주위 인물들 사이에 천주교 신앙이 확산될 때 이벽(李檗)과의 논쟁에서 설득당하여 한때 천주교인이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 이후 광주부윤 ·충주목사로 있으면서 천주교를 배척하는 내용의 가사 《경세가(警世歌)》를 지어 전파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하였으나 공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문장에도 뛰어난 당대의 학자로 널리 인정받았으며,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밝아 일식 ·월식이나 황도 ·적도의 교차 각도를 계산하고, 지구의 둘레와 지름에 대한 계산을 도설로 제시할 수 있을 만큼 정밀한 수준에 이르렀다. 문집으로는 《금대유고》가 있으나 대부분의 저술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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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우 [金範禹, ?~1786]
요약
조선 후기의 역관이자 조선 최초의 천주교 희생자이다. 1785년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등 남인 학자들이 그의 집에 모여 예배를 보다 당국에 발각되었다. 고문을 받고 단양으로 유배되었다가 사망하였다.
별칭 세례명 토마스
활동분야 종교
본문
세례명 토마스. 역관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1784년(정조 8) 이벽(李蘗)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 이승훈(李承薰)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두 동생을 입교시키고, 자신의 집에서 천주교 집회를 자주 가지는 등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1785년 이벽 ·이승훈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정약종(丁若鍾) ·권일신(權日身) 등 남인(南人) 학자 수십 명이 그의 집에 모여 예배를 보다 당국에 발각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양반·명문 출신이었므로 성명을 밝히지 않은 채 방면되었으나, 중인(中人)인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 단양(丹陽)으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이 1785년에 일어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1년 만에 죽음으로써 조선 최초의 천주교 희생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천주교가 사학(邪學)으로 규정되어 금지되었다. 한국 천주교의 첫 순교자는 윤지충(尹持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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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충 [尹持忠, 1759~1791]
요약
세례명 바오로. 조선 후기의 천주교도. 외사촌 정약용의 가르침을 받고 가톨릭교에 입교하였다. 어머니가 죽은 뒤 가톨릭 의식에 따라 위패를 폐하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하여 사형된 한국 최초의 가톨릭 순교자이다.
별칭 세례명 바오로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진산(珍山:현 충남 금산군)
본문
세례명 바오로. 진산(珍山:현 충남 금산군) 출생. 정약용(丁若鏞)의 외사촌. 1783년(정조 7) 서울 명례방(明禮坊:현 명동)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정약용의 가르침을 받고 가톨릭교에 입교(入敎), 세례를 받았다. 1789년 베이징[北京]에 가서 견진성사(堅振聖事)를 받고 귀국하였다. 천주교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낙향하여 신주(神主)를 태우고 신앙을 지켰다. 1791년 어머니 권(權)씨가 죽자 가톨릭 의식에 따라 위패를 폐하고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이 관가에 알려져, 전주(全州)에서 불효 ·불충 ·악덕 죄로 사형됨으로써 한국 천주교 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辛亥迫害:珍山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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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 [丁若銓, 1758~1816]
요약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천주교 선교사이다. 남인계(南人系)의 학자로 서학(西學)에 뜻을 두어 천주교에 입교한 후 벼슬에서 물러나 선교활동에만 힘썼다.
본관 나주
호 일성루·매심재·손암·연경재
별칭 자 천전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자산어보》 《논어난》
본문
본관 나주(羅州). 자 천전(天全), 호 일성루(一星樓)·매심재(每心齋)·손암(巽庵)·연경재(硏經齋). 약용(若鏞)의 형이다. 1790년(정조 1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부정자(副正字)·초계문신(抄啓文臣)에 이어 1797년 병조좌랑이 되었다. 이듬해 왕명으로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를 편찬하였다.
일찍이 남인계(南人系)의 학자로 서학(西學)에 뜻을 두어 천주교에 입교한 후 벼슬에서 물러나 선교활동에만 힘썼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편저로 《자산어보(玆山魚譜)》와 《논어난(論語難)》 《역간(易柬)》 《송정사의(松政私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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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모 [周文謨, 1752~1801.5.31]
요약
한국 최초의 외국인 신부. 베이징 신학교를 졸업하고 1795년 조선에 들어왔다. 탄압을 피해 서울에서 숨어 지내며 전교 활동을 폈다. 정약종, 황사영을 만났고 왕실 여인들에게도 세례를 베풀었다. 1801년 자수하여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국적 중국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중국 장쑤성쿤산현
본문
장쑤성[江蘇省] 쿤산현[崑山縣] 출생.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일찍 천주교에 입교하여 베이징신학교[北京神學校]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1794년(정조 18) 베이징주교[北京主敎] 구베아의 명을 받고 한국 잠입을 결행, 12월 23일 조선인 신자 지황(池璜)·윤유일(尹有一) 등의 안내로 조선에 입국 1795년 6월 초 서울에 도착하였다.
조정의 천주교 탄압이 혹심한 때에 서울에서 숨어 지내며 꾸준히 전교활동을 전개하였으나, 그해 6월 배교자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져 강완숙(姜完淑)의 집에 피신하였다. 이때 그를 도와 전교하던 최인길(崔仁吉)·지황·윤유일은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그후 6년 동안 강완숙의 집에 은신하면서 정약종(丁若鍾)·황사영(黃嗣永) 등 특출한 교우를 만났고, 왕실의 은언군(恩彦君) 부인 송씨(宋氏)와 그 며느리 신씨(申氏) 등을 입교시켜 세례를 베풀었으며, 충청도를 거쳐 전주까지 지방 전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관가의 수색망은 날로 좁혀지고 수많은 신자들이 잇달아 순교하자 1801년 3월 자수, 그해 5월 한강가 새남터(용산)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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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유일 [尹有一, 1760~1795.6.28]
요약
세례명 바오로. 조선 후기의 천주교도. 1795년 중국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피신시켜준 후 체포되어 당일 참형당하였다.
별칭 세례명 바오로
활동분야 종교
본문
세례명 바오로. 이승훈(李承薰) ·정약종(丁若鍾) ·권일신(權日身) 등이 자치적 조선교회를 표방하고 전도하던 때, 1789년 밀사(密使)로 동지사(冬至使)를 따라 베이징[北京]에 가서 구베아 주교에게 교리를 문의하는 서신을 전하고, 이듬해 베이징에서 M.로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뒤 3월에 귀국했다가, 9월에 다시 베이징에 가 로마 교황에게 한국에 신부 파송을 서신으로 요청하여 1794년 중국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맞아들였다. 이듬해 신부 주문모 체포령이 내리자 그를 피신시켜준 후 최인길(崔仁吉) ·지황(池璜)과 함께 체포되어 당일 참형당했으며, 온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큰 화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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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丁若鏞, 1762.6.16~1836]
요약
조선 후기 학자 겸 문신.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 · 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 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 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주요 저서는《목민심서》,《경세유표》등이 있다.
본관 나주(羅州)
호 다산(茶山)·삼미·여유당·사암·자하도인·탁옹·태수·문암일인·철마산초
별칭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시호 문도(文度)
활동분야 정치, 문학
출생지 경기 광주(廣州)(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주요저서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
↑ 다산 정약용 선생 동상 /
본문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籜翁)·태수(苔叟)·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안드레아.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출생이다.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長鬐)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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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종 [丁若鍾, 1760~1801.2.26]
요약
정약용의 셋째 형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1795년 이승훈과 함께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맞아들이고 한국 최초의 조선천주교 회장을 지냈다.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본관 나주
별칭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활동분야 종교·인문과학
주요저서 《주교요지(主敎要旨)》
주요작품 《성교전서(聖敎全書)》
↑ 선암정약종묘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본문
본관 나주(羅州).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의 아들. 약용(若鏞)의 셋째 형. 이익(李瀷)의 문인(門人)이 되어 성리학(性理學) 등을 공부한 후, 가톨릭 신자가 되어 1795년(정조 19) 이승훈(李承薰)과 함께 중국 청(淸)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맞아들이고, 1799년 서울로 옮겨와 문영인(文榮仁)의 집에서 살며 한국 최초의 조선천주교 회장을 지냈다. 전도에 힘쓰면서 《성교전서(聖敎全書)》 집필 중에 신유박해(辛酉迫害)를 만나 서소문 밖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저서로는 한자를 모르는 신도를 위해 우리말로 쓴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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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일신 [權日身, ?~1791]
요약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천주교인. 남인에 속한 학자로 양명학을 연구하였다. 1782년 이벽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청나라에서 영세를 받고 온 이승훈에게 최초로 영세를 받았다.
본관 안동
호 이암
별칭 자 성오, 세례명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활동분야 종교인
↑ 직암권일신묘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본문
본관 안동. 자 성오(省吾). 호 이암(移菴). 철신(哲身)의 동생. 세례명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남인(南人)에 속한 학자로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다가 1782년(정조 6) 이벽(李蘗)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入敎)하였다. 청(淸)나라에서 영세(領洗)를 받고 온 이승훈(李承薰)에게 최초로 영세를 받았다.
1785년 서울의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수차 집회를 가진 얼마 후, 이 집회가 발각되어 김범우는 처형되고 그 외는 양반 출신이라 하여 용서를 받았다. 1787년 한국인 교인들끼리 모여 가성직제(假聖職制)를 결정할 때 신부가 되고 1789년 교인 우모(禹某)를 베이징[北京]에 보내어 신부(神父)의 파견을 요청함과 동시에 성사(聖事)의 집행 및 재래의 제사(祭祀)의 가부를 문의한 결과, 교황이 임명하지 않은 주교는 성사를 집행할 수 없으며, 제사는 폐지해야 된다는 회답을 받았으나 계속 전도에 힘썼다.
1791년(정조 15) 전라북도 진산(珍山:錦山)의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 등이 제사를 폐한 일로 참형된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이승훈과 함께 제주도로 귀양 갔으나, 80세의 노모를 생각한 나머지 배교(背敎)하였다. 유배지가 바뀌어 예산(禮山)으로 유배를 가다가 심한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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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Robert Jermain Thomas, 1840.9.7~1866.9]
요약
영국의 선교사. 상하이에서 선교를 하다가 흥선대원군의 박해로 망명한 김자평 등 천주교도를 만났다. 조선 전교를 결심하고 1865년 백령도에 상륙해 2개월을 머물렀다. 이듬해 미국 상선 셔먼호를 타고 평양에 왔다가 미국 상인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별칭 한자명 최난헌
국적 영국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영국 스코틀랜드 웰스
본문
한자명 최난헌(崔蘭軒). 스코틀랜드 웰스 출생. 런던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한 후, 1863년 런던교회에 의해 중국에 파견되어 상하이[上海]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1865년 흥선대원군의 박해로 중국에 망명해 있던 김자평(金子平) 등 천주교도와 만나 조선 전교(傳敎)를 결심, 그해 백령도에 상륙하여 2개월을 지내다가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다시 미국 상선 셔먼호(號)에 편승, 평양에 왔다가 미국 상인들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1933년 그가 죽은 자리에 토머스 목사 기념예배당인 조왕교회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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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1859.7.19~1916]
요약
미국인 선교사이자 교육자로 한국 광혜원에서 물리·화학을 가르쳤으며 서울 새문안교회와 기독교서회를 세웠다.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였고 경신학교에 대학부를 개설,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다.
국적 미국
활동분야 종교·교육
출생지 영국 런던
주요저서 《말본》 《한국어 소사전》(1890), 《한국선교 23년》(1908)
↑ 선교100주년 기념탑 /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선교를 위해 인천에 들어온지 100년을 기념하는 조형물.
본문
한국명 원두우(元杜尤). 런던 출생. 1881년 뉴욕대학교를, 1884년 뉴브런즈윅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885년 H.G.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와서 광혜원(廣惠院)에서 물리·화학을 가르쳤다. 1887년 벽지전도부터 시작하고, 서울 새문안교회를 설립했으며, 1889년에는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를 창설하였다.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 그 회장 등을 역임하며 성서의 번역사업을 주관하는 한편, 1890년에 《한영사전》 《영한사전》을 출판하고, 1897년에는 주간지 《그리스도신문》도 창간하였다.
1900년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였으며, 1915년에는 경신학교(儆新學校)에 대학부를 개설,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다. 1916년 신병으로 귀국, 애틀랜틱시티에서 죽었다. 한국 개화기에 종교·정치·교육·문화 등 여러 분야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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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2.6~1902]
요약
미국 감리교 목사로 한국에 와서 활약한 선교사이다. 한국선교회를 창설하고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하였다. 암기 위주인 한국의 교육방식을 이해중심적인 교육방식으로 고치는 데 공헌하였다.
국적 미국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손더튼
↑ 헨리 게어하트 아펜젤러 목사 흉상 / 서울시 중구 정동제일교회에 소재.
본문
펜실베이니아주(州) 손더튼 출생. 원래는 장로교 신자였는데, 1876년 감리교로 옮겼다. 1882년 펜실베이니아주 랭카스터의 프랭클린 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을 거쳐 뉴저지주 매디슨의 드류대학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1884년(고종 21) 미국감리교 선교회에서 한국 선교사 임명을 받고 갓 결혼한 아내 D.엘라와 함께 1885년 초 한국에 와 한국선교회를 창설하고,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하였다.
1887년 한국 성경번역부가 생기자 H.G.언더우드, J.S.게일 등과 함께 성경 국역사업에 참여,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I ·II)의 번역을 마쳤다. 한편 1895년 월간잡지 《한국휘보:The Korean Repository》를 복간, 그 편집을 맡았다. 그는 암기 위주인 한국의 교육방식을 이해중심적인 교육방식으로 고치는 데도 크게 공헌하였다. 1902년(광무 6) 목포(木浦)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차 배를 타고 가다가 목포 앞바다에서 충돌사고로 익사하였다. 마포구 양화진외인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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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순교자
103위 한국 성인
이름(세례명) 성별 신분지위 연령 순교일 순교형식 순교지
1 김대건(안드레아) 남 사제, 김제준의 아들 26 1846. 9.16 군문효수 새남터
2 정하상(바오로) 남 신학생, 회장, 유 체칠리아의 아들 45 1839. 9.22 참수 서소문 밖
3 이호영(베드로) 남 회장 36 1838.11.25 옥사 서울
4 정국보(프로타시오) 남 상인 41 1839. 5.20 옥사 서울
5 김아기(아가타) 여 과부 66 1839. 5.24 참수 서소문 밖
6 박아기(안나) 여 부인 57 1839. 5.24 참수 서소문 밖
7 이소사(아가타) 여 과부 56 1839. 5.24 참수 서소문 밖
8 김업이(막달레나) 여 과부 53 1839. 5.24 참수 서소문 밖
9 이광헌(아우구스티노) 남 회장, 권희의 남편 53 1839. 5.24 참수 서소문 밖
10 한아기(바르바라) 여 과부 48 1839. 5.24 참수 서소문 밖
11 박희순(루치아) 여 동정궁녀 39 1839. 5.24 참수 서소문 밖
12 남명혁(다미아노) 남 회장, 이연희의 남편 38 1839. 5.24 참수 서소문 밖
13 권득인(베드로) 남 회장, 성물공 35 1839. 5.24 참수 서소문 밖
14 장성집(요셉) 남 환부 54 1839. 5.26 교수 서울
15 김(바르바라) 여 과부 35 1839. 5.27 교수 서울
16 이(바르바라) 여 1825 동정 15 1839. 5.27 교수 서울
17 김노사(로사) 여 1784 동정 56 1839. 7.20 참수 서소문 밖
18 김성임(마르타) 여 1787 과부 53 1939. 7.20 참수 서소문 밖
19 이매임(데레사) 여 1788 부인 52 1839. 7.20 참수 서소문 밖
20 김장금(안나) 여 1789 과부 51 1839. 7.20 참수 서소문 밖
21 이광렬(요한) 남 1795 양반 45 1839. 7.20 참수 서소문 밖
22 이영희(막달레나) 여 1809 동정 31 1839. 7.20 참수 서소문 밖
23 김누시아(루치아) 여 1818 동정 22 1839. 7.20 참수 서소문 밖
24 원귀임(마리아) 여 1819 동정 22 1839. 7.20 참수 서소문 밖
25 박큰아기(마리아) 여 1786 부인 54 1839. 9. 3 참수 서소문 밖
26 권희(바르바라) 여 1794 부인 46 1839. 9. 3 참수 서소문 밖
27 박후재(요한) 남 1799 상인(짚신장수) 41 1839. 9. 3 참수 서소문 밖
28 이정희(바르바라) 여 1799 과부 41 1839. 9. 3 참수 서소문 밖
29 이연희(마리아) 여 1804 부인 36 1839. 9. 3 참수 서소문 밖
30 김효주(아녜스) 여 1816 동정 24 1839. 9. 3 참수 서소문 밖
31 최경환(프란치스꼬) 남 1805 회장, 최양업신부의 아버지 35 1839. 9.12 옥사 서울
32 범 앵베르(라우렌시오) 남 1796 주교, 2대 조선교구장 43 1839. 9.21 군문효수 새남터
33 나 모방(베드로) 남 1803 사제 35 1839. 9.21 군문효수 새남터
34 정 샤스탕(야고보) 남 1803 사제 35 1839. 9.21 군문효수 새남터
35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남 1791 역관, 유대철의 아버지 49 1839. 9.22 참수 서소문 밖
36 허계임(막달레나) 여 1773 부인 67 1839. 9.22 참수 서소문 밖
37 남이관(세바스티아노) 남 1780 회장, 조증이의 남편 60 1839. 9.26 참수 서소문 밖
38 김유리대(율리에타) 여 1784 궁녀 56 1839. 9.26 참수 서소문 밖
39 전경협(아가타) 여 1787 궁녀 53 1839. 9.22 참수 서소문 밖
40 조신철(가롤로) 남 1796 마부, 성직자영입, 복사, 최영이의 남편 45 1839. 9.22 참수 서소문 밖
41 김제준(이냐시오) 남 1796 회장, 김대건신부의 아버지 44 1839. 9.22 참수 서소문 밖
42 박봉손(막달레나) 여 1796 과부 44 1839. 9.30 참수 서소문 밖
43 홍금주(페르페투아) 여 1804 과부 36 1839. 9.22 참수 서소문 밖
44 김효임(골룸바) 여 1814 동정 26 1839. 9.22 참수 서소문 밖
45 김(루치아) 여 1769 동정 71 1839. 9. 옥사 서울
46 이(가타리나) 여 1783 과부 57 1839. 9 옥사 서울
47 조(막달레나) 여 1807 과부 33 1839. 9 옥사 서울
48 유대철(베드로) 남 1826 동정, 유진길의 아들 13 1839. 10.21 교수 서울
49 유(체칠리아) 여 1761 과부 79 1839. 11.23 교수 서울
50 최창흡(베드로) 남 1787 회장 53 1839. 12.29 참수 서소문 밖
51 조증이(바르바라) 여 1782 부인 58 1839. 12.29 참수 서소문 밖
52 한영이(막달레나) 여 1784 과부 56 1839. 12.29 참수 서소문 밖
53 현경련(베네딕타) 여 1794 여회장 46 1839. 12.29 참수 서소문 밖
54 정정혜(엘리사벳) 여 1797 동정 43 1839. 12.29 참수 서소문 밖
55 고순이(바르바라) 여 1798 부인 42 1839. 12.29 참수 서소문 밖
56 이영덕(막달레나) 여 1812 동정 28 1839. 12.29 참수 서소문 밖
57 김(데레사) 여 1796 과부 44 1840. 1. 9 교수 서울
58 이(아가타) 여 1823 동정 17 1840. 1. 9 옥사 서울
59 민극가(스테파노) 남 1787 회장 53 1840. 1.20 교수 서울
60 정화경(안드레아) 남 1807 회장 33 1840. 1.23 교수 서울
61 허협(바오로) 남 1795 군인 45 1840. 1.30 교수 포청옥
62 박종원(아우구스티노) 남 1793 회장, 고순이의 남편 48 1840. 1.31 참수 당고개
63 홍병주(베드로) 남 1798 회장, 홍영주의 형 42 1840. 1.31 참수 서소문 밖
64 손소벽(막달레나) 여 1801 부인 39 1840. 1.31 참수 당고개
65 이경이(아가타) 여 1813 동정 27 1840. 1.31 참수 당고개
66 이인덕(마리아) 여 1818 동정 22 1840. 1.31 참수 당고개
67 권진이(아가타) 여 1819 부인 21 1840. 1.31 참수 당고개
68 홍영주(바오로) 남 1801 회장, 홍병주의 동생 39 1840. 2. 1 참수 당고개
69 이문우(요한) 남 1809 신학생, 회장 31 1840. 2. 1 참수 당고개
70 최영이(바르바라) 남 1818 부인 22 1840. 2. 1 참수 당고개
71 김성우(안토니오) 남 1795 회장 47 1841. 4.29 참수 당고개
72 현석문(가롤로) 남 1797 회장, 현경련의 동생 50 1846. 9.19 군문효수 새남터
73 남경문(베드로) 남 1796 회장 40 1846. 9.20 장살 서울
74 한이형(라우렌시오) 남 1799 회장 48 1846. 9.20 장살 서울
75 우술임(수산나) 여 1803 과부 44 1846. 9.20 교수 서울
76 임치백(요셉) 남 1803 사공, 옥중세례 43 1846. 9.20 교수 서울
77 김임이(데레사) 여 1811 동정 36 1846. 9.20 교수 서울
78 이간난(아가타) 여 1814 과부 33 1846. 9.20 교수 서울
79 정철염(가타리나) 여 1817 부인 30 1846. 9.20 교수 서울
80 유정률(베드로) 남 1837 상인(짚신장수), 회장 30 1866. 2.17 장하치명
81 장 베르뇌(시므온) 남 1814 주교 52 1866. 3. 7 군문효수 새남터
82 백 브르트니에르(유스토) 남 1838 사제 28 1866. 3. 7 군문효수 새남터
83 김 도리(헨리코) 남 1839 사제 27 1866. 3. 7 군문효수 새남터
84 서 볼리외(루도비코) 남 1840 사제 26 1866. 3. 7 군문효수 새남터
85 남종삼(요한) 남 1817 승지(정3품) 50 1866. 3. 7 참수 서소문 밖
86 전장운(요한) 남 1810 상업(출판공) 56 1866. 3. 9 참수 서소문 밖
87 최형(베드로) 남 1814 회장, 교회서적 출판, 최방제신학생의 형 53 1866. 3. 9 참수 서소문 밖
88 정의배(마르코) 남 1795 회장 72 1866. 3.11 군문효수 새남터
89 우세영(알렉시오) 남 1845 진사, 번역가, 정의배의 제자 22 1866. 3.11 군문효수 새남터
90 안 다블뤼(안토니오) 남 1818 주교, 5대 조선교구장 48 1866. 3.30 군문효수 보령갈대못
91 민 위앵(루가) 남 1836 사제 30 1866. 3.30 군문효수 보령갈대못
92 오 오메트르(베드로) 남 1837 사제 29 1866. 3.30 군문효수 보령갈대못
93 장주기(요셉) 남 1803 회장, 배론신학교 설립 64 1866. 3.30 군문효수 보령갈대못
94 황석두(루가) 남 1813 회장, 교회서적 출판 54 1866. 3.30 군문효수 보령갈대못
95 손자선(토마스) 남 1844 농부 28 1866. 5.18 교수 공주
96 정문호(바르톨로메오) 남 1801 원님 66 1866.12.13 참수 전주숲정이
97 조화서(베드로) 남 1815 농부 52 1866.12.13 참수 전주숲정이
98 손선지(베드로) 남 1820 회장 47 1866.12.13 참수 전주숲정이
99 이명서(베드로) 남 1821 농업 46 1866.12.13 참수 전주숲정이
100 한재권(요셉) 남 1836 회장 31 1866.12.13 참수 전주숲정이
101 정원지(베드로) 남 1846 농업 21 1866.12.13 참수 승장이
102 조윤호(요셉) 남 1848 농부, 교회서적출판, 조화서의 아들 19 1866.12.23 장살 전주
103 이윤일(요한) 남 1816 회장 45 1866.12.13 참수 대구 관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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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시복시성 추진중인 124위 명단입니다
이름(세례명) 성별 출생 신분지위 연령 순교일 순교형식 순교지
* 1 윤지충(바오로) 남 전라도 진산
(1759) 평신도지도자, 진사, 양반 32 1791.12. 8 참수 전라도 전주
* 2 주문모(야고보) 남 중국 소주
(1752) 신부 49 1801. 5.31 군문효수 한양 새남터
* 3 권상연(야고보) 남 전라도 진산
(1751) 학자, 양반 40 1791.12. 8 참수 전라도 전주
4 원시장(베드로) 남 츙청도 홍주
(1732) 양인 61 1793. 1.28 장사 충청도 홍주
* 5 윤유일(바오로) 남 경기도 여주
(1760) 평신도지도자, 밀사, 양반 35 1795. 6.28 장사 한양 포도청
* 6 최인길(마티아) 남 한양
(1765) 평신도지도자, 약관, 중인 30 1795. 6.28 장사 한양 포도청
* 7 지황(사바) 남 한양
(1767) 평신도지도자, 밀사, 양반 28 1795. 6.28 장사 한양 포도청
8 이도기(바오로) 남 충청도 청양
(1743) 도공 55 1798. 7.24 장사 충청도 정산
9 방(프란치스코) 남 충청도 면천 비장 1799. 1.21 장사 혹은 교수 충청도 홍주
10 박취득(라우렌시오) 남 충청도 면천 평신도지도자 1799. 4. 3 교수 충청도 홍주
11 원시보(야고보) 남 충청도 홍주
(1730) 양인 69 1799. 4.17 장사 충청도 홍주
12 정산필(베드로) 남 충청도 덕산 회장 참수 혹은 장사 충청도 덕산
13 배관겸(프란치스코) 남 충청도 당진 평신도지도자 1800. 1. 7 장사 충청도 청주
14 인언민(마르티노) 남 충청도 덕산
(1737) 학자, 양반 63 1800. 1. 9 장사 충청도 해미
15 이보현(프란치스코) 남 충청도 덕산
(1773) 양인 27 1800. 1. 9 장사 충청도 해미
16 조용삼(베드로) 남 독신 1801. 3.27 옥사 경기도 감영
17 최창현(요한) 남 1759
한양 회장, 중인 42 1801. 4. 8 참수 한양 서소문밖
18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남 1760
경기도 광주 회장, 양반 41 1801. 4. 8 참수 한양 서소문밖
19 홍교만(F. 하비에르) 남 1738
한양 학자, 양반 63 1801. 4. 8 참수 한양 서소문밖
20 최필공(토마스) 남 1744
한양 평신도지도자, 약업, 중인 57 1801. 4. 8 참수 한양 서소문밖
21 홍낙민(루가) 남 1751
충청도 예산 지평, 양반 50 1801. 4. 8 참수 한양 서소문밖
22 최창주(마르첼리노) 남 1749
경기도 여주 양반 52 1801. 4.25 참수 경기도 여주
23 이중배(마르티노) 남 양반 1801. 4.25 참수 경기도 여주
24 원경도(요한) 남 1774
경기도 여주 양반 27 1801. 4.25 참수 경기도 여주
* 25 윤유오(야고보) 남 평신도지도자, 양반 1801. 4.27 참수 경기도 양근
26 최필제(베드로) 남 1770
한양 평신도지도자, 약업, 중인 31 1801. 5.14 참수 한양 서소문밖
* 27 윤운혜(루치아) 여 연락원, 부인, 양반 1801. 5.14 참수 한양 서소문밖
28 정복혜(칸디다) 여 연락원, 과부, 양인 1801. 5.14 참수 한양 서소문밖
29 정인혁(타데오) 남 평신도지도자, 약업, 중인 1801. 5.14 참수 한양 서소문밖
30 정철상(가롤로) 남 평신도지도자, 양반 1801. 5.14 참수 한양 서소문밖
31 심아기(바르바라) 여 1783
경기도 광주 동정 18 1801. 4.초(음) 장사 한양 포도청
32 강완숙(골롬바) 여 1761
충청도 내포 회장, 부인 40 1801. 7. 2 참수 한양 서소문밖
33 강경복(수산나) 여 1762
연락원, 동정, 궁녀 39 1801. 7. 2 참수 한양 서소문밖
34 김현우(마태오) 남 1775
한양 명례방 평신도지도자, 중인 26 1801. 7. 2 참수 한양 서소문밖
35 문영인(비비안나) 여 1776
한양 연락원, 동정, 궁녀 25 1801. 7. 2 참수 한양 서소문밖
36 김연이(율리안나) 여 연락원, 부인, 양인 1801. 7. 2 참수 한양 서소문밖
37 이현(안토니오) 남 양반 1801. 7. 2 참수 한양 서소문밖
38 최인철(이냐시오) 남 평신도지도자, 중인 1801. 7. 2 참수 한양 서소문밖
39 한신애(아가타) 여 연락원, 부인 1801. 7. 2 참수 한양 서소문밖
* 40 윤점혜(아가타) 여 회장, 동정, 양반 1801. 7. 4 참수 경기도 양근
41 정순매(바르바라) 여 1777
경기도 여주 동정, 양반 24 1801. 7.3(4) 참수 경기도 여주
42 김이우(바르나바) 남 평신도지도자, 중인 1801. 5.(음) 장사 한양 포도청
43 이국승(바오로) 남 1772
충청도 음성 선생, 양반 29 1801. 5.말(음) 참수 충청도 공주
44 김광옥(안드레아) 남 면장, 중인 1801. 8.25 참수 충청도 예산
45 김정득(베드로) 남 중인 1801. 8.25 참수 충청도 대흥
46 한정흠(스타니슬라오) 남 1756
전라도 김제 선생, 양반 45 1801. 8.26 참수 전라도 김제
47 김천애(안드레아) 남 1760
종, 천민 41 1801. 8.27(28) 참수 전라도 전주
48 최여겸(마티아) 남 1763
전라도 무장 양반 38 1801. 8.27 참수 전라도 무장
49 김종교(프란치스코) 남 1754
한양 의원, 중인 47 1801.10. 4 참수 한양 서소문밖
50 홍필주(필립보) 남 1774
충청도 덕산 평신도지도자, 양반 27 1801.10. 4 참수 한양 서소문밖
* 51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남 1756
전라도 전주 회장, 양반 45 1801.10.24 능지처참 전라도 전주
52 윤지헌(프란치스코) 남 1764
전라도 진산 평신도지도자, 양반 37 1801.10.24 능지처참 전라도 전주
* 53 유중철(요한) 남 1779
전라도 전주 동정부부, 양반 22 1801.11.14 교수 전라도 전주
54 유문석(요한) 남 1784
전라도 전주 동정, 양반 17 1801.11.14 교수 전라도 전주
55 현계흠(바오로) 남 1763
한양 평신도지도자, 약업, 중인 38 1801.12.10 참수 한양 서소문밖
56 김사집(프란치스코) 남 1744
충청도 덕산 양인 58 1802. 1.25 장사 충청도 청주
57 손경윤(제르바시오) 남 1760
한양 회장, 약업, 양인 42 1802. 1.29 참수 한양 서소문밖
58 이경도(가롤로) 남 1780
한양 곱사등이, 양반 22 1802. 1.29 참수 한양 서소문밖
59 김계완(시몬) 남 복사, 약업, 양인 1802. 1.29 참수 한양 서소문밖
* 60 정광수(바르나바) 남 평신도지도자, 양반 1802. 1.29 참수 경기도 여주
61 홍익만(안토니오) 남 지도자 1802. 1.29 참수 한양 서소문밖
62 한덕운(토마스) 남 1752
충청도 홍주 50 1802. 1.30 참수 광주 남한산성
63 황일광(시몬) 남 1757
충청도 홍주 천민 45 1802. 1.30 참수 충청도 홍주
64 홍인(레오) 남 1758
한양 양반 44 1802. 1.30 참수 경기도 포천
65 권상문(세바스티아노) 남 1769
경기도 양근 평신도지도자, 양반 33 1802. 1.30 참수 경기도 양근
* 66 이순이(루갈다) 여 1782
한양 동정부부, 양반 20 1802. 1.31 참수 전라도 전주
67 유중성(마태오) 남 동정, 양반 1802. 1.31 참수 전라도 전주
68 김진후(비오) 남 1739
충청도 면천 하급관리, 양반 75 1814.12. 1 옥사 충청도 해미
69 김윤덕(아가타 막달레나) 여 부인 1815. 4.말(음), 5.초 장사 경상도 대구
70 김시우(알렉시오) 남 1782
충청도 청양 독신, 양반 33 1815. 5.(음), 6. 옥사 경상도 대구
71 최봉한(프란치스코) 남 1815. 5.(음) 옥사 경상도 대구
72 서석봉(안드레아) 남 1815. 말 옥사 경상도 대구
73 김강이(시몬) 남 평신도지도자, 중인 1815.12. 5 옥사 강원도 원주
74 김희성(프란치스코) 남 1765
충청도 예산 중인 51 1816.12.19 참수 경상도 대구
75 구성열(바르바라) 남 부인 1816.12.19 참수 경상도 대구
76 이시임(안나) 여 1782
충청도 덕산 과부, 양반 34 1816.12.19 참수 경상도 대구
77 고성대(베드로) 남 독신 1816 12.19 참수 경상도 대구
78 고성운(요셉) 남 독신 1816.12.19 참수 경상도 대구
79 김종한(안드레아) 남 평신도지도자, 양반 1816.12.19 참수 경상도 대구
80 김화춘(야고보) 남 1816.12.19 참수 경상도 대구
81 조숙(베드로) 남 1787
경기도 양근 평신도지도자, 동정부부, 양반 32 1819. 8. 3 참수 한양
82 권(데레사) 여 1784
경기도 양근 동정부부, 양반 35 1819. 8. 3 참수 한양
83 이경언(바오로) 남 1792
한양 양반 35 1827. 6.27 옥사 전라도 전주
84 박경화(바오로) 남 1757
충청도 홍주 양반 70 1827.11.15 옥사 경상도 대구
85 김세박(암브로시오) 남 1761
한양 중인 67 1828.12. 3 옥사 경상도 대구
86 안군심(리카르도) 남 1774
충청도 보령 61 옥사 경상도 대구
87 이재행(안드레아) 남 1776
충청도 홍주 63 1839. 5.26 참수 경상도 대구
88 박사의(안드레아) 남 1792
충청도 홍주 양반 47 1839. 5.26 참수 경상도 대구
89 김사건(안드레아) 남 1794
충청도 서산 중인 45 1839. 5.26 참수 경상도 대구
90 이일언(욥) 남 1767
충청도 홍주 72 1839. 5.29 참수 전라도 전주
91 신태보(베드로) 남 평신도지도자 1839. 5.29 참수 전라도 전주
92 이태권(베드로) 남 1782
충청도 홍주 양인 57 1839. 5.29 참수 전라도 전주
93 정태봉(바오로) 남 1796
충청도 덕산 43 1839. 5.29 참수 전라도 전주
94 김대권(베드로) 남 1839. 5.29 참수 전라도 전주
95 최해성(요한) 남 1811
충청도 홍주 회장 28 1839. 9. 6 참수 강원도 원주
96 김조이(아나스타시아) 여 1789
충청도 덕산 부인, 양인 50 1839. 10. 옥사 전라도 전주
97 심조이(바르바라) 여 1813
경기도 인천 부인, 양반 26 1839.11.11 옥사 전라도 전주
98 이봉금(아나스타시아) 여 동정, 양인 1839.12. 5(6) 교수 전라도 전주
99 최(비르짓다) 여 1783
충청도 과부 56 1839.12. 8(9) 교수 강원도 원주
100 홍재영(프로타시오) 남 1780
충청도 예산 평신도지도자, 양반 60 1840. 1. 4 참수 전라도 전주
101 최조이(바르바라) 여 1790
경기도 여주 과부, 양반 50 1840. 1. 4 참수 전라도 전주
102 이조이(막달레나) 여 1808
과부 32 1840. 1. 4 참수 전라도 전주
103 오종례(야고보) 남 1821
충청도 은진 양반 19 1840. 1. 4 참수 전라도 전주
104 이성례(마리아) 여 1801
충청도 홍주 부인, 양반 39 1840. 1.31 참수 한양 당고개
105 오반지(바오로) 남 1813
충청도 진천 53 1866. 3.27(26) 교수 충청도 청주
106 신석복(마르코) 남 1828
경상도 밀양 상업 38 1866. 3.31(18) 교수 경상도 대구
107 김원중(스테파노) 남 1866.12.16 교수 충청도 공주
108 장(토마스) 남 1815
경기도 수원 51 참수 충청도 청주
109 구한선(타데오) 남 1844
경상도 함안 복사, 중인 22 장사 경상도 함안
110 정찬문(안토니오) 남 1822
경상도 진주 양반 45 1867. 1.25 장사 경상도 진주
111 김기량(펠릭스베드로) 남 1816
제주도 함덕 무역업, 중인 51 1867. 1. 교수 경상도 통영
112 박상근(마티아) 남 1837
경상도 문경 아전, 중인 30 1867. 1. 교수 경상도 상주
113 송(베네딕도) 여 1798
충청도 충주 양반 69 한양
114 송(베드로) 남 1821
충청도 충주 양반 46 한양
115 이(안나) 여 1841
경기도 인천 부인 26 한양
116 이정식(요한) 남 1794
경상도 동래 회장, 장교 74 1868. 여름 참수 경상도 동래
117 양재현(마르티노) 남 1827
경상도 좌수 41 1868. 여름 참수 경상도 동래
118 이양등(베드로) 남 회장, 상업 1868. 9.14 참수 경상도 울산
119 김종륜(루가) 남 1819
충청도 공주 양반 49 1868. 9,14 참수 경상도 울산
120 허인백(야고보) 남 1822
경상도 김해 농부 46 1868. 9.14 참수 경상도 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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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세례명) 성별 출생 신분지위 연령 순교일 순교형식 순교지
121 박(프란치스코) 남 1835
충청도 33 1868. 9.28(29) 경기도 죽산
122 오(마르가리타) 여 부인 1868. 9.28(29) 경기도 죽산
123 박대식(빅토리노) 남 1812
경상도 김해 56 1868.10.12 참수 경상도 대구
124 윤봉문(베드로) 남 1852
경상도 경주 회장 36 1888. 4. 1 교수 경상도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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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 명의 피로 증거한 해미성지(충남 서산시 해미면)
해미는 일찍이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였다. 1418년에 병영이 설치되었고,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된 해미 진영(사적 116호)은 1790년대로부터 백 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무려 3천 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이다.
1790년대에 순교한 박취득(라우렌시오)을 비롯한 순교자들은 1870년대에까지 수십 명이 이름을 남겨놓고 있지만 그외의 수천 명의 이름은 그들의 목숨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해미의 땅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쓰러져 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799년에 이보현과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14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가 10년 옥고 후 옥사하였으며, 충청도 지방의 대대적 박해 시기였던 1815(을해)년과 1827(정해)년 기간 동안에는 손여옥 등 수많은 신자들이 집단으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주로 면천, 덕산, 예산 등지에서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을 해미 진영 군졸들이 수시로 급습하고 재산을 약탈한 후 신자들을 체포하여 해미 진영 서문 밖 사형장에서 처형하였다.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에 신분을 고려하여야 할 사람들(양반층)은 상급 치소인 홍주, 공주, 서울로 이송되었으며, 대부분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심리 절차(기록) 없이 해미에서 처형되어, 글자 그대로 무명 신자들이 수천 명 순교한 곳이 해미 땅이다.
1866(병인)년 이후 몇 년 간의 대박해 동안에만 순교한 숫자를 1천여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790년대부터 희생된 순교자가 3천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박취득(라우렌시오)등 수십 명 뿐이다.
성지관리 : 해미 성지 관리소 (0455-688-3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