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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테라바다 불교 종주국 스리랑카 성지 순례기 (2022년 11월 11일부터 18일까지) (9)
켈라니야 사원에서 본 스리랑카불교의 힘
글 이병욱
스리랑카 기행문은 이번호로 끝나게 됩니다. 그동안 원고를 써주신 이병욱 거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켈라니야 사원은 어디에 있을까? 구글지도에서 검색해 보았다. 사원은 콜롬보 서북쪽에 있다. 호텔에서 사원까지는16키로 거리에 있다. 구글 위성지도를 보니 콜롬보 외곽에 있다.
켈라니아는 어떤 사원일까? 영문판 위키백과에서 켈라니야 라자 마하 비하라(Kelaniya Raja Maha Vihara)로 검색한 결과 이 사원은 스리랑카 흥망성쇠와 관련 있다고 한다. 그래서 “켈라니야 사원이 흥하면 스리랑카도 흥하고, 켈라니야 사원이 흥하면 나라와 그 행정도 쇠퇴한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라고 했다. 켈라니야 사원은 왕립 사원임에 틀림 없다.명칭에 라자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전제군주시대에 왕실에서 세운 사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설립 역사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연대순으로 기록된 스리랑카의 역사(기원전543년부터)이전 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켈라니야 사원은 기원전307년 아라한 마힌다가 도착한 후 데바남피야티사 왕의 형제인 우티야 왕자에 의해 개조되었습니다. 우티야 왕자는 또한 그곳에 최초의 불교 승려 거주 구역(Sanghawasa)을 건설했습니다.
고대 사원은 인도 남부의 드라비다 침략자들에 의해 여러 번 파괴되었습니다. 성전이 재건될 때마다. 중세사원은 1510년 포르투갈인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키르티 스리 라자싱하(Kirthi Sri Rajasingha)왕이 재건했습니다. 새로운 사원은 1927년에 착공되어 자선가인 헬레나 위제와르데네(Helena Wijewardene) 부인의 후원으로 1946년에 완공되었습니다.”(켈라니야 라자 마하 비하라 공식 홈페이지) 사원의 역사는 스리랑카 불교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마힌다 장로가 스리랑카에 도착한 후에 왕실의 후원을 받아 건립된 사원인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기록이 있다. 스리랑카 역사서 마하왐사에 따르면 부처님 재세시에 이미 세 번 이 사원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영문판 위키백과에서는 “불교도들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지8년 만에 스리랑카를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하실 때 이 사원이 신성시되었다고 믿습니다.” 라고 소개 해 놓았다.
사원에 들어 갈 때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 맨발이 기본이다.성소에서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양말도 벗어야 한다. 흙길을 맨발로 걸어 간다. 사원에갈 때는 꽃을 준비해야 한다. 꽃공양을 해야하기 때문이다.그래서일까 사원 앞에는 꽃가게가 줄지어 있다. 주로 연꽃이다. 다섯 송이에 200루피 가량이다. 우리 돈으로 500-600원 정도이다. 사원에 올라 갔다. 먼저 거대한 불탑이 위용을 자랑한다. 스리랑카에서만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산치대탑과 모양이 비슷하다. 스리랑카 불교는 서북인도 전통을 이어 받았다고 한다. 산치대탑이 있는 웃자인 지역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기원전 3세기에 받아 들인 불교전통이 고스란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고바라고 불리우는 불탑도 이에 해당된다. 산치대탑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불탑은 크지 않다. 아누라다푸라에서 보던 것보다는 훨씬 규모가 작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탑에 헌화를 하고 공양하는 사람들이 많다. 불탑과 관련하여 가이드로 부터 들은 것은 없다. 후기를 작성하면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이 불탑은 부처님과 관련 있는 것이 다. 영문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켈라니야 스투파(Kelaniya Stupa)에는 부처님이 앉아 설법하신 보석이 박힌 왕좌가 모셔져 있습니다.”라고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켈라니야 사원은 부처님의 행적과 관련이 있다. 부처님 재세시에 이미 이 곳을 방문했는가 하면 부처님이 앉아서 설법하던 자리까지 있다는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켈라니야 수투파라고 한다. 계단을 올라서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 졌다. 흰 옷 신도들로 도량이 가득한 것이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가족단위로 온 사람들도 많다.
사람들은 깔개에 앉아 있기도 하고 맨땅에 앉아 있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합장하고, 어떤 이들은 합장하며 암송을 한다. 어떤 이들은 가만 앉아 있다. 모두 경건한 모습이다.
사원에는 엄청나게 큰 보리수가 있다. 보리수 앞에는 불상이 있다. 사람들은 보리수와 불상에 공양하기 위해서 긴 줄을 섰다. 줄은 보리수를 한바퀴 감아 돌았다. 보리수에 긴 줄이 형성된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성수로 보리수에 물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물단지를 하나씩 들고 서 있다. 자신의 차례가 돌아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사원 한켠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다.기름 램프를 말한다. 우리나라 초공양을 연상케 한다. 보리수나 불탑이나 법당 안에서는 불을 볼 수 없다. 지정된 장소에서만 램프를 켤 수 있다. 사원에 향도 있을까? 놀랍게도 향이 있다. 법당 입구 멀리 떨어진 곳에 딱 한 곳 있다. 이번 순례기간 중에 수많은 사원을 방문했지만 향로가 있는 곳은 이곳 켈라니야 사원이 처음이다.
열기가 대단하다. 그러나 차분하다.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를 즐기려는 듯 하다. 마치 공원에 간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것 같다.언제까지고 앉아 있으려는 것 같다. 아마 하루 종일 앉아 있으려는 듯 하다. 한번 둘러 보고 서둘러 떠나버리는 외국인들하고 태도가 다른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 그것은 명상하는 모습이다. 거룩하고 성스러워 보인다. 명상 못지않게 아름다운 모습은 공양하는 모습이다. 켈라니야 사원에서 공양하는 모습도 그랬다.
혜월스님에게 물어 보았다. 스리랑카 불자들은 공양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문의한 것이다. 덧붙여서 건강, 학업, 사업, 치유를 위한 것이 아닌지 물어 보았다. 스님은 건강, 학업, 사업, 치유를 위한 공양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이는 세계 공통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다만 바라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공양은 어떻게 해야 할까? 스님은 “공덕이 되는 공양을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불교인에게는 두 가지 삶이 요청된다. 하나는 꾸살라행이고, 또하는 뿐냐행이다. 이를 각각 선행과 공덕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자는 번뇌를 소멸하는 삶으로서 윤회를 끝내는 수행자의 삶이 이에 해당된다. 후자는 번뇌가 있지만 윤회하는 삶속에서 공덕이 되는 재가 신도의 삶이 이에 해당된다. 혜월스님은 후자를 말한 것이다. 보리수를 한바퀴 돌았다. 보리수 사방으로 불상이 있다. 선정인을 한 사마디불상이다. 보리수에 공양하는 것은 불상에 공양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켈라니야 사원에는 세 가지 볼 것이 있다. 불탑과 보리수와 법당이다. 어디를 가나 불상이 있다. 불상은 법당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법당에 있는 불상은 거룩해 보인다. 석조법당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성소는 크게 짓는 것인지 모른다. 가톨릭 성당을 보면 알 수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위축되게 하고 경외감을 갖게 만든다.켈라니야 법당도 그런 것 같다. 법당은 마치 동굴처럼 생겼다.석재로 지어진 법당은 들어가면 어둡다.그런데 스리랑카 법당에 가면 어디에서든지 와불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열반상도 볼 수 있다.
법당은 대낮임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캄캄하다. 불상은 구중궁궐처럼 깊숙한 곳에 있다. 사람들은 꽃공양을 올리고 불공을 드린다. 꽃이 없으면 따로 마련된 보시함에 지폐를 넣는다. 법당은 큰 건물 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방이 있다. 와불도 있고 사리함도 있다. 그러나 머무는 기간은 짧다. 짧게 공양하고 지나간다.
법당의 불단에는 꽃으로 가득하다. 꽃 이외에는 일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연꽃이다. 스리랑카에서 국화는 수련이다. 특히 보라색 수련을 말한다. 이 밖에도 수많은 갖가지 꽃이 있다. 대가를 바란다면 기도가 될 것이다. 큰 돈을 내고 소원성취 되기를 바란다면 거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연꽃 한송이 올려 놓고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면 불공(佛供)이 될 것이다.
불공을 붓다뿌자(buddhapūjā)라고 한다. 푸자는 기도와는 다른 것이다. 수타니파타 ‘망갈라경(축복경, Sn.2.4)’에 따르면 뿌자에 대하여 “존경할 만한 님을 공경한다. (pūjāca pūjaneyyānaṃ)” (Stn.259)라고 했다. 존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 공양이다. 그래서일까 스리랑카 불자들은 대부분 꽃공양을 한다. 이는 공양단에 놓여 있는 갖가지 종류의 꽃을 보면알 수 있다. 불공은 어떤 마음으로 드려야 할까? 이에 대하여 혜월스님은 “불공드리는 것에 대해서 부처님의 마음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본다면 뿌자는 결코 대가를 바라는 기도가 될 수 없다.
사람들은 꽃송이를 불단에 올려 놓고 두 손을 이마에 대고 있다. 가장 아름답고 거룩하고 신성하게 보인다. 아마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바라고 행운이 있기를 바라는 것인지 모른다. 불교인들은 부처님의 위신력이 자신에게 임하길 바란다. 이와 관련된 여러 게송이 있다.
자야망갈라가타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테라와다불교권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암송되어 온 게송이다.
여덟 가지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에 대한 게송이다. 예경지송을 보면 또 하나의 자야망갈라가타가 있다. 이를 마하자야망갈라가타(maha jayamaṅgalagāthā)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위대한 축복의 게송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게송은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간행된 예경지송에 실려 있다. 불자들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독송하는 수호경전품에 있다. 위대한 승리의 축복의 게송은 니까야에 알려져 있지 않다. 후대 중세시대에 헌신적인 불자시인이 삼보를 찬양하여 지은 시로 추정되고 있다. 이 게송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 있다. 그것은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제게 또는 그대 에게 승리의 축복이 함께하여지이다.” 라는 후렴구이다. 이는 다름 아닌 ‘진실선언’을 말한다. 진실을 선언하는 힘으로 부처님의 위신력이 자신과 상대방에게 함께 하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후렴구이다.
불자들은 불공할 때 자신의 안전과 이익과 행복, 행운만을 위해서 불공드리지 않는다. 자신은 물론 상대방에게도 안전과 이익과 행복, 행운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삼보의 가피력으로 “모든 재앙 진압되고 모든 질병 소멸되고 모든 장애 사라지어 제게 또는 그대에게 행복한 삶이 함께하여지이다.”라며 기원하는 것이다. 보리수 옆에 강당이 있다. 운동장처럼 너른 강당에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있다. 여러 무리가 모여 있다. 모두 흰 옷을 입었다.
아마도 담마스쿨일 것이다. 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담마스쿨 학생들임에 틀림 없다. 마치 우리나라 에서 일요일 교회에서 열리는 성경학교 같은 것이다.스리랑카에서는 학생들이 일요일 사원에 가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담마스쿨과 관련하여 켈라니야 사원 공식홈페이지에 내용이 있다.담마스쿨은1973년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학생 수는4,000명이고100명의 교사와 직원으로 구성되어 있다.수업은 싱할라어와 영어로 진행된다. 혜월스님에 따르면 스리랑카에서는 주말만 되면 사원에 사람들이 몰린다고 한다.보름마다 한번씩 있는 포살날에도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발디딜 틈도 없이 많다고 한다.
켈라니야 사원은 일요일 이른 오전임에도 사람들로 북적이었다.관광객처럼 한번 한번 둘러보고 떠나는 사람들은 아니다.불공을 드리고 법문을 들으면서 하루를 보낸다.이것이 스리랑카 불교의 힘일 것이다.
켈라니야 사원에는 세 가지 성소가 있다.보리수와 불탑과 법당을 말한다.어느 것이 중요도가 높을까?이날 열기로 보았을 때는 단연 보리수를 들지 않을 수 없다.그 다음은 불탑이다.법당은 세 번째이다.
스리랑카에는 어느 사원에 가든지 보리수가 있다.스리랑카 불교에서 보리수는 부처님을 상징한다.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무불상시대 때는 보리수가 부처님이었다.이런 전통은 지금까지 내려 오고 있다.스리랑카 불자들에게 보리수는 신앙의 대상이다.이날 켈라니야 사원에서도 보리수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물단지를 들고 긴 줄을 섰다.그들은 왜 물단지를 들고 서있을까? 물단지는 보리수에 물을 주기 위한 것이다.부처님의 상징에 물을 주기 때문에 성수가 된다.이 때 성수는 생명수와도 같다. 보리수는 생명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에서는 불탑보다도 법당 불상보다도 보리수가 우선이다. 왜 그런가? 보리수는 생명이 있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사원에 보리수가 있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아있는 것과 같다. 보리수는 분양된다. 보리수가 자라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널리 퍼지는 것과 같다. 보리수를 잘 보살피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수호하는 것과 같다.
스리랑카불교에서 보리수는 깨달음의 나무로 그치지 않는다.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사원에 보리수가 있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살아 있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이 널리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켈라니야 사원에 긴 줄이 형성되었다. 줄은 보리수를 감아 돌았다.손에는 성수가 담겨 있다. 보리수에 물을 주는 행위는 보리수를 살리는 행위일뿐만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이 널리 퍼져나가게 하는 행위와 같다.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공덕이 어디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필자 담마다사 이병욱 거사는 전재성 박사가 이끄는
‘한국 빠알리 성전협회’에서
오랫동안 니까야 공부를 하고 있다.
그리고 블러그, 페이스북에
매일 불교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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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유게시판에 글을 쓰니,, 다른 게시판은 안보는데,, 전화에는 다른 게시판이 함께 보여서 열어보니 재미 있네요. 여행을 안가고도 여행을 할수 있으니 시간 벌고 돈 벌고,, 헌데 지도가 없어서,, 그 나라의 위치 짐작이 안되어 아쉽습니다. 지도는 야후에 많고, 도시에 여러가지 색으로 점을 넣으려면 photoscape 다운받아서 도구 tool 에서 하면 되요. 지도가 있으면 그 나라 문화 이해에 도움이 될겄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