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옥 시인의 첫 시집 "빨간 고양이를 구해줘"
_유년의 추억으로 성장한 서정
글 박철영
사람은 인연으로 살아간다. 그 인연은 피로 맺어지기도하여 천륜이라고도 하지만 의외로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질기고도 아름다운 인생길에서 동행이 되어주기도 한다. 김정옥 시인이 그랬다. 우린 생판 모르는 남이었지만 지금은 남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시인의 사람 대하는 심성은 <소금바람> 에서 언뜻 옅볼 수 있었다. 자신을 내친 누군가에게도 "저 사람도 잘 숙성이 되면 / 이런 단맛이 되"어 줄거라고 미리 예단하며 사람을 대하는 거다. 이말은 사람에게 정을 나누는데 인색하지 않다는 거다. 나를 만날 때도 저런 마음 이었지 싶다. 십여 년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만나 맨 처음 내가 쓴 글을 "시"라고 말해주었다. 그런 김정옥 시인께서 너무나 늦깍이 첫 시집 "빨간 고양이를 구해줘"를 상재했다. 시인을 만나보면 천상의 맑은 목소리를 가졌다. 생기발랄한 모습엔 그늘이 없다. 좋은 환경에서 자랐거니 생각하면 큰 오판이다. 그의 고단한 유년이 결코 녹녹치 않았음을 시속에서 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의 새벽은 춥고 비수같은 어둠을 뜷고나서 밝아온다. 더욱이 한 겨울의 추위는 죽음의 그늘을 비추기도 할 정도 섬뜩하다. 그 혹독한 어둠을 허물기 시작하는 새벽에 뜬 달은 그믐달이다. 그믐달은 새벽보다 먼저 떠 어둠을 몰아낸다. 새벽의 그믐달을 등지며 집을 나서 초승달을 보며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란 성장기의 소녀에게는 이미 고통이다.
남자가 허름하게 웃는다
입을 벌리자 낡은 장이 삐걱거린다
그 성긴 가구 사이에 고여 있는 밥상
낮에 누구를 만났을까
청국장 알갱이로 남아 있다
묵힌 세월이 백년은 되었을 듯한데
어쩌다, 귀하게 삭혀온 세월이
저렇게 작고 누추한 밥상이 되었을까
남자 등뒤에 장독대가 보인다
밤나무 아래 장 항아리
어머니의 손이 수없이 다녀 갔을 터
번쩍이는 몸, 집안 중심이었다
올곧은 총애 아래
세상 최고인 줄 알았으리라
장맛은 자랑이었고
집안 행사가 있으면 나오는 밥상
명가 뿌리를 증명한다
허나, 부자는 삼대를 잇지 못한다고 했던가
<어머니의 밥상> 시 부분
누구나 어머니의 존재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았기에 이 세상에 누구도 어머니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남자가 허름하게 웃"고 있다니 꽤나 낭만적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시를 읽어가며 기대는 서서히 안타까움으로 변한다. 어느 순간 "남자가 허름하게"에 나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였던 것이다. 비록 거친 남자처럼 살았어도 여전한 여자이고 한 가족의 엄마였음을 시인은 눈물로 말해주고 있다. <생선 가시엔 그리움이 있다> 에서 아무리 거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겠지만 "꽁치는 내 어머니다/잦은 반찬 투정을 달래 주시던 약손"이었고 "어미의 비릿한 젖내음으로 얼러 주시던 " 온정 넘치셨던 세상에서 단 한 분 뿐인 엄마로 기억한다. 그래서 시인은 가슴이 더 아파진다. "남자 등뒤에 장독대"가 엄마의 몫으로 남아 있었음을 생각해내면서, "부자는 삼대를 잇"기가 힘든지 몰라도 부잣집은 망해도 삼년은 버틴다고 했는데 이 집 만큼은 예외였나보다. 그마저 세월이 흐른 뒤 빈 집을 찾아간 시인의 눈빛에는 "장독대에 노란 씀바귀꽃"을 꺽어서라도 부재속 엄마를 생각해내며 밥상 아닌 밥상을 차려 드리고 싶은 안타까움이 짙다. 이미 오십을 넘어 성장한 시인은 <기도>의 "온몸 다 무너져 내리고/눈물만 남은 물방울 가슴"이 되어 살다가신 엄마의 세월을 뒤늦게 떠올리며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문설주 대뭇에
여기저기 우그러진 주전자가 매달려있다
비가 사내 몸속을 적시는 날이면
어린 딸이 주전자를 매달고 양조장으로 향한다
남대천 다리를 건너고 미루나무 가로수를 지나서 축축한 붉은 여행을 가는 것이다
몇 날 밤, 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미꾸라지들이
진흙속으로 파고든다
맨발로 바닥을 비벼대고 서 있으면
어깻쭉지에 물나래 솟는다
눈닿는 양조장이 사나흘 걸리는 먼 길이었으면 좋겠다
한 사나흘 빗속에 더 있었으면 한다
벌컥벌컥 들이키는 아버지를 유배시키는 길이라면
주전자속 동전들이 눈치를 챘는지 소리소리 질러댄다
금방이라도 쫓아올 기세다
미루나무 아래 길을 오고갈 때마다
아버지 얼굴이 진흙길에 수도 없이 엎어진다
사내가 토해 놓던 낮고 축축한 밤이 깊어지고 있다
남겨진 아이가 부엉이 눈을 하고 운다
<주전자> 시 전문
성장하면서 누구나 자의던 타의던 간에 추억을
갖게 된다. 그 추억이 살아가는 동안 행복으로 기억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비가 사내 몸속을 적시는 날이면/어린 딸이 주전자를 매달고 양조장" 으로 달려가면서도
받아다드린 막걸리에 불편한 시간들이 오히려 빨리 끝나주기를 바랜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않고 아버지의 술 심부름을 가면서도 "눈 닿는 양조장이 사나흘 걸리는 먼 길 이었으면 좋겠다/한 사나흘 빗속에 더 있" 어 준다면 하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아닌 어린 소녀는 희망을 소망하고 있다. 암혹하기만 하였던 유년기가 오히려 시인에게는 원망이나 상처로 자리잡은 것이 아니고 희망이라는 씨앗으로 자라주었는지 모른다. "남겨진 아이가 부엉이 눈을 하고 운"다고 했지만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아닌 아버지에게 어떠한 위로나 대안적 힘이 되어주지 못한 안타까움의 눈물인 것이다. 그런 마음은 <되새김질>을 통해 속내를 확연히 들쳐 보인다."풍으로 비뚤어진 아버지의 입술" 에서 자신에게 힘들게 하였던 과거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이미 슬픔으로 소화되고 없었다. 기운 좋던 시절의 아버지는 이제는 "맞물리지 않는 되새김질을 하며/자꾸만 벙긋거"리는 입술도 제대로 오무릴 수 없는 연약함으로 세월의 무상함을 보게 된다. 이어 자신도 "언젠가 시간 여행 끝날 언저리" 에 가 있을 수밖에 없음까지 생각이 미치고 있는지 모른다. 인생살이가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깨달아 가고 있다.
계룡시 공원 입구에는
느티나무 부부가 운영하는 추억 사진관이 있다
우리 집사람을 이 밑둥에서 처음 만났어야
느티사진관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
어떤 사진을 맡겨 놓으셨기에, 망연히
하늘가지 끝에 달려있는 옆사진을 뒤지고 있을까
아내의 젊었을 때 얼굴을 찾으러 온 것일까
서랍장 깊이 넣어 둔 앨범을 더듬는다는 건
내 속에 꺼져가는푸른 재에 입김을 불어넣는 게야
마음 아궁이에 생 불씨 하나 세우는
것이지
60년 전 마음을 찾아주려는 듯
할아버지 눈길 따라 느티 가지 사이를 돌던 바람
사진 한장 골라 발등에 얹어준다
오백년 동안 찍어 온 사진들을 걸어놓은 마당에는
가족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로 와짝하다
나무 의자에서
돗자리 위에서
저마다 추억을 걸어두기 위해 열심이다
강중거리는 사내아이 신발 뒤꿈치에서도
뽁뽁뽁 셔터가 터진다
<느티나무 사진관> 시 전문
누구나 어딘가를 지나가다 보면 한 시절의 추억이 불쑥 내밀지 않는 곳이 있으랴. 어느 휴일 풍경 쯤 되겠지만 "느티나무 사진관 의자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는 시인의 가슴에서 한 시도 내려놓지 못했던 아버지가 기억속으로 현존해 오신 거다. 수령이 꽤나 된 듯한 느티나무를 통해 사람들이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듯하지만 소녀적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렇게 해 주었음직한 추억속을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순간의 풍경이 빗어내는 사진은 당장 아름답거나 애뜻한 추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뽁뽁뽁 셔터가 터"지는 곳에 서 있는 오래전의 자신으로 상상해볼 수도 있다. 너무도 많은 세월이 흘러 도저히 인화 될 수 없을 필름이지만 느티나무 사진관에서는 안될 것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추억이 찍힌 필름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한장의 사진이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다. 느티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저 가족들에게 온전한 추억속 사진 한장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다. 그것을 알고있는 시인은 가슴속에 멍처럼 남아있던 아버지의 추억을 굳이 인화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인화되는 순간 부정적인 이미지로 일부 남아있을 아버지의 부재를 또 다시 확인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버지와 예뻣을 엄마를 모시고 새롭게 "가족 사진을 찍"고 싶다는 간절함이 더 크다. 사는 것이 별거겠는가? 지나고보면 등굽은 오래된 느티나무처럼 삶의 흔적은 또 다른 풍경이 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나이가 들어야만 느껴지고 알아가는 인생은 다름아닌 추억을 만들어가는 긴 여정이고 그것도 다 기억할 수 없는 것임을 시인은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하늘가지 끝에 달려 있는 잎 사진을 뒤"지고 있는 것은 아련히 남아 있을 작은 추억이지만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 추억은 끝없이 이어져 이곳에서 멈출 수 없음을 안다. <설화> 속 "비행기가 해 저무는 눈밭을 가르며 간다/고향 하늘로 쫓아가던 발자국/붉은 설화로 피어난다/어느 때보다/더/시리고/뜨거운" 눈물 범벅이 되어 강원도 어딘가의 고향으로 향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릴 때 문지방에 올라서면
복이 나간다는 할머니의 불호령
밟고 설 수 없는 곳이란다
한 뼘 차이로 금기되는 그곳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있다
경계를 알리는 높이
더 이상 침범하지 않아야 하는 문턱이다
안과 밖, 다름의 경계다
우리는 그 턱을 얼마나 존중하며 살까
한번쯤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한 뼘 높이, 생각의 턱이다
누군가의 마음자리를 빌려 쓰면서
편한 적은 없었는지
내 문지방은 누군가에게
내준 적은 없었는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너
내 문지방에서 내려서도록 야단친다
할머니의 불호령처럼
<문지방> 시 전문
가끔은 의외의 시를 통해 숨겨진 시인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다. <연탄> 에서 "새까맣게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을 막으려고/그렇게 숨구멍을 많이 만들어 놓은 건가/아니!/한 개의 숨구멍으론/그 열정 다 사룰 수 없어서 그리했나 보다". 몇 줄의 행이지만 시인이 갖는 삶의 열정이 만만치 않음을 은연중 표출한 것이다.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억누르지 못했기에 <문지방>에서는 엄한 할머니의 꾸중으로 나타난다. 수없이 넘어서고 싶었던 금기의 선이나 금도는 유형은 다르겠지만 <주전자>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비록 억눌림의 환경이었지만 사회의 금기를 서서히 터득하게 된다."더 이상 침범하지 않아야하는 문턱"의 의미를 어느 순간 깨닫고 안과 밖의 경계를 나눌 줄 아는 삶의 지혜가 되어 " 우리는 그 턱을 얼마나 존중하"며 살고 있는가를 시인 자신에게 되묻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시를 떠나 삶의 철학이고 치열한 자기의 반성을 통해 수신을 하고 있는 거다. "누군가 마음자리를 빌려 쓰면서" 잘못된 일을 하지는 않았는가를 되묻고 있다. 우리가 살면서 수없이 남의 경계를 넘나들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우리는 그 턱을 얼마나 존중하며 살"고 있느냐고 사람 사는 법도를 지키며 살자는 당부는 아닐까? 김정옥 시인의 특이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화려한 언어의 나열도 아니면서 언어속에 내재된 심리를 행간에 숨겨놓고 삶을 이야기하고 있음이다.
문지방은 남자 아이가 밟아도 호되게 혼 줄이 났다. 하물며 여자 아이가 올라서면"복이 나간다는 할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은 당연하다. 할머니의 호령이 한 때의 아련한 추억에서 멈추어있지않고 끝임없이 시인의 일상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알려주는 삶의 지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장기의 일상은 자기 수신에서 멈추지않고 끊임 없이 진화되고 있다. <연탄>에서는 "차라리 타오르거든 더 활활 타올라라/너의 방구들로 찾아든 이들에게/마지막 모든 것"까지 내주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되어 나타난다. 시인에게 딱 들어 맞는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시란 다름이 아니다. 시인이 성장하며 개인적이거나 내면적 상처를 스스로 반성을 통해 치유하고 시를 빌어 보편적 분석과 사회를 지향하는 곧은 정신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김정옥 시인은 누가뭐래도 그러한 시 정신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기에 이 시들은 살아서 사람들을 찾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