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죽일 음모와 추악한 결탁에 있은 가룟 유다
마태복음 26장 1-5절, 14-16절 / 1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3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 14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병행구절. 막 14:1-2, 10-11; 눅 22:1-6; 요 11:49-53)
예수님께서는 이틀 후 앞으로 다가온 유월절이 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배신당하여 팔림으로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임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유대인의 시각으로 화요일 늦은 때 또는 수요일이 시작되는 시점, 곧 화요일에서 수요일로 넘어가는 어간에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본문과 그리고 병행 구절은 이제 그 실행으로 예수님을 죽일 음모가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것에서 있은 일을 알려줍니다. (1) 유월절을 이틀 앞둔 시점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관정)에 모여 들었습니다. 이는 궤계 – 간사한 속임수, 흉계 - 로 예수님을 잡아 죽일 방책을 강구하고자 의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의논에서 이런 말 저런 말이 오고 갔습니다만,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그를 따르는 백성들을 흩어지게 하여 잠재울 수 있을 것이란 제안을 따릅니다. 하지만 유월절 기간에는 예수님을 잡아 죽일 것을 말자고 의논을 모읍니다. 유월절 기간에는 유대 땅을 비롯하여서 각처에서 절기를 지키러 오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 중에서 예수님을 지지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기에 예수님을 체포해서 죽이려 하다가는 자칫 그들을 흥분시켜 민란을 일으킬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2) 그러기에 다만 백성들 그 누구라도 예수님이 있는 곳을 알면 신고할 것을 명령하는 것으로 일단 조치하였습니다. (3) 그러한 까닭에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소식은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4) 그러한 때에 사단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 미혹하여 주님이신 예수님을 배반하도록 그의 마음을 충동을 일으킵니다. (5) 그러자 돈에 탐심이 있는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넘겨주겠다며 그 대가로 얼마를 줄 것인지를 흥정함으로써 주님이신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6) 가룟 유다의 제안을 받은 대제사장들은 무척 기뻐하며 그에게 은 삼십1)을 주겠다고 제시하였습니다. (7)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댓가로 받는 은 삼십에 만족해 하며 예수님을 넘겨줄 것을 약속하고는 그때부터 예수님을 넘길 기회를 찾으며 적당한 장소를 은밀히 물색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의 한 사람인 가룟 유다가, 예수님과 3년 반을 함께 동거하고 동행하며 동락했던 제자가 은 삼십이란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배반에 있는다는 것을 생각이나 할 수 있는 것이겠는지요.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있게 되었는지를 선지자의 예언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품삯)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품삯)를 삼은지라”(슥 11:12) 라고 한 선지자의 예언인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것에서 있는 일이었습니다.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막 14:49), 또는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3:38, 19:36)는 표현을 보게 되는데, 예수께서 예고하신 대로 유월절이 되면 제자에게 배반당하여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팔린 자가 됨으로써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달린 자가 되어 죽임 당하는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감에 있으신 것은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에서 입니다(눅 24:26-27). 그러한 것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있을 일로 작정된 일인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자신을 죽일 음모를 갖고 꾸미는 궤계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면서도 이를 거부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십니다.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이 마귀라고도 불리는 사단의 시험을 받아 범죄 함으로 타락하자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가지신 영원한 작정에 의해 원시복음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첫 복음인 여자의 씨(자손)에 의해 보내실 메시야를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그 약속이 주어진 이래 사단은 메시야에 의해 자신이 당할 결말인 메시야의 발에 짓이겨 머리가 부숴질 처지를 잘 알기에 아담의 후손이 그 메시야에 믿음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대적해 왔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왕국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 왕과 맺은 언약을 통해서 메시야를 언약하신 자손과 그 왕국에 이스라엘 왕과 그의 백성들의 믿음이 있게 하셨습니다만, 이방의 산당과 우상을 받아들여 숭배하도록 미혹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일 궤계를 짜내는 음모를 갖는 것으로까지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을 요구하기까지 하며 그 목적을 이룹니다.
이는 사단이 의도한 대로 다 되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4, 9) 라고 하신데 따른 것입니다. 이것에 따라 악한 사단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꽉 잡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대적하며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를 포섭하여 예수님을 배반하게 함으로써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만, 이는 하나님께서 품으신 영원한 작정을 이루어 가시는 것에서 있게 되는 악한 사단과 그 사단을 따르는 악한 추종자들의 활동을 허용하는 것에 있으신 것이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악한 사단과 그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인 악을 행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따르며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과 죽임을 당하는 순종에 있으셨습니다.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또는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에 의해 그리스도께 있는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에 있는 그의 제자인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한 원리로 작용합니다. 사단의 궤계가 쓰이고 있는 전략은 그리스도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1) 라고 말씀하셨으며, 이 말씀을 따르는 사도 바울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으며,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자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과 우리가 받는 고난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지 않으며,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은 자에게서는 그리스도를 인하여 고난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에 있지 않으며, 그 믿음을 인하여 갖는 순종에도 있지 않으며, 그 순종에 있지 않음으로 고난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으며,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자에게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묶여 있음으로 해서 그리스도에게서 있은 일이 그분 안에 있는 우리에게서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름에 있는 순종에 있으셨듯이, 우리에게서도 주님의 뜻을 따름에 있는 순종에 있으며,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름에서 고난과 죽임을 당하셨듯이 또한 우리에게서도 주님의 뜻을 따름에서 고난과 죽임도 함께 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나는 나를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특정 순간을 맞으니 내 안에는 분노가 차올라 생각과 감정을 지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성령을 의지하며 인도하시길 구합니다. 은혜를 구합니다. 살려주시길, 그리고 도와주시길 구합니다.” 그래야 하지 않겠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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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르만 리델보스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아넘기는 대가로 받기로 한 은 삼십을 미화로 약 25달러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이 액수는 우리나라 돈으로는 현 시점에서 1달러를 1,200원으로 환산할 경우 30,000원에 불과한 아주 적은 금액인데, 예수님 당시의 은 삼십은 이 금액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은 삼십은 은 30세겔을 말하는 것이다. 가룟 유다가 이처럼 은 삼십(세겔)을 받고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넘긴 것은 슥 11:32의 예언의 성취에 따른 것으로, 출 21:32에 의하면 히브리인 종 한 사람을 매매하는 몸값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런가 하면 레 27:3-4에 의하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로 서원한 20세에서 60세의 성인 된 사람에게 정해진 몸값이 성소에서 사용하는 세겔로 은 50세겔이며, 여자의 경우에는 30세겔인데, 예수님은 남자의 몸값에 미치지 못하는 여자의 몸값으로 정해져 넘겨졌다. 1세겔은 로마시대의 기본 화폐로 그 가치는 그리스의 화폐인 드라크마에 거의 맞먹는 데나리온의 4배인 4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금액이며,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므로 1세겔은 노동자의 4일치 품삯에 해당한다. 따라서 은 30세겔은 노동자의 120일(4개월) 치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한편 가룟 유다가 받은 은 삼십에 대한 구체적인 화폐의 명칭이 말해지지 않고 있으므로 이 금액은 은 30세겔이 아닌 30데나리온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이 금액은 노동자의 30일(1개월) 품삯에 해당할 것이다. 한편 은 30세겔로 볼 경우 이 금액은 출 21:28-32에서는 황소에 들이 받혀 죽은 노예의 몸값으로 물어주어야 할 배상금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즉, 황소에 받혀 죽은 사람을 배상해 주는 뜻으로 은 30세겔을 죽은 노예에게 물어야 하며 들이 받은 황소는 돌로 쳐 죽이도록 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히브리인 종의 매매 값에서나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한 여자에 해당하는 몸값이 30세겔인 것에서나, 또는 소에 받혀 남종이나 여종이 죽었을 경우 소 임자가 그 종의 몸값으로 30세겔을 배상해 주게 한 기록을 보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값으로 받은 돈은 데나리온이 아닌 세겔의 화폐인 은 삼십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처럼 은 삼십에 팔린 내용이 기록된 것은 예수님이 팔린 몸값 은 삼십이 30세겔이든 30데나리온이든 어느 금액에 의해서 팔리는 수난을 당했든지 간에 이 금액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성취로 있는 일이란 것을 알려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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