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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문화유적답사 계획
일시 : 2014년 10월 17일(금) -18일(토)
장소 : 원주. 강릉 방면
반월당(17일 07:30 출발) - (211.9km. 3시간43분) - 박경리문학공원(10:13 도착. 관람 50분. 11:03 출발) - (67.0km. 1시간) - 효석문학마을(12:03 도착. 점심 1시간. 관람 1시간. 2:03 출발) - (34.3km. 40분) - 월정사(2:43 도착. 관람 1시간. 3:43 출발) - (8.8km. 30분) - 상원사(4:13 도착. 관람 50분. 5:03 출발) - (88.4km. 2시간) - 낙산사관광지(7:03 도착. 일박)
낙산사관광지(18일 06 기상. 낙산사관람 1시간30분. 7시30분 출발) - 낙산사관광지식당(08:00 - 08.40 아침식사. 08:50 출발) - (50.5km. 48분) - 오죽헌.강릉시립박물관(09:38 도착. 관람 1시간. 10:38 출발) - (1.5km. 5분) - 선교장(10:43 도착. 관람 1시간. 11:43 출발) - (3.6km. 8분) - 경포대(11:51 도착. 관람 30분. 12:21 출발) - (0.6km. 2분) - 경포대해수욕장(12:23 도착. 점심식사 1시간. 해변 산책 20분. 1:43 출발) - (1.9km. 5분) - 허균 허난설현 기념관 및 생가터(1:48 도착. 관람 1시간. 2:48 출발) - (343.2km. 4시간30분) - 반월당(7:18 도착)
* 현지 사정에 따라 변경 될 수도 있습니다
신청 : 이창석팀장(010-5096-7398)
* 숙소 예약 관계로 조기 신청 바랍니다.
박경리문학공원(강원도 원주시 토지길 9-11(단구동))
박경리(朴景利) : 1926년 경상남도 통영군에서 출생하였으며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 1950년 수도여자사범대학(現세종대학교)졸업, 1950년 황해도 연안중학교에 근무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녀의 남편 김행도는 북한군에 납북당했다.
그의 딸 김영주는 1973년에 저항시인 김지하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이 발표됨으로써 등단, 이후에는 단편들을 쭉 작성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큰 업적은 소설 토지를 들 수 있겠는데, 1969년 문화일보 연재부터 1994까지 총 5부로 완성된 대하소설이었다. 이 소설로 인하여 박경리는 유명세를 타, 영어·일본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는 등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2007년 말 폐암이 발견되어 고령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고, 2008년 뇌졸중 증세까지 나타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2008년 5월 5일 사망하였다. 묘소는 통영시 산양읍에 있다.
한편, 그녀가 3부작 연재하였던 '나비야 靑山(청산)가자'는 유작으로 남게 되었다.
그녀가 기거하던 토지문학관은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있는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바로 옆에 있어서, 석좌교수로 원주캠에 강의를 오기도 했다. 사후 원주캠퍼스에 박경리 동상과 시비가 세워졌다.
박경리문학공원 : 한국문단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칭송받고 있는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土地」를 주제로 선생의 문학세계를 탐방할 수 있는 원주 박경리문학공원은 소설「土地」의 산실인 박경리 선생의 옛집이 1989년 택지개발지구로 편입되어 자칫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을 염려한 문화계의 건의에 따라 한국토지공사의 시공으로 1997년 9월에 착공하여 1999년 5월 완공되었다.
11,438.4㎡ 부지에 꾸며져 있는 박경리문학공원은 박경리 선생의 옛집과 정원, 집필실 등을 원형대로 보존하였고, 주변 공원은 소설 「土地」의 배경을 옮겨놓은 3개의 테마공원 <평사리마당, 홍이동산, 용두레벌>으로 꾸몄다.
특히 박경리 선생의 옛집은 박경리 선생이 1980년 서울을 떠나 원주의 이곳 단구동으로 이사와 살면서 소설 「土地」 4부와 5부를 집필하여 1994년 8월 15일 대단원의 막을 내린 곳으로, 2층 연면적 211㎡ 규모이며 대지면적은 약 2,512㎡로 박경리 선생이 손수 가꾸던 텃밭과 나무 등 선생이 생활하시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아울러 그동안의 숙원사업이었던 박경리문학의집을 2010년 8월 15일 개관함에 따라 대문호의 일상과 삶의 자취는 물론, 평생을 집대성한 거대한 문학의 산맥을 한 자리에서 모두 느끼고 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공원 내에 북까페를 두어 1층에서는 선생님 관련 책자는 물론 다양한 서적을 볼 수 있게 하였고, 2층은 최희응 선생님이 평생 동안 수집한 일제강점기 교과서와 자료들을 기증 받아 「土地」의 주요 시대적 배경을 볼 수 있는 특별전시장을 마련하였다.
※ 이효석(李孝石 1907. 2. 23 강원 평창~ 1942. 5. 25 서울)
장편소설보다 단편소설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이국에 대한 동경을 소설화했다. 호는 가산(可山). 이시후(李始厚)의 맏아들로 태어나 가정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배웠다. 1920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25년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재학시절 조선인학생회 문우회에 참가하여 기관지 〈문우〉에 시를 발표했고, K. 맨스필드, A. 체호프, H. J. 입센, T. 만 등의 작품을 즐겨 읽으며 문학관의 정립에 힘썼다. 당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비슷한 경향의 소설을 써서 유진오 등과 동반자 작가로 불렸다. 1930년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이듬해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보름 정도 근무하다 경성(鏡城)으로 내려가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이때부터 작품 활동에 전념하여 1940년까지 해마다 10여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1933년 구인회에 가입했고, 1934년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40년 아내를 잃은 시름을 잊고자 중국 등지를 여행하고 이듬해 귀국했으며, 1942년 뇌막염으로 언어불능과 의식불명 상태에서 죽었다.
※ 이효석문학관(봉평면 창동리 544-3번지)
이효석 문학관은 가산 이효석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볼 수 있는 이효석 문학전시실과 다양한 문학체험을 할 수 있는 문학교실, 학예연구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학전시실은 그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으며, 재현한 창작실, 옛 봉평 장터 모형, 문학과 생애를 다룬 영상물, 어린이용 영상물 등을 통해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도록 준비하였다.
또 문학교실에서는 다양한 영상물을 시청할 수 있고 문예행사도 볼 수 있으며, 학예연구실에는 이효석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준비하여 그의 문학세계를 깊이 연구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문학정원에서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문학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 메밀꽃 필 무렵 줄거리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지 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 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춥춥스럽게 날아드는 파리 떼도, 장난꾼 각다귀들도 귀찮다. 얼금뱅이(곰보)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온갖 피륙을 팔던 가게)의 허생원은 기어코 동업의 조선달에게 나꾸어보았다.
드팀전의 허생원과 조선달이 장을 거두고 술집에 들렀을 때 벌써 먼저 온 동업의 젊은 녀석 동이가 계집을 가로채고 농탕치고 있었다. 허 생원은 괜히 화가 나서 기어코 그를 야단쳐서 쫓아내고 말았다. 장돌뱅이의 망신을 시킨다고 말이다. 그런데 뜻밖에 그는 얼마 후 되돌아와서 허생원의 나귀가 발광을 하고 있다고 일러 주는 것이었다. 허생원은 어이가 없었다. 얽음뱅이요 왼손잡이인 허생원은 계집과는 인연이 멀었다. 때문에 장돌림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건만 아직 홀몸이었다. 자신과 늘 함께하는 나귀의 신세가 느꺼웠던 것이다.
밤이 들어 허생원은 조 선달과 동이와 함께 나귀를 몰고 다음 장으로 발을 옮겼다. 봉평장으로 가기 위해서다. 달이 환히 밝았다. 달밤이면 으레, 허생원은 젊었을 때 봉평에서 겪었던 옛일을 애기하는 것이었다.
개울가에 모밀꽃이 활짝 핀, 달 밝은 여름밤이었다고 한다. 그는 멱을 감을 양으로 옷을 벗으러 방앗간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우연히 울고 있는 성서방네 처녀를 만나서 어쩌다가 정을 맺었던 것이다. 그녀는 봉평서 제일가는 일색이었다. 그는 오늘도 기이한 인연에 얽힌 이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동행을 하다가 허생원은 이날 밤 동이가 아버지를 모르고 자라난 사생아임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의 고향은 봉평이라 했다. 허생원에게는 맺히는 것이 있었다. 동이 어머니가 제천에서 홀로 산다는 말을 듣자 그는 놀라 개울에 빠지게 된다. 이튿날 그는 동이를 따라 제천으로 가 볼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문득, 그는 나귀를 몰고 가는 동이의 채찍이 동이의 왼손에 잡혀 있음을 똑똑히 보았다. 아둑시니(어둠의 귀신)같이 어둡던 그의 눈에도 이번만은 그것이 똑똑히 보이는 것이었다.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신이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가볍고 방울 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평창 월정사(平昌 月精寺.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4-8, 월정사(동산리)) 오
대산 동쪽 계곡의 울창한 수림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동대 만월산을 뒤로 하고, 그 만월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고요하게 들어앉은 월정사는 사철 푸른 침엽수림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띤다. 그 앞으로는 맑고 시린 물에서 열목어가 헤엄치는 금강연이 또한 빼어난 경관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자연 조건이며 풍광이 빼어날뿐더러 예로부터 오만 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성지로서 신성시 되어 왔다.
그 오대산의중심 사찰로서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1400여 년 동안, 개산조 자장율사에서부터 근대의 한암, 탄허스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름난 선지식들이 머물던 곳이려니와, 월정사는 오늘날에도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이곳 전나무 숲의 그 곧음과 푸름으로 승가(僧伽)의 얼을 오롯이 지키고 있는 한국 불교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월정사는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니 그 때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이었다.
자장율사는 636년에 중국 오대산으로 유학을 가고 그곳 문수사에서 기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자장율사는 “너희 나라 동북방에는 일만의 내가 상주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다시 나를 친견하라”는 게송을 문수로부터 듣고 신라에 돌아오자마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산에 들어가 임시로 초가를 짓고 머물면서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정진하였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하고 태백 정암사에 들어가 입적하게 된다. 비록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뜻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나 이로부터 월정사는 오대산 깊은 계곡에 터를 잡게 되었다.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平昌 月精寺 八角 九層石塔. 국보 제48호)
자장율사가 창건한 월정사 안에 있는 탑으로, 그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基壇) 위에 9층 탑신(塔身)을 올린 뒤,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을 새겨 놓았고, 아래·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받침돌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규모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고,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多層)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平昌 月精寺 石造菩薩坐像.보물 제139호)
월정사 경내의 8각 9층탑을 향해서 정중하게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다리를 세워 탑에 대해 공양하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높이 1.8m의 보살상이다.
머리에는 높다란 관(冠)을 쓰고 있으며 갸름하면서도 복스러운 얼굴에는 만면에 미소가 어려 있다. 머리칼은 옆으로 길게 늘어져 어깨를 덮고 있고, 목에는 아주 뚜렷한 3줄의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목걸이는 매우 섬세하고 곱게 조각하여 가슴에까지 늘어지게 장식하였다. 보살이 입고 있는 옷은 얇고 가벼워 몸에 밀착되어 있고 옷주름은 모두 희미하다. 오른쪽 팔꿈치는 동자상을 받침으로 고이고 있으며 동자상의 머리에 팔꿈치를 올려놓아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석조 보살좌상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릉 신복사지 석불좌상(보물 제84호)과 같은 형식이지만 상체에 비해 하체가 빈약하여 조형상 다소 불균형스런 모습이다. 그러나 개태사와 신복사지 탑 공양상과 더불어 고려시대 화엄종 계통사원에서 만든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며, 당대 불교사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사리장엄구(月精寺 八角九層石塔 舍利莊嚴具.보물 제1375호)
월정사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내 발견 유물일괄은 1970년 기울어졌던 팔각구층석탑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것으로 모두 9종 12점이다. 이들 일괄유물은 대체로 10∼11세기 경에 제작된 유물들이어서 석탑이 건립될 때 함께 내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괄 유물로는 은제도금여래입상과 청동사리외합을 비롯하여 은제내합, 호리병 모양의 수정사리병, 금동제 사각향갑, 청동거울, 전신사리경 두루마리, 수라향갑 주머니, 명주보자기 등이 남아 있다.
월정사팔각구층석탑내 발견 유물일괄은 고려시대 초기의 금속공예사 및 불교사상과 교류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상원사 동종(上院寺 銅鍾. 국보 제36호.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1211-50, 상원사 (동산리))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동종으로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이 종의 맨 위에는 큰 머리에 굳센 발톱의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연꽃과 덩굴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을 새겼다.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를 구슬과 연꽃 무늬로 장식하였다.
이 종은 조각 수법이 뛰어나며 종 몸체의 아래와 위의 끝부분이 안으로 좁혀지는 고풍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다.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平昌 上院寺 木造文殊童子坐象. 국보 제221호.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1211-50, 상원사 (동산리))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에 보천과 효명의 두 왕자가 창건한 진여원(眞如院)이라는 절에서 시작된 사찰로, 조선 세조가 이곳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질병을 치료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와 같이 상원사는 문수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절로,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은 예배의 대상으로서 만들어진 국내 유일의 동자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고개는 약간 숙인 상태이며 신체는 균형이 잡혀 있다.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올린 동자머리를 하고 있으며, 얼굴은 볼을 도톰하게 하여 어린아이 같은 천진스러움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넓은 어깨에는 왼쪽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가로질러 옷자락이 표현되어 있고, 가슴에는 구슬장식이 늘어져 있다. 옷주름은 신체의 윤곽에 따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고, 왼손은 엄지손가락과 약지 손가락을 거의 맞닿을 듯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왼쪽 다리를 안으로 접고 오른쪽 다리를 밖으로 둔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데, 대좌(臺座)는 마련되지 않았다.
최근에 이 동자상 안에서 발견된 유물에 ‘조선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 부부가 세조 12년(1466)에 이 문수동자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와 유래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조선 전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보살좌상 및 복장유물(平昌 上院寺 木造文殊菩薩坐像 및 腹藏遺物. 보물 제1811호. 불상1구, 복장유물(후령통 1점, 발원문 9건 12점).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로 산1211-92 (진부면, 상원사))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보살좌상 및 복장유물(平昌上院寺木造文殊菩薩坐像및 腹藏遺物)’은 조선 1661년(현종 2)의 조성연대와 문수보살좌상임을 밝히는 발원문과 함께 많은 복장유물을 동반하고 있는 중요한 보살상이다. 이외에도 발원문을 통해 같은 해 전라남도 강진의 무위사 지장보살상을 조성한 회감(懷鑒)과 여러 명의 조각승이 함께 참여하여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원사 보살상은 여의를 들고 있는 문수보살상으로 희귀한 예에 속한다. 또한 지물(持物)뿐만 아니라 섬세한 보관도 조성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주목된다. 특히 안정감 있는 신체, 조용하면서도 중후한 느낌의 상호, 입체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선묘를 보이고 있어 조각적으로도 완성도가 높다.
발원문은 의천(義天)이 작성한 것인데 상원사의 세 번에 걸친 중창내력과 성격, 문수보살상의 조성과정 등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특히 이 불상을 조성한 회감은 17세기 중엽경 인균(印均)과 함께 많은 불상을 제작했던 조각승이어서, 당시 활발히 활동했던 조각승간의 교류관계 및 이에 따른 불상 양식의 흐름과 변천을 연구하는 많은 도움이 된다.
한편 1661년이라는 분명한 조성시기는 이 상이 17세기 전반기과 후반기 양식을 이어주는 지점에 있는 불상이자 17세기 후반의 기준작으로 대표될 수 있음을 의미하여 이 시기 불교조각 및 조각승 연구에 중요한 가치가 인정된다고 하겠다.
평창 상원사 문수전 목조제석천왕상(平昌 上院寺 文殊殿 木造帝釋天王像.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0호)
이 제석천왕상은 복장유물이 완전하게 보관되어 있어 1645년이라는 정확한 제작연대와 제작자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각적으로 우수하며 현존하는 조선시대 제석천왕상으로 매우 귀중하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평창 상원사 문수전 목조동자상(3구)(平昌 上院寺 文殊殿 木造童子像(3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1호)
이 동자상 3구는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조각적으로도 뛰어난 조선후기의 목조상으로, 불교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평창 상원사 영산전 석가삼존ㆍ십육나한상 및 권속(平昌 上院寺 靈山殿 釋迦三尊ㆍ十六羅漢像 및 眷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이 불상들은 조각수법이 정교할 뿐만 아니라 제작연대(1711년) 및 작자를 명확히 알려주는 복장유물을 동반하고 있고, 개성 있고 다양한 모습의 특징 있는 형태들로 당대 16나한상 연구에 중요시 되어야 할 작품이다.
낙산사(洛山寺)
낙산사(洛山寺)는 대한민국 강원도 양양군 오봉산에 있는 절이다. 671년에 창건된 이후 여러 차례 중건, 복원과 화재를 반복하였다.
절 주위에는 보물인 낙산사칠층석탑과, 공중에서 보석을 얻어 넣어 두었다는 공중 사리탑과 그 비가 있다.
해수관음상 : 671년(신라 문무왕 11년) 의상이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굴 안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굴속에 들어가 예불하던 중 관음보살이 수정으로 만든 염주를 주면서 절을 지을 곳을 알려 주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고 ‘낙산사’라 하였다 한다.
858년 신라 헌안왕 2년 범일대사가 중창하였으나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1467년 조선 세조 13년 왕명으로 크게 중창하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화재를 겪었다. 다시 1624년 인조 원년, 9년(1631)과 21년(1643) 재차 중건이 있었으나 1777년 정조 원년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 다시 중건하였다.
한국 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53년에 다시 지었지만, 2005년 4월 5일 산불로 또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서 2007년 4월 5일에 복원했다.
문화재
낙산사 경내에 있는 문화재는 다음과 같다.
낙산사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 조선이 유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불교가 쇠퇴하는 상황에서 지어진 7층 석탑은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하나이다.
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 (보물 제1362호) :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 (보물 제1723호, 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5호) : 1692년 조선 숙종 18년에 승려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부도로 모신 사리의 주인공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양양 낙산사 일원(사적 제495호, 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 (명승 제27호)
의상대(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8호) : 낙산사를 지은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만해 한용운이 머물던 1925년에 만든 정자이다.
낙산사 홍련암(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 : 신라 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가 세운 불전으로, 의상대사가 붉은 연꽃 위에 나타난 관음을 직접 보고 대나무가 솟은 자리에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홍련암은 석모도 ‘보문사’, 남해 금산의 ‘보리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관음 도량으로 인정받는 곳이다. 의상대사의 좌절과 희망의 순간에 관음보살이 알려준 지점이 바로 이곳 홍련암이다. 대나무가 솟아있던 이곳에 의상이 암자를 지은 것은 676년 신라 문무왕 16년의 일이었는데, 1619년 조선 광해군 12년에 중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낙산사홍예문(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 : 1467년 조선 세조 13년에 왕이 낙산사에 행차해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으로,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낙산사원장(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 : 낙산사 법당인 원통보전의 둘레를 사각으로 에워싸고 있는 담장이다. 세조가 낙산사를 고쳐 지을 때 처음 이 담장을 지었는데 대부분 터만 남아 있어 몇년 전 연결·보수를 끝냈다.
낙산사 범종(구 보물 제479호) : 조선 예종이 아버지 세조를 위해 보시한 동종으로, 높이 158㎝, 입지름 98㎝인 이 동종은 조각수법이 뚜렷하고 모양이 아름다우며 보존상태가 좋아 한국 종을 대표하는 걸작품으로 꼽힌다.
조신의 꿈(삼국유사-조신은 망연자실하여 세상일에 전혀 뜻이 없어졌다)
즐거운 시간은 잠시 뿐 마음은 어느새 시들어
남모르는 근심 속에 젊던 얼굴 늙었네.
다시는 좁쌀밥 익기를 기다리지 말지니,
바야흐로 힘든 삶 한순간의 꿈인 걸 깨달았네.
몸을 닦을지 말지는 먼저 뜻을 성실하게 해야 하거늘
홀아비는 미인을 꿈꾸고 도적은 장물을 꿈꾸네.
어찌 가을날 맑은 밤의 꿈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淸凉)의 세계에 이르는가.
신라 때 승려 조신이 절의 장원 관리임무를 맡아 명주에 내려갔다. 그는 태수의 딸 김씨를 연모하여 낙산사 관음보살께 인연을 맺게 해 달라 빌었다. 그러나 여인이 다른 곳으로 시집가고 조신은 보살을 원망하며 잠이 들었다. 곧 김씨가 찾아와 사랑을 고백하고 조신은 그를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사십 년 동안 자식 다섯을 두었다. 그들은 깊이 사랑했지만 콩잎이나 명아주를 끓이기도 힘들고 백 번 기워 입은 옷은 너덜거려 몸을 가릴 수 없었다. 자식을 데리고 걸식하다 장남이 굶어 죽었다. 늙은 부모를 대신해 밥을 빌던 어린 딸은 개에 물려 아프다고 울었다. 슬픈 아내는 자식을 둘씩 맡아 헤어지자고 제안하고 조신도 승낙했다. 이별하고 길을 걷다 깨어나니 밤이었다. 까맣던 그의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셌다. 조신은 아이를 묻은 곳에서 파낸 돌미륵을 가까운 절에 모시고 장원 관리직을 사임했다. 재산을 털어 정토사를 짓고 수행했는데 그 뒤 행적은 아무도 모른다.
강릉 오죽헌(江陵 烏竹軒. 보물 제165호.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 201번지.율곡로3139번길 24)
오죽헌이라는 이름은 이이의 사촌인 권처균(權處均)의 호에서 유래했다. 권처균은 외할머니인 용인이씨에게서 집을 물려받았는데, 집 주위에 줄기가 손가락만하고 색이 검은 대나무[오죽(烏竹)]가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고 정하였다. 그리고 호를 다시 집 이름에 붙이면서 이 집이 오죽헌이 된 것이다.
기후적 측면에서 볼 때 오죽은 해양성 기후와 관련이 있다. 대나무는 원래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식물로 강릉 정도의 북쪽 위도에서는 자랄 수 없다. 그러나 강릉은 동해안에 접해 있어서 해양성 기후를 띠고 있으며 따뜻한 동한해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겨울에도 상대적으로 따뜻하여 대나무가 자랄 수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 이익공 양식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두고 방주를 세웠으며 도리는 굴도리로 하고 부연을 단 겹처마로 지붕을 만들었다.
건물 정면에서 좌측 두 칸은 우물마루의 대청이며 우측 한 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으나 뒤쪽의 반 칸은 우물마루의 툇마루를 두었다. 대청의 전면은 사분합 띠살문, 측면과 후면에는 두 짝 여닫이 창호로 하고 판문을 그 하부 벽면에는 머름을 둘렀다. 측면의 창호에는 중간 설주자리에 홈이 파여 있어 오래 된 고택임을 보여 준다.
온돌방의 전면 창호는 두 짝 여닫이 세살문으로 되어 있고 대청과 방 사이에는 외짝 여닫이 세살문이 있다. 대청과 방의 벽은 흙벽 위 석회마감, 온돌방 천정은 고미반자이며 바닥에는 왕골자리를 깔아 놓았다. 대청 가운데 기둥에 걸쳐서 충량을 두고 그 상부 지붕의 합각에 우물천정을 가설하고 천정 다른 부분은 연등천정으로 처리하였다.
익공의 쇠서 곡선은 주택의 연대가 오래 되었음을 보여 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있는 화반소로는 지붕처마를 높이 올려 일조와 통풍을 원활하게 하였다.
오죽헌 뒤쪽에는 원래 고택이 있었으나 정화사업 시 모두 헐어내고 지금은 사랑채 일부만 남아 있다. 사랑채는 5량 팔작지붕 형식으로 행랑과 부엌을 3량 맞배지붕으로 하여 이어 붙였다. 자연석 네모난 초석 위에 방루를 세우고 전면에 툇간마루가 있고 난간을 두른 정면 3칸, 측면 2칸의 가옥이다. 우측에는 우물마루의 대청이 있고 전면은 네 쪽 분합문으로 되어 있다. 방의 전면 창호는 두 짝 여닫이 세살문이며 띠방이 있고 안방에서 부엌 쪽으로 수납장이 있다. 대청 측면에서 방의 전면까지 벽 하부에 머름이 이어져 있고 부엌과 행랑간 쪽으로 외짝 세살여닫이문이 있다.
강릉 선교장(江陵船橋莊.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 강원 강릉시 운정동 운정길 63)
경포호가 현재와 같지 않고 그 둘레가 12㎞였을 때 배를 타고 건너다녔다고 하여 '배다리[船橋]'라는 택호를 가지고 있다.
정자인 '활래정(活來亭)'은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 중 "위유원두활수래(爲有源頭活水來)"에서 집자한 것으로, ‘맑은 물은 근원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내번(李乃蕃.1703~1781)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하여 대대로 후손들이 거처하였는데, 열화당(悅話堂)·안채·동별당(東別堂)·활래정 등 모두 4채가 있다. 가장 오래된 안채 주옥(住屋)은 당초에 주거를 정한 때의 건물이라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사랑채인 열화당은 1815년(순조 15)에 오은거사(鰲隱居士) 이후(李垕)가 건립한 것이다. 활래정은 그 이듬해 세운 것을 증손인 이근우(李根宇)가 현재의 건물로 중건하였고, 동별당은 약 50년 전에 새로 건립한 건물이다.
처음부터 계획 하에 건축되기 보다는 생활하면서 점차 증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통일감과 짜임새는 조금 결여되었으나 다른 상류 주택에서 볼 수 없는 인간미가 넘치는 활달한 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안채는 전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 양식의 건축물로서 우측에 동별당, 서측에 서별당과 이어져 있다. 우물마루 대청이 중앙에 있고 좌측에 건넌방, 우측에 안방이 있다.
안방은 주인 여자가 거처하는 공간으로 뒤쪽에 골방과 반침이 있다. 골방은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기 위한 장소로서 평상을 두고 은밀하게 사용하였고 며느리가 생활하는 건넌방은 장지문에 의해 나뉘어져 있으며 뒤쪽 방에 살림도구를 넣어두는 반침이 있다. 안방과 대청의 앞에는 툇마루가 깔려 있어 통행을 편리하게 하며 건넌방의 측면에는 평난간이 설치된 툇마루가 있어 서별당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여느 상류 주택과 같이 대가족이 함께 생활하던 공간이었므로 안채의 부엌 공간을 크게 하고 있다. 안채는 이 집안에서 처음 건축된 곳으로 집의 규모에 비하여 소박하며 민가적인 풍취를 나타내고 있다.
화강석 두겁대 쌓기 기단 위에 방형 초석을 두었으며 방은 미닫이 용자살+여닫이 두 짝 세살문의 겹문이고 마루의 전면에는 궁판이 있는 세살 네 짝 분합문을 달았다. 안채 전면에는 바닥이 마루로 된 반빗간이 3칸 있으며 안방 살림을 돕는 사람을 위한 방 2칸이 ‘ㄱ’자로 이어서 있다.
열화당은 선교장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1815년(순조 15)에 건립된 전면 4칸, 측면 2칸의 누마루가 있는 팔작기와지붕 양식의 사랑채 건축물이다. 7개의 석조 계단을 올라가야 되는 높은 위치에 자리 잡아 위엄을 나타내고 있으며, 대청과 누마루로 된 작은 대청 사이의 방들은 ‘ㄴ’자로 배치되어 있다.
열화당의 가장 큰 특징은 외부 공간이 창호로 둘러싸여 한국의 전통 건축 외부 창호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과, 대청에 있는 T자형 대들보가 외부에 노출되어 있으며, 목재가 나타낼 수 있는 질감과 구조는 타 재료가 모방할 수 없는 독특한 형상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특히 여름철 들어열개를 이용하여 문짝을 서까래에 걸쳐 통풍을 할 때면 자연과의 조화가 그대로 드러난다.
동별당은 경농(1877~1938)이 건립하였으며 안채와 연결된 별당이다. 화강석 장대석 네겁 대 쌓기 기단 위에 방형의 초석을 둔 겹처마 팔작기와지붕 형식의 구조물이다. 안채에 이어서 반침이 있는 방이 있고 이어서 대청, 방이 있다. 우측 방의 전면에 지금은 방이 한 칸 더 있으나 원래는 다락이 있었다고 한다. 대청 앞과 뒤에는 우물마루의 툇마루가 있어 방과 대청의 연결 통로로 이용하고 있다. 안채에 가까운 별당으로서 방문객들과 분리하여 가족들과의 단란을 위하여 건축하였다. 대청은 전면에 네 짝 분합문이 달려 있고 처마의 서까래 사이를 회바르기로 마감하지 않고 판재를 다듬어 멋을 내고 있다.
행랑채는 남·녀의 출입대문이 솟을대문과 평대문으로 각각 열화당과 안채 앞에 있으며 곳간, 마구간, 행랑방, 부엌 등이 동별당 앞에서 열화당까지 ‘ㄴ’자로 연결되어 있다. 이곳은 일상용품인 약재, 공구 등의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만들어졌다. 행랑방의 앞에는 툇마루가 달려 있고 처마의 서까래 사이를 회바르기로 마감하지 않고 판재를 다듬어 멋을 내고 있다.
강릉 경포대와 경포호(江陵 鏡浦臺와 鏡浦湖. 명승 제108호. 강원도 강릉시 저동 94)
강릉 경포대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고려 말 충숙왕 13년인 1326년 지중추부사 박숙에 의해 창건된 누정 건물로 안축의 「鏡浦臺新亭記」記文에 “옛날 영랑선인이 놀던 곳이며 정자가 없어 비바람이 치는 날 놀러왔던 사람들이 곤욕스럽게 여겨 작은 정자를 지었다”라고 하여 창건목적을 밝히고 있어 역사성이 높다.
또한 창건 당시 이전시대의 주춧돌과 장대석이 발견되어 훨씬 이전시대부터 이곳에 정자형태의 건물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강릉지역 누정 기록으로 신라 성덕왕대 순정공(純貞公)과 관련이 있는 임해정과 술랑선도(述朗仙徒)와 관련이 있는 한송정을 통하여 현존하는 경포대와 더불어 강릉 지역의 누정문화의 시원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관동팔경(關東八景) 중 하나인 경포대(鏡浦臺)는 지형∙지질적 가치가 뛰어난 자연석호인 경포호와 함께 동해안의 빼어난 절승지로 예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간 명승지로서 명사들의 수많은 시∙서∙화가 있어 역사문화경관적 가치가 높다.
경포대와 경포호의 자연풍광을 관동팔경에 비유한 경포팔경과 호해정을 중심으로 한 팔경, 김극기의 강릉팔영 등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천혜의 자연경관을 조망하며, 심성을 수양하는 곳일 뿐 아니라 풍부한 문학적 소재성 등 문화적, 경관적 요소가 결합된 누정으로 장소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다.
영조 22년(1746년) 김상성(金尙星, 1703~1755)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화원들에게 강원도 절경을 그리게 한 후 친한 사람들에게 시를 지어 완성한 작품이 관동십경(關東十景)인데 그 중의 경포대 그림은 경포대와 경호를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부감법으로 그린 것으로, 경호는 경포대를 경계로 하여 내호와 외호로 구분하고 있으며, 호수에는 낚시질을 하는 늙은 어부와 갈매기의 한가로운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호수와 바다가 경계되는 곳에는 백사장과 함께 현재의 죽도봉이 그려져 있고, 초당과 경포대 뒤쪽에는 소나무 사이로 꽃들이 만발하여 봄날의 정취를 감상할 수 있으며, 멀리 강문 너머로 보이는 동해 바다에는 아침 해가 떠오르는 일출 모습과 함께 햇살을 받으며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돛단배를 그리고 있어 경포호의 옛 자연환경 및 인문환경을 알 수 있어 가치가 높다.
정철(鄭澈, 1536-1593)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경포대를 관동팔경 중 으뜸이라 했으며, 경포대에 저녁이 되어 달빛이 쏟아지면 하늘, 바다, 호수, 그리고 술잔과 임의 눈동자 등 다섯 개의 달을 볼 수 있는 동해안 제일의 달맞이 명소이다.
경포대 정자 내에는 율곡 이이가 10살 때 지었다는 「鏡浦臺賦」를 비롯하여 숙종어제시, 조하망의 상량문 등 여러 명사의 시문현판은 인문학적 가치가 높다.
강릉 경포대는 고려 말 1326년 지추부학사 박숙이 방해정 뒷산의 인월사터에 세웠던 것을 1508년에 강릉부사 한급이 현재 자리로 옮겼고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춘 약 680여년의 역사성을 지닌 누정건축물이며, 경포호와 더불어 탁월한 역사문화적 경관성을 지닌 곳이다.
강릉 경포대는 16세기 이후 지방 재지사족(在地士族)이 주체가 되는 별당식 정자 형태로 전환되는 누정건축 양상의 변화를 고찰할 수 있는 중간적 의미를 갖는 정자로서 건축역사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동인시화(東人詩話 : 1474년(성종 5) 서거정(徐居正 : 1422~92)이 지은 시비평서. 시화만을 다룬 시화 전문서로서 다른 시비평서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시와 시화만을 싣고 있다. 1475년(성종 6) 초간(初刊), 1636년(인조 14) 중간(重刊)한 것으로 보인다)》설화 홍장(紅粧) 고사는 경포대에서의 홍장과 강원 감찰사 박신과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구전문학의 가치가 높음 곳이다.
홍장(紅粧) 고사 : 강원도 안찰사(고려 시대, 각 도의 행정을 맡았던 으뜸 벼슬. 1012(현종 3)년에 절도사(節度使)를 고친 이름이다)로 온 박신은 강릉의 기생 홍장과 정이 두터웠는데, 임기가 차서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홍장을 찾으니 부사 조운흘(趙云仡)이 거짓으로 죽었다고 하여 매우 슬퍼하였다. 부사 조운흘은 경포에서 안찰사 박신을 맞이하여 놀면서, 몰래 홍장으로 하여금 예쁘게 꾸미고 고운 옷으로 단장케 하여 따로 놀이 배를 마련하고, 늙은 관인 한 사람을 골라 눈썹과 수염을 하얗게 하고 의관을 훌륭하게 차리게 한 후 홍장을 배에 태우게 하였다.
그 배가 천천히 노를 저어 포구로 들어오면서 물가를 배회하는데 맑고 둥근 음악소리가 공중에 떠오는 것 같았다. 조운흘이 “이곳에는 신선들이 있어 왕래하는데 단지 바라다 볼 것이요, 가까이 가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갑자기 배가 순풍을 타고 순식간에 바로 앞에 다다르니 박신이 놀라 말하기를, “신선의 무리임이 분명하구나.” 하고는 익히 살펴보니 곧, 홍장이었다. 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는 일화가 『동인시화』에 전하고 있다
강릉 경포대(江陵 鏡浦臺.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호. 강원 강릉시 저동)
관동팔경의 하나로 경포호수 북쪽 언덕에 있는 누각이다. 고려 충숙왕 13년(1326)에 방해정 뒷산 인월사 터에 처음 지었던 것을 조선 중종 3년(1508)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를 하였다고 한다. 태조(재위 1392∼1398)와 세조(재위 1455∼1468)는 친히 이 경포대에 올라 사방의 경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5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모두 48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졌으며 마루의 높이를 달리하는 입체적 평면을 하고 있다. 이름인 ‘경포대’ 전자체 현판은 유한지의 글씨이고, 해서체 현판은 이익회의 글씨이다.
내부에는 숙종이 직접 지은 시와 율곡 이이가 10살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비롯한 유명인들의 글이 걸려있다. ‘제일강산’은 주지번의 글씨로 알려져 있는데 ‘제일’과 ‘강산’의 글씨체가 다른 것으로 볼 때 ‘강산’은 뒷날 다른 사람이 써 넣은 것으로 보인다.
누각 주위에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들이 알맞게 우거져 운치 있는 경관을 이루고 있다
허균(許筠, 1569년 12월 10일(음력 11월 3일) ~ 1618년 10월 12일(음력 8월 24일)) :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학자이자 작가, 정치가, 시인이었다. 서자를 차별 대우 하는 사회 제도에 반대하였으며, 작품 《홍길동전》이 그의 작품으로 판명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본관은 양천,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또는 학산(鶴山), 성소(惺所), 성수(惺叟)로 불렸고 후에는 백월거사(白月居士)로도 불렸다.
1594년(선조 27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597년(선조 30년) 다시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공주 목사를 거쳤으나 반대자에게 탄핵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당했다.[1]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불교를 신봉하여 논란을 야기(惹起)하기도 했다. 벼슬은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광해군 때 대북에 가담하여 실세로 활동하였으나 1617년(광해군 10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으로 가담하였다.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에 항거하려고 서자와 불만하는 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이를 비판하던 기자헌을 제거하려다가 역으로 반역을 도모하려했다는 기준격의 밀고로 능지처참되었다.
그의 문집은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 왕조 치하에서 모두 인멸(湮滅)될 뻔하였으나 그가 죽음을 예상하고 당시 소년이던 외손자 이필진에게 전해줘서 후대에 전래었다. 홍길동전과 성소부부고 등을 남겼다. 특히 홍길동전은 무명으로 발표하였으나 나중에 유몽인이 그의 작품이라는 기록을 남겨 알려지게 되었다.
당색(黨色)으로는 동인이었으며 북인, 대북으로 활동하였다. 초당 허엽의 아들로, 허성의 이복제(異腹弟)이자 허봉, 허난설헌의 친제(親弟)이다. 우성전은 그의 이복 매부였다. 손곡 이달과 서애 류성룡의 문인이다. 동인의 초대 당수 성암 김효원(金孝元)의 사위이다. 강원도 출신.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본관은 양천(陽川). 허균의 누나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문집을 간행한 여성시인이다. 난설헌의 집안은 아버지와 자녀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허씨 5문장(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이라 불렀다. 당대 남성 중심 사회에서는 배척받아, 글빨 딸리는 남편에겐 외면당하고 시집살이를 당하다가, 결국 시집살이 스트레스 및 친정 오빠들과 자식들까지 요절한 충격 등으로 27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그녀의 불행은 허균이나 그녀를 키워낸 친정의 자유로운 분위기와는 달리 엄격한 김성립의 집안과의 갈등, 그녀의 도교적인 취향 등을 인정할 수 없었던 시어머니와의 불화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후인들은 추측한다.
자기 인생이 불행한 것을 본인도 알고 있어서인지 그녀는 생전에 소천지(조선)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라고 신세 한탄을 하기도 했다.
자식으로는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었는데 아이들이 엄마를 닮아서 연약했는지 둘 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유언으로 자신이 쓴 시를 전부 불태워서 없애달라는 말을 남겼다. 다행히 허균은 죽기 전에 불행 일생을 산 누나의 시를 모아서 책으로 발간했다. 허난설헌은 죽기 전에 유언으로 자신의 시를 모두 불태워달라고 해서 모두 태워버렸는데, 허균이 발군의 기억력으로 누나의 시들을 거의 외우고 있어서 자신이 외운 걸 책으로 냈단 얘기가 있다. 또는 불 태울 때 허균이 급히 책 한질을 꺼냈다고 한다.
비록 원작자가 태워버리라고 했지만 사악한 남동생 허균이 아니었다면 허난설헌은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1598년 허균이 정유재란 때 원정 나온 명나라 오명제에게 난설헌의 시 200여 편을 전해주어 이 시가 명나라에서 편찬한 《조선시선》, 《열조시선》 등에 실렸다. 그 후 1606년 허균이 명나라 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전해주어 《난설헌집》이 명나라에서 간행되었다. 그리고 200년 뒤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수많은 여인들의 눈물을 앗아갔다. 그 와중에 조선에서는 허균의 역모 때문에 애꿎은 허난설헌의 시집도 불태워졌기 때문에, 일본을 통해서 동래로 역수입 되는 얄궂은 상황이었다. 중국과 일본 찍고, 조선에서 다시 출판된 것이 1692년. 허난설헌이 죽은지 103년이나 지난 이후이다.
심지어 훗날 정조마저도 읽고 감탄했다고 한다.
(출처 : 문화재청. 강릉시청. 삼척시청. 위키백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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