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는 혼혈의 역사
임종찬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2023-08-19
1856년 여름, 독일 네안더 계곡 동굴을 관찰하던 이탈리아 출신 이주 근로자가 오래된 뼈 몇 개를 발견하였습니다. 과학자들이 이 뼈를 관찰해보니 인간의 유골과 흡사하지만 현대 인간과는 다름을 밝혀냈지요. 그래서 이 유골 주인을 네안데르탈인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이 네안데르탈인들이 거의 50만 년 동안 유럽에 존재하였지만 멸종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과연 멸종한 걸까요.
당시 유럽엔 현대 인류 종인 호모 사피엔스 역시 이들과 함께 수천 년 동안 유럽에서 공존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대인의 DNA 중 1〜4%는 네안데르탈인에게서 온 것임이 밝혀졌지요. 말하자면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 간의 이종교배가 있었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희안한 일도 있습니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원주민 후손들 중에는 한 번도 아프리카를 떠나 살지 않은 종족이 살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네안데르탈 DNA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군요. 원래 우리 조상들은 아프리카에서 살았고 여기서 세계로 흩어졌다는 것인데, 이 후손들만은 줄곧 아프리카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네안데르탈인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이를테면 남태평양 원주민에서부터 시베리아 유목민, 온갖 종류의 유럽인, 인디언에 이르기까지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고 합니다.(『이주하는 인류』 Sam miller저,최정숙역, 미래의 창 P.29) 그렇다면 네안데르탈인들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아직 우리 속에 살아 있는 것 아닙니까.
오늘날 인간은 네안데르탈인, 호모 사피엔스 그리고 선사시대 살았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인간의 아종들의 후손이 현재의 우리입니다. 강제에 의했건 합의에 의했건 아종들끼리의 이종교배에 의하여 오늘의 우리가 탄생한 셈입니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후보로서 유세기간에 한 연설 중 자신이 가진 인종적 유산에 대해 인상 깊은 연설을 하였습니다.
나는 케냐에서 온 흑인 남성과 캔자스에서 온 백인 여성의 아들입니다. 나는 노예, 또 노예 소유자의 피를 이은 미국 흑인여성과 결혼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부부가 낳은 소중한 두 딸들에게 물려준 유산입니다. 내게는 세 대륙에 걸쳐 흩어져 있는 온갖 피부색을 가진 온갖 인종의 형제, 자매, 조카, 삼촌, 사촌들이 있습니다.
오바마 아버지는 케냐 시골 양치기소년이었다가 나중에 미국에 유학, 후에 케냐 경제관료가 되었습니다. 오바마 어머니는 1961년 하와이 대학교 러시아어 수업에서 오바마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고 오바마를 낳았지만 오바마가 두 살 되었을 때, 아버지가 하버드 대학으로 공부하기 위해 떠나면서 어머니와 이혼하고, 그 이후 어머니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유학생과 재혼을 한 가족사가 있습니다.
선거는 온갖 루머가 날아다니는 전쟁터지요. 오바마의 대통령 후보 시절 미국 사회 내에 존재하는 혈통주의자는 말할 것 없고 이런 저런 아마추어 학자들 역시 여론 조작에 앞장섰습니다. 한 방울의 흑인 피가 섞였다 해도 그는 흑인이라 하는 순혈주의가 있는가 하면 그의 피의 반은 백인 피라는 온정주의, 비록 피부가 검지만 백인 문화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흑인이라 단정해선 안 된다는 동정론까지 등장하였습니다. 순혈주의를 주장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유전자에도 흑인 DNA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힌 논문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백인이든 흑인이든 우리는 잡종인 주제에 순혈주의 운운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 이겁니다.
처음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유럽인들은 흑인과 결혼한 경우가 많았고, 이들 후손인 혼혈아들 중에는 지금 미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지요.
유럽인들 간에는 혼혈이란 개념 자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유럽사 자체가 이주의 역사이면서 침략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 중에도 몽고족 여진족의 침략 그리고 일본인들의 침략으로 적잖게 혼혈이 자행되었습니다. 베트남전 파병으로 인해 베트남엔 한국 군인이 남겨놓은 라이따이한들이 많이 살고 있고, 6.25 사변으로 미군과 한국 여인 사이의 혼혈도 적잖게 있습니다. 지금도 결혼하기 힘든 농촌 노총각들이 동남아 여성들과 결혼합니다. 여기서 태어난 2세들이 많지요.
며칠 전 『전쟁 같은 맛(Tates Likes War』(그래이스 M 조 지음, 조해연 역, 글항아리 )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미국 논픽션 부문 최종후보에 올랐던 작품입니다. 필자 그레이스 조는 현재 뉴욕시립대 인류학 교수로 재직하는 인물입니다. 이 책에서 밝힌 바로는 6.25 전쟁 당시 미군을 상대로 성을 파는 서비스업 종사자 수가 약 100만 명 정도였고, 그 중 10만 여 명은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저자의 어머니도 그 중 하나라 밝혔습니다. 그녀의 어머니 군자(존칭생략)는 일제 강제 징용된 가정에서 태어났고, 해방이 되자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어 가족을 잃은 군자는 살기 위해 ‘외국인과 살을 섞었다’는 겁니다. 양공주라는 경멸과 낙인으로 죄인처럼 살다가 미국인과 결혼, 미국 땅을 밟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인종차별이었습니다. 군자는 환청과 조현병을 앓다 죽었습니다. 그녀의 딸이 바로 그레이스 조입니다. 조가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어머니의 불우한 과거를 밝히기보다는 자신의 가치관 재정립을 위해서 이 책을 썼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생계를 위해 양공주가 되었던 어머니, 그러나 자식 교육에 헌신했던 어머니가 대단한 분이라는 점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어 인간 승리의 현장을 목도하는 것 같아서 목이 메기도 했습니다.
어느 나라든 삶을 위해 어떠한 일도 해야 했던 아픈 역사가 있지요. 오바마 대통령이 그의 가족사를 대견스레 공개하였듯이 그레이스 조는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인정하는 대목이 인상 깊었습니다.
(공개되지 않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