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여자는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 얘기를 난생처음 들어본다는 듯 남자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영화 ‘국제시장’이 젊은층에 한국 현대사 교과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생생한 장면이다. 지금까지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 스토리는 1960년대를 살았던 중·장·노년층이 공유하는 화제였다. 그런데 영화 ‘국제시장’은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의 ‘현대사 공백’을 일순에 채워주고 있는 느낌이다.
파독 광부·간호사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인 백영훈 박사다. 1930년 전북 김제 출생인 그는 한국 경제발전의 산증인으로 불린다. 그의 이름 앞에는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는다. ‘대한민국 경제학 박사 1호’ ‘파독 광부·간호사의 기획자’ ‘박정희 대통령의 통역보좌관’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설립자’ ‘박정희 대통령 경제자문역’ 등.
지난 1월 6일 서울 서초동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실에서 백 원장을 만났다. 85세의 노신사는 고령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력이 넘쳤다. 인터뷰를 앞두고 관련 자료를 읽다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 어떻게 1950년대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독일 경제학 박사’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끝난 직후였어요. 1955년 UN이 한국의 경제재건 방향을 알아보기 위해 UNKRA(유엔한국재건위원회) 조사단을 파견합니다. 대표는 인도인 메논이었어요. 조사단 15명이 한국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조사했어요. 그때 유엔한국재건위원회 조사원들은 한국을 희망이 없다고 진단했어요. ‘쓰레기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겠는가’라는 말은 바로 메논 대표가 한 말입니다.”
UNKRA의 보고서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전달되었다. 비슷한 시기 한국을 취재하고 돌아간 영국 ‘더 타임스’ 사이먼즈 기자는 신문에 거의 똑같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과 같다’라는 제목이었다. 이 기사 내용은 국내에도 전해졌고 많은 한국인을 절망케 했다. 백 원장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고려대 상과 4학년 시절 경제사를 가르쳤던 조기준 선생님이 ‘라인강의 기적을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영어만 해서는 안 되니 독일어를 공부하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때는 한국에 독일어 사전이 없을 때여서 영독사전, 일독사전을 놓고 독일어를 독학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석사과정을 하던 1956년 초였다. 그는 신문에서 국비장학생 모집공고를 보게 된다. 당시 한국의 대학엔 박사과정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개발을 하려면 선진국 실정을 아는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고민 끝에 국비장학생을 모집해 미국·영국·프랑스·독일 4개국에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백영훈은 독일 국비장학생에 지원하기로 하고 1956년 4월, 서울대 문리과대학 강당에서 시험을 보게 된다.
“시험장에 가보니 나를 포함 16명이 있었어요. 독일어 지문으로 세 문제가 나왔는데, 그걸 한국어로 쓰는 거였죠. 일주일 뒤에 결과를 보러 서울대 문리대 강당으로 갔죠. 흰종이에 백영훈이라는 이름만 적혀 있더군요. 너무 기뻐 눈물을 펑펑 쏟았지요.”
- 영화 '국제시장'에서 서독 탄광 속 광부들이 찐감자를 먹는 장면 / JK필름
“비행기를 탔는데 기내식이 나오는 겁니다. 나는 돈을 내야 하는 건 줄 알고 안 먹겠다고 했죠. 호주머니에 10달러밖에 없었으니까요. 당시 홍콩까지는 6시간이 걸렸는데, 6시간 동안 쫄쫄 굶었어요. 홍콩에 내려 배가 고파 바나나를 한 송이 사들고 비행기에 탔죠. 바나나만 먹으며 계속 설사를 하다가 로마에서 처음으로 기내식을 먹었습니다. 내릴 때 돈 내라고 할까봐 뒷문으로 몰래 내렸죠.(웃음)”
1956년 7월부터 1년간 그는 ‘목숨 걸고’ 공부만 했다. 때마침 서울대 상학과 최호진·신태완 교수가 로마국제경제학회에 참석했다 귀국길에 퀼른에 들렀다. 그는 신태완 교수로부터 뉘른베르크대학 포이크트 교수의 명함을 받게 된다. 포이크트 교수를 지도교수로 삼아 박사 공부를 시작한 그는 1958년 11월 독일 유학 2년8개월 만에 박사학위를 받는다.
“지도교수와 기숙사 동료들이 전부 나를 도와줬어요. 근데 돌아갈 여비가 없어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독일에서는 박사학위를 받으면 등급(A·B·C)으로 나눠 신문에 공개했어요. 저는 운이 좋게 A급 박사였는데, 그 신문기사를 본 손원일 주독일대사가 나를 찾아왔어요. 손 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 대통령께서 항공권을 보내주셔서 제가 귀국을 하게 된 겁니다.”
대한민국 1호 경제학 박사 백영훈은 귀국과 함께 1959년 3월부터 중앙대 교수로 강단에 서게 된다. 이후 1961년 5·16쿠데타가 발발해 군사정권이 들어선다. 강의를 하던 어느날 학교로 경찰이 들이닥쳐 그에게 징집영장을 제시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방위병으로 복무했지만 병적에 기록이 안 되는 바람에 징집기피자 신분이 된 것이다. 그는 다시 육군 이등병 신세가 되었다.
논산훈련소에서 3개월간 죽어라 훈련을 마쳤을 때였다. 그는 갑자기 서울로 이송되었고 ‘남산’에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만난다. 그는 김종필 부장으로부터 앞으로 할 일을 듣게 된다. 얼마 후 그는 육군 일등병 신분으로 상공부 장관 특별보좌관에 임명된다. 5·16 군사정부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1964년 12월8일 서독 수도 본에서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에르하르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가운데가 통역관 백영훈이고 서 있는 사람은 이후락 비서실장.
박정희 정부는 상공부 장관 정래혁을 단장으로 하는 서독경제사절단을 구성했다. 문제는 독일어를 하는 사람이 정부 대표단에 없었다는 것이다. 수소문 끝에 논산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중앙대 교수 백영훈을 경제사절단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1962년 10월 20일 서독경제사절단은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경유해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독일의 뮌헨에 도착했다. 정래혁 단장을 비롯한 사절단 일행은 신응균 주독대사와 함께 사절단의 활동과 전략을 숙의했다.
경제사절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떤 것이었나요. “일주일 동안 지멘스, 크룹 등 유명한 서독 기업들을 차례로 방문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를 냉대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똑같은 제품을 생산하는 복수 업체를 선정해 그들의 경쟁심리를 자극했습니다. 결국 서독 기업들은 서독 정부에 우리 입장을 전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서독의 수도는 본에 있었다. 경제사절단은 본으로 가서 정부를 상대로 한 차관 교섭을 시작했다.
서독 정부에 요구한 차관이 4000만달러로 알려졌는데, 어떻게 해서 그런 금액이 나온 겁니까. “당시 우리는 서독 정부에 6대 산업을 제시했습니다. 나주 비료공장 건설, 인천 한국기계공장 확장, 인천제철 확장, 삼척 동양시멘트 공장, 중소기업 기계공장 지원 등 6대 산업이었죠. 이에 소요되는 차관 자금 소요액은 1억5000만마르크, 달러로는 약 4000만달러였죠.” 1962년 10월 27일 서독 정부는 한국 정부에 1억5000만마르크의 차관을 승인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날 경제사절단의 표정은 어땠습니까. “우리는 서독 경제성 대표와 3일 동안 회의를 계속했어요. 마지막날 서독 대표의 만찬 초청이 있었습니다. 이날 웨스트릭 차관이 환영사에서 차관 승인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그 순간 우리 일행은 손에 손을 맞잡고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이렇게 말하곤 그는 “그때 생각만 하면 왜 이렇게 눈물이 나려 하는지 모르겠다”며 말을 멈췄다. 잠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것은 군사정부가 최초로 외국에서 인정받았다는 역사적 의미도 있었습니다. 군사정부에 대한 국제적 압력이 가중되는 가운데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경제협력 파트너로 인정받았다는 뜻이지요. 그때 우리는 한국에 국운(國運)이 열리는 징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서독 기업인과 정부 관계자를 초청해 라인강에서 선상 축하파티를 열었습니다.”
광부·간호사 파견은 어떻게 나오게 된 겁니까. “서독 정부는 1억5000만마르크 차관 제공을 약속했습니다. 문제는 제3국 은행의 지급보증이 필요했습니다. 그 당시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 은행에서도 지급보증을 받아올 수 있는 능력이 없었어요. 여기서 착상된 구상이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것이었지요.”
어떻게 그런 발상을 했습니까. “당시 서독은 경제부흥이 한창이어서 노동력 부족이 심각했어요. 특히 일이 힘든 광부와 간호사가 부족했습니다. 우리의 노동력을 서독에 파견하면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한 거지요. 3년간의 노동력에 따른 임금을 담보로 서독 은행에서 지급보증을 받게 한다는 것이었지요.”
정부는 서독에 파견할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신문에 냈다. 광부 5000명 모집에 4만여명이 응시해 경쟁률이 8 대 1을 넘었다. 응시 자격은 고졸 이상이었지만 학력을 속인 대졸자도 수두룩했다. 196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에 변변한 기업이 없어 대졸자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파독 간호사도 2000명 모집에 2만명 이상이 몰려들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그려진 대로다.
광부들이 받는 월급은 얼마였나요. “루르 지방의 탄광 막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광부들은 대부분이 대졸자였습니다. 그들은 한 달에 400마르크(약 100달러)에서 700마르크 정도를 받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시간외근무를 자청했습니다. 그러는 틈틈이 독일어를 배우면서 여러 가지 기술을 익혔어요.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고 공부했습니다.”
당시 서독 광산 지대에는 한국인 광부들만 있었나요. “아닙니다. 터키 출신을 포함해 다른 나라 출신 광부도 꽤 있었어요. 다른 나라 출신들은 범법자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흉기를 넣고 다니며 몸집 작은 한국 광부를 상대로 걸핏하면 행패를 부리곤 했답니다. 참다못한 한국 광부들이 목욕탕에서 나오는 터키 광부들을 태권도 등으로 혼내 주었답니다. 그 다음부터 터키 광부들의 행패가 잠잠해졌다고 합니다. 작은 고추가 매운 거지요.(웃음)”
한국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성실한 태도는 독일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서독 신문에는 심심찮게 한국인들의 근면함을 칭찬하는 기사가 실리곤 했다. 특히 노인을 친부모처럼 돌보는 한국 간호사들의 지극정성에 서독 사람들이 감동했다. 서독 사람들은 한국 광부와 한국 간호사들을 통해 같은 분단국가 한국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이후 서독은 2억마르크 차관을 다시 제공하기로 한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렇게 첫 삽을 뜨게 된다. 서독 정부의 차관이 한국 경제발전의 결정적인 종잣돈이 된 것이다.
인터뷰가 끝났을 때 백 원장은 기자를 옆방으로 데려갔다. 옆방의 한쪽 벽면에는 빛바랜 컬러사진 4장이 걸려 있었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해 찍은 사진들이었다. 서른네 살의 통역보좌관 백영훈이 박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독일 총리 사이에서 통역하는 모습이 보였다. 백 원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에르하르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는 사진을 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백 원장은 “이 장면은 제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에르하르트 총리와 대화를 하며 30분 동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대통령은 ‘한국과 서독은 똑같은 분단국가다. 서독이 라인강의 기적으로 경제부흥을 시킨 것처럼 우리도 한강의 기적을 일궈 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근면성으로 따져봐도 우리 국민이 오히려 독일 국민보다 부지런하면 했지 절대로 못하지 않는다’라고 말했고, 독일 총리는 이 말에 감동을 받아 적극 지원을 약속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