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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빛과 흑암의 역사 (성경연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원문보기 글쓴이: ourdailybread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 소리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하여 이 썩을 몸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반드시 죽지 아니할 몸을 입으리라(고전 15:51-53).
성경의 증거들을 종합해 볼때 우리 앞에 놓인 휴거 사건은 최소 '두 번'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를 거듭난 그리스도인에 국한해서 우리라 부를 경우 그 '우리'의 휴거는 오직 한번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들 가실 것이다. 우리(거듭난 그리스도인 지체)의 휴거는 한 번 밖에 없다. 그러나 휴거라는 사건은 단 한번이 아니다.
성경을 읽을 때 가장 빠지기 쉬운 오류이면서 치명적인 독소는 성경을 '아전인수' 풀이하는 것이다. 단순히 한국에 사는 김개똥이, 누구 아무개의 입장에서 오해하는 것도 있고 성경을 잘못 공부해서 66권 전체를 '교회'에 맞춰 해석하려다가 빠지는 오류도 있다.
성경 66권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분의 조각 퍼즐을 이룬다. 교회는 그분의 몸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신비는 사도 바울 때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셔서 밝히고 성경에 기록하셨다. 구약 선지자들은 초림, 대환란, 재림, 천년왕국을 예언했지만 '교회'에 대해서는 몰랐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의 휴거'에 대한 직접적인 참조 구절은 사도 바울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문자적', '교리적'으로 교회의 휴거에 대한 구절들을 남겼다. 그렇다고 바울만 휴거에 대해 썼다는 게 아니다. 구약 솔로몬의 노래나 창세기 에녹의 경우 교회의 휴거를 예표한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언급처럼 휴거가 명백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러면 주님 자신의 언급은 어떠한가? 주님께서 복음서 종말장(올리브산 종말론 강해)에서 예언하신 일들은 교회에 일어날 일들인가? 주님 자신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즉 모세의 뒤를 이어 나타난 '마지막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하셨다. 주님은 올리브 산에서 자신의 골육지친인 이스라엘 민족의 대환란, 다니엘의 칠십째 주의 현상들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 청취자들은 유대인 제자들이었고 대상 범주 또한 마지막 때의 유대인 제자들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신비'(고전 15:51)를 맡은 청지기로서 휴거에 대해 그것은 '신비'라 했다. 신비는 당연히 일어날 일, 성경에 예언된 사건이지만 너무나 엄청나고 설명하기 힘들기에 막상 일어나기 전에는 성경에 나와 있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 그런 교리를 말한다.
휴거가 성경에 나와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성경에 어디 나오는고?' 우매한 질문을 한다. 또 혹자는 환란후휴거와 환란전휴거를 합쳐서 '재림'으로 만든 다음 적그리스도와 맞서며 환란을 통과해서 믿음을 지켜 구원받는 '환란기 유대인 신앙'을 이 시대 복음으로 전파하며 수많은 사람을 실족시킨다.
환란전휴거와 환란후휴거의 존재는 둘다 매우 확실해서 하나를 부인하고 다른 것을 세울 수 없을 정도다. 두 휴거의 현상에 차이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같은 몸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몸이 변화될 적에 '구름'을 타고 올라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그러나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또 나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라.”고 하시니(요 20:17)
주님이 변화되신 몸은 셋째 하늘, 천체물리학적으로 상상할 수 없이 엄청난 거리에 있는 하늘들 위의 하늘을 단숨에 통과하여 오고갈 수 있는 시공간 초월의 몸이었다. 그리스도인도 그분과 같은 몸을 가질 것이 약속되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3:2).
그러니, 우리가 휴거될 적에 사실 우주공간을 여행할 필요도 없이 셋째 하늘로 '휘릭' 순간이동해도 그만인데,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는 대우주의 아름다움의 장관을 보면서 깊음(우주적 물들)을 거쳐 셋째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주님께서는 '속도 완급 조절'이 가능하셔서 엄청난 거리를 '순간'에 주파하실 수도 있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지나가실 수도 있다. 올리브산 승천에서 주님은 구름을 타고, 또는 구름에 싸여 천천히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올리브산 승천은 '지상재림'보다는 '환란후휴거' 때 그분이 구름과 함께 나타나시는 것을 더 예표한다.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장면은 신구약에 반복되어 나오는데 어떤 상황은 지상 재림 같고 어떤 것은 환란후휴거라서 섞여 있는 듯이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다.
보라, 그가 구름들과 함께 오시리니,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또한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애곡하리라. 그대로 되리로다. 아멘(계 1:7).
1:7 여기서는 누군가 올라간다고 말씀하지는 않았지만 계시록의 유사한 다른 장면에서는 추수가 이루어진다. 계 1:7이 환란후휴거를 말한다거나 지상재림을 말한다고 하는 주장은 반반의 이견이 있다.
또 내가 쳐다보니, 보라, 흰 구름이라. 그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분의 머리에는 금 면류관을 썼고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계 14:14).
구름 위에 앉은 이는 추수를 한다. 추수는 알곡들이며 진노의 포도는 반면 짓밟힌다. 아마겟돈보다 조금 앞선 시점에 추수가 있다. 환란후휴거론자들 대다수가 가르치듯이 아마겟돈과 동시 시점도 아니다.
구름이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근본 의문을 제기하는 측이 있다. 혹자는 주님께서 음속을 돌파하면서 공간을 오가실 때 수증기의 응결로 드라이아이스 같은 것이 생겨서 구름 형상이라고 말한다. 어느 '과학하는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들은 말인데 '기술자'의 머리에서 나옴직한 발상이지만 탐탁치 않다. 구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의 '연기'와 같이 언급된다.
시내 산은 온통 연기로 자욱하니 이는 주께서 불 가운데 그 위에 내려오심이라. 그 연기가 용광로의 연기처럼 솟아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더라(출 19:18).
내가 하늘들과 땅에 이적들을 보이리니 피와 불과 연기 기둥들이라(욜 2:30).
주님이 지상재림의 준비 단계로 아마겟돈 전장에 임하실 때 이스라엘 인근 산들이 녹아내릴 것인데 주님의 발이 용광로의 달군 놋 같이 뜨겁기 때문에 땅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말 타고 지나가시는 자리마다 달표면 같이 될 것이다. 당연히 엄청난 수증기가 일시에 폭발하면서 주님과 주님의 군대가 지나가는 현장은 구름처럼 연무가 자욱할 것이다.
그가 땅을 바라보시니 땅이 진동하고 그가 산들을 만지시니 그것들이 연기를 내는도다(시 104:32).
오 주여, 주의 하늘들을 기울이사 내려오시며 산들을 만지시어 그것들로 연기를 발하게 하소서(시 144:5).
그의 발은 용광로에 달군 듯한 빛나는 놋 같고,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계 1:15)
그의 몸은 녹보석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개 모양 같으며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광채나는 놋 색깔 같으며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 같더라(단 10:6).
'용광로에 달군 빛나는 놋 같은' 주님의 발에 한번 걷어채인다고 생각해 보라. 아마겟돈에 모인 2억의 UN 군대는 용광로 같은 열기에 문자 그대로 주님의 군대의 밑에서 밀랍인형처럼 녹을 것이다.
연기가 날려 가듯 그들을 쫓아내시며 밀초가 불 앞에서 녹아 내리듯 악인으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멸망하게 하소서(시 68:2).
이제까지 우리가 '구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재림, 혹은 환란후휴거에 대해서 알아본 데 따르면 주님의 '공개적 나타나심'에는 하늘과 땅의 표적들이 동반됨을 알수 있다. 구름같이 둘러싼 연기와 함께 지상재림하시던 공중에서 성도(환란성도)를 추수하러 대기하시던 그분과 구름은 떼어놓을 수 없게 같이 움직인다. 이 대기권이 엄청난 '인자의 임재'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폭발하고 균열되는 현상 때문에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으로 볼수도 있다.
그리고 나서 살아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그렇다면 환란전휴거의 가장 핵심 구절 중 하나인 살전 4:17에서 휴거 때 '구름 속으로' 끌려올라감은 무슨 뜻인가? 이것이 키 포인트가 되겠는데 이 구름을 '자연적인 구름' 속으로 올라가서 대기의 구름층 위에 와 계신 주님을 만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공중'은 대기권을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지구 위에 내려오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외기권'의 위성 궤도나 밴앨런대(전리층)까지 올라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땅에 아주 인접하게 임재하셔서 구름 위에 오신 주님을 만나러 올라간다. 성도들이 다 모이면 주님은 그들을 데리고 북쪽 셋째 하늘로 곧장 올라가실 것이다.
이 '구름 속으로'를 우리가 구름을 타고 올라간다, 고 해석할 여지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라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밧드처럼 구름 카페트를 타고 우주여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구름이나 다른 탈것이 필요없는, 엘리야처럼 불병거를 타야 되는 몸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변화되어 자유롭게 셋째 하늘에 갈수 있는 새 몸을 입게 된다.
그후에 하늘에 있는 인자의 표적이 나타나리니, 땅의 모든 지파들이 통곡할 것이며, 또 그들은 인자가 권세와 큰 영광으로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또 주께서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시리니, 그들이 하늘 이편 끝에서 저편 끝까지 사방에서 그의 택하신 사람들을 함께 모을 것이라(마 24:30-31).
사도 바울의 '휴거'와 마 24:30-31의 '휴거'를 비교해 보면 마태복음의 장면은 계시록 1:7이나 14장의 추수와 자연스럽게 연결됨을 알수 있다.
주님께서 살전 4:17의 휴거를 일으키실 때 '하늘에 있는 인자의 표적'은 나타나지 않고, 땅의 모든 지파들은 통곡하지 않으며 인자가 권세와 큰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지는 못한다.
더구나 '천사들을 보내리니'는 사도 바울이 교회의 휴거에는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천사들이 그 성도들을 모은다는 것은 계 14:14에 나타난 구름 위의 인자가 휘두르는 도구(낫)가 사실 천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천사들이 환란 성도들을 모을 것인데 이는 환란 성도들이 우리처럼 스스로 여행할 수 있는 '자력 비행'이 불가능하기에 천사들의 도움을 부득불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환란 성도들의 몸은 우리의 몸과는 좀 다를 것이다. 우리 몸이 더 큰 영광을 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늘에는 몸들이 있다'.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가면 똑같아 진다고 거짓말하지 말라. 천국은 공산사회가 아니다. 모든 똑같은 제복을 입고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이 일하는 조지 오웰의 '1984년'이 아니다.
또한 하늘에 속한 몸들도 있고 땅에 속한 몸들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들의 영광이 다르고 땅에 속한 것들의 영광도 다르니라.
하나는 해의 영광이요 또 하나는 달의 영광이며, 또 다른 하나는 별들의 영광이니 이는 영광에 있어서 한 별이 다른 별과 다르기 때문이라(고전 15:40-41).
몰몬교는 위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그리스도인이 '행위 심판'을 받으면 부활의 몸의 본질에 차이가 난다고 가르친다. 형편없는 이단교리가 아닐수 없는데 그리스도인은 모두 한몸의 지체(예수 그리스도)이기에 유업의 차이 외에 몸의 차이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시대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시대 성도, 특히 환란성도들의 몸은 우리의 부활체와는 영광의 '등급'이 다르다. 그들은 천사들에 의해 들림받아야 한다. 시공간 제약이 큰 몸이다. 물론 그들도 일종의 변화된 몸을 갖게는 될 것이다.
환란전휴거는 그리스도인을 위해 필요하다. 환란후휴거는 환란성도를 위해 필요하다.
왜 환란성도라는 존재가 필요하냐고 물을 수 있다, 그들은 교회시대에 미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제2라운드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게 자비하심으로 열어놓은 통로인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자비가 입증되고 다른 면에서는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다 충족되지 않는 '땅의 통치자 그룹'의 숫자를 채우는 의미도 있을지 모른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몇 명이 '유업'(통치)에 참여할 수 있게 삶을 유지했는지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드러나겠지만 심히 적을 수도 있다. 환란 성도들은 우리와 함께 '공동통치자들'이 될 것이므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은 다 헤아릴 수 없으나 그들은 하나님께 필요한 존재들이라는 점만 기억한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그들이 그 위에 앉았는데 심판이 그들에게 주어졌더라. 또 예수에 대한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베임을 당한 사람들의 혼들도 보았는데, 그들은 그 짐승에게나 그 형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표를 그들의 이마 위에나 손에도 받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므로 그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을 통치하더라(계 20:4).
참고사이트:
첫댓글 객관적인 자료인 것 같아서 옮겨와봤는데 아직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있습니다.
자매님 이해가 안가는 부분은 무엇이신지요?
재림이 2번 있습니다.
1.공중재림=휴거
2.지상재림
아직 이부분에 대한 것은 정리하기 어렵네요.
어떤 학설이나 이론 말고 성경공부를 더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자매님,,
이해 안가는 구절은 어디신지여?
후거와 주님의 지상재림이 다르다는 점을 설명할 만한 차이점이 많다
성경에 나타난 차이점을 통해 두 사건이 다른 것임을 가장 잘 알수 있다
1,휴거시 모든 성도가 지상에서 사라지지만, 재림시에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나타나신다
2,휴거시 성도들이 공중으로 끌려 올라가지만 ,재림시 그리스도께서 땅에 돌아오신다
3, 휴거 때 그리스도는 신부를 부르러 오시나, 재림 때는 신부와 함께 오신다
4, 휴거 이후 교회가 지상에서 들리고 환난이 시작되나, 재림이후 천년왕국이 세워진다
5, 휴거는 아무 때나 일어날 수 있으나, 재림은 많은 징조들에 의해 예고된다
6, 휴거시에는 평안을 주는 말씀이 공포되나, 재림시에는 심판의 말씀이 공포된다
7,휴거는 교회와 연관되나, 재림은 이스라엘과 세계와 연관이 있다
8, 휴거는 비밀이나, 재림은 신. 구약 성경에 예언되었다
9, 휴거 때는 성도들이 심판받으나, 재림때는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심판받는다
10, 휴거시 만물은 그대로 있으나, 재림시 만물이 변화된다
11, 휴거는 이방인에게 아무 영향도 안 미치나, 재림때 심판받게 된다
12, 휴거 때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지 않으나, 재림 때 그 언약이 성취된다
13, 휴거와 악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은 연관이 없으나, 재림시 악이 심판받는다
14, 휴거는 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 있으나, 재림은 진노가 지나간 후에 있다
15, 휴거는 성도들을 위해서이나 ,재림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16, 휴거에 대한 교회의 소망은 "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4:5)이나,
재림에 대한 이스라엘의 소망은 " 천국이 가까우시니라" (마4:17)이다
휴거에 대해 앞으로 공부를 해볼 생각입니다.
주의나 학설을 떠나서요.
@소금인형 두 번의 휴거는 성경에 없습니다.
공중재림이 휴거입니다.
@말씀사랑 예수님 몸의 휴거가 두번 있었습니다.
@소금인형 어느 성경에 나오시는지요? 알려주세요
@말씀사랑 요한복음 20:17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대지 말라. 내가 아직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다만 내 형제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말씀사랑 누가복음 24:50 ¶ 그분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시더라.
누가복음 24:51 그분께서 그들을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위로 올려져서 하늘로 들어가시니라.
@소금인형 자매님 요한복음 20장 17절과 누가복음 24장 50절 말씀은 주님의 재림이 아니라 주님의 승천을 말합니다.
주님의 재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두번의 재림은 있지만 두번의 휴거는 없습니다.
@말씀사랑 알아요.
주님의 승천과 주님의 재림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더 궁금한것 있으면 질문 하시길 바랍니다.
세대주의적 해석 말고 좀 더 공부해 볼게요.
제가 공부해보겠습니다.
기도하면서
주님이 알려주실 때까지 모르는 건 내버려두렵니다
그렇지요
주님이 알려주실때까지는 기다리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보통 그리스도인이 대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 맞습니다.
저는 세대주의 가르침 보다는 성경적인 교제를 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