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伯夷山~叔齊峰
2020 04. 30. 나 홀로.
예쁜 王冠(왕관=Crown=Corona)이 匕首(비수)를 품에 안고 이 世上(세상)에 나타나 모든 人類(인류)를 捕虜(포로)로 잡았다. 오랜 抑留(억류)에 시달린 나, 脫出(탈출)을 試圖(시도)한다.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볼까??
6.25動亂(동란)때 洛東江防衛線(낙동강방위선)의 最前線(최전선)이었던 咸安(함안). 忠節(충절)의 고장이며 歷史(역사)의 寶庫(보고)인 咸安.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어 汽車時間(기차시간) 알아보고 山行計劃(산행계획) 세워 오늘 집을 나선다.
✦(나를 사로잡았던 예쁜 王冠, 고약한 王冠).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플라스마’
(Plasma)가 번개 같이 오버랩(Overlap) 됐다. 플라스마’가 地球의 空氣分子와 衝突해 ‘오로라’(Aurora)를 만들고 ‘오로라’는 音韻(음운)이 비슷한 ‘콜레라’(Cholera=虎 列刺(호열자)를 派生(파생)시켜 解放(해방) 이듬해(1946年) 우리나라 南部地方(남부지방)을 주 타깃(target)삼아 많은 사람을 잡아가는 재미를 보더니 이번에는 그 四寸(사촌) 코로나(Corona)라는 놈을 派遣(파견)시켜 온地球를 焦土化(초토화)한다.
(1946年 5月, 中國 南部地方(남부지방)의 歸還同胞(귀환동포=憂患同胞(우환동포)라고 빈정거리기도 했다) 3,150名(명)을 태운 배가 釜山으로 들어왔다. 그 中 怪疾(괴질)에 걸려 死亡(사망)한 2軀(구)의 屍身(시신)을 防疫措置(방역조치)도 하지 않고 美軍(미군)이 影島(영도) 바닷가에 水葬(수장)을 했다. 그로부터 콜레라가 急速度(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이 고약한 怪物(괴물)의 바이러스가 ‘플라스마’에서 分化(분화)된 것이라면 이를 退治(퇴치)하는 主導權(주도권)은 自己(자기) 한 테 있다고 物理學界(물리학계)와 醫學界(의학계)가 서로 다투지 않을까? ---코미디(Comedy)였읍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플라스마)
龜浦鐵道驛(6/32)-三浪津-咸安驛-郡北驛後門(西쪽)-(150m)-高架道路 밑 駐車場-里程標⦁登山路入口(階段)-(30分)-西村갈림길-體育公園⦁사거리(直)-(20分)-伯夷山(西쪽)-(50m)-仁川李氏 墓(左)-(急傾斜)-둘레길=Deck길⦁2番恐龍-(160m)-1番恐龍=塔돌이⥃3番恐龍-藥水터-鞍部사거리(右)-(15分)-叔齊峰(頂上石맞은 편)-갈림길(直)-갈림길(直)-明館沼溜池 里程標-開豁地-(眺望⦁寫眞)-무덤-대숲-道川齊-道川齊標識石(左=우견정公園)(右로)-下馬石-(100m)-平廣숲=養拙숲-道路(左)-고인돌 4~7號-道路-(600m)-郡北驛(14/11⦁18/43)
(約 8Km. 約 3/40分+1/00分=4/40分)
郡北驛-龜浦驛-地下鐵 龜浦驛 맞은편(6⦁160番 버스)-집.
(龜浦鐵道驛 Tel: 1544-7788) (郡北面: 055-580-3251)
慶全線=釜田-沙上-龜浦-華明-勿琴-院東-三浪津-翰林亭-進永-昌院-馬山-中里-咸安-郡北-院北-平村-晉州樹木園.
龜浦-(2時間)-郡北驛-(1時間)-伯夷山-(1/20分)-叔齊峰-(1/20分)-郡北驛=(3/40分)
(地圖) (함안 백이산 숙제봉)
**5時 30分 쯤 눈을 떴다. 急(급)하다. 주섬주섬 챙겨 택시 타고 驛(역)으로. 無窮花號(무궁화)는 6/32分 定時出發(정시출발). 座席(좌석)은 3號車(호차)-66番(번)**
**車窓(차창) 밖 구경하다 想念(상념)에 잠긴다.
내가 咸安땅을 처음 밟은 것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아득한 옛이야기다.
中學(중학) 3학년 때 解放(해방)을 맞이했다. 倭(왜)놈 때, 學生(학생)이라지만 授業料(수업료=그 때에는 月謝金(월사금)이라 했다)를 내면서도 授業은 週日(주일)에 5, 6時間(시간) 정도고 낮에 밤을 이은 대부분의 시간은 그놈들이 저질러 놓은 ‘世界第2次大戰(세계제2차대전=그 놈들은 ‘大東亞戰爭(대동아전쟁)’이라 불렀다)을 돕는 일에 動員(동원)된 勞動者(노동자)였다. 그러니 他地(타지) 出入(출입)이나 旅行(여행) 같은 것은 꿈도 꿀 수없는 世態(세태)였고, 解放이 되고서는 여태껏 못 배우고 덜 배운 거 豫習(예습)하고 復習(복습)하느라 모든時間(시간)을 쏟아 부었으니 咸安으로 가는 길을 알리가 없었다. 解放 다음 다음해(1947年) 초가을 新韓公社(신한공사) 金海 出張所(김해 출장소)에 勤務(근무)하시던, 咸安 漆原(칠원)이 故鄕(고향)인 四寸 姊兄(사촌 자형)이 돌아가셨다. 解放 다음 해 ‘코레라=Cholera’가 猖獗(창궐)하여 많은 사람이 犧牲(희생) 됐지만 死因(사인)은 洛東江(낙동강) 下流地方(하류지방)에 風土病(풍토병)으로 자리매김한 肝(간)디스토마. 故鄕에 訃告(부고) 전할 사람은 나 밖에 없다. 階級章(계급장) 없는 카키색 軍服(군복)차림으로 住所(주소)하나 달랑 들고 洛東江堤防(제방)에 나와 車(차)를 기다렸다. 버스가 아닌 GMC(=트럭) 한 대가 먼저 온다. 손을 드니 黑人 兵士(흑인 병사)가 차를 세운다. 서툰 英語(영어)로 馬山(마산) 쪽으로 간다하니 ‘매이센?(Masan)하면서 타라는 손짓. 美 軍政時代(미 군정시대)였으므로 美軍(미군)이 많이 駐屯(주둔)해 있었고 車도 잘 태워주었다. 倭놈 末期(말기) 石油(석유). 揮發油(휘발유)가 엄청 귀했다. 집에서 켜는 호롱불 石油가 없어 植物(식물)의 열매에서 짜낸 기름을 대신했고 揮發油는 戰爭터로 다 가져가니 버스도 숯불을 피워 動力(동력)을 얻는 ’木炭(목탄) 버스‘로 改造(개조)했다. 당시에는 交通人口(교통인구)도 별로였지만 버스의 運行(운행) 횟수도 하루 두세 번 정도. 사람이 車를 기다리기도 했지만 車도 사람을 기다리기도 했다. ’木炭 버스‘는 運行도중 자주 꺼지곤 했는데 技士(기사)가 車 뒤쪽 숯가마를 열고 木炭을 집어넣어 불길을 더 높이고 했다. 美軍 駐屯후 기름은 넘쳐났지만 아직 改造 안한 ’木炭 버스‘도 더러 있었다.
내가 탄 GMC는 鳴旨(명지)-菉山(녹산)-熊東(웅동)-熊川(웅천) 지나 鎭海(진해) 中心部(중심부)에 들어와 馬山가는 쪽 길을 가리키며 여기서 차를 잡으라며 내려준다. 그 기서 한참을 기다리니 白人 兵士(백인 병사)가 모는 찦차. 손을 들고 ‘馬山’하니 태워준다. 馬山 어느 地點(지점)에 내려서는 咸安으로 가는 길 찾기가 여간 아니다. 물어물어 버스停留所(정류소) 찾아가 오랜 時間(시간) 기다려 咸安을 거쳐 가는 버스를 탔다. ’목탄 버스‘였는 지는 記憶(기억)이 없다. 여기서 내리면 된다라는 말 듣고 내린 고개, 이름 있는 고개였는데 그것도 記憶이 없다. 고개에서 내려와 엄청 걸었다. 강둑을 따랐고 나룻배도 봤고 호숫가도 거치며 물어물어 주소지 찾아가니 四寸 姊兄 門中(문중)이 閥族(벌족)을 이뤄 사는 동네였다. 이튿날 새벽, 葬事(장사) 치를 遺族(유족)들과 問喪客(문상객)들이 가득 탄 트럭에 실려 편안하게 돌아왔다.
***新韓公社 :
乙巳條約(을사조약)으로 우리나라 外交權(외교권)을 剝奪(박탈)한 倭놈이 우리 農土(농토)를 收奪(수탈)하기 위해 東洋拓植株式會社(동양척식주식회사)를 設立(설립)하고 많은 農土를 손아귀에 넣었다. 解放후 美 軍政廳(미 군정청)이 設立한 新韓公社가 東洋拓植株式會社 所有(소유)의 農土와 倭놈 會社(회사) 및 個人(개인)이 所有한 農土를 一括管理(일괄관리)=小作料 徵收(소작료 징수⦁耕作者(경작자)에게 有償分配(유상분배)등=했다.
*(군북역). 08/15分에 定時到着(정시도착). 後門(후문)으로 나와 郡北驛을 뒤돌아본다. 5940
***내가 咸安을 거쳐 간 일은 꽤 많아도 咸安의 山을 밟는 것은 두 번 있었다.
2007. 2. 14. 艅航山(여항산)-서북산-烽火山(봉화산) 줄기,
(艅航山 0825) (서북산 0831) (烽火山 0843)
2008. 4. 09. 馬山쪽에서 大山(대산)-匡慮山(광려산)-咸安境界(경계)의 사갓봉줄기,
(大山 4676) (匡慮山 4687) (사갓봉 4689)
*山行(산행)들머리 찾아가는 길. 左側(좌측) 으로. 5943
*들머리 風景(풍경) (1) 5944 (2)(무슨 看板(간판)이--)5945 (3) 5946(8/25分)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또 過去(과거)로 回歸(회귀)한다. 어머니는 나 외동아들 잘 되라고 많은 절을 찾아 다니셨고 供養(공양)도 많이 하셨다. 托鉢僧(탁발승)한테도, 또 거어지=乞人(걸인)가 托鉢僧을 假裝(가장)해 와도 施主(시주)를 아끼지 안하셨다. 大洪水(대홍수)를 치른 2年 뒤인 사월초파일(음력4월8일) 전날 밤, 어머니는 나를 다리고 金海(김해) 盆城山(분성산=萬丈臺=만장대) 꼭대기에 있는 海恩寺(해은사)로 가셨다. 지금 생각하니 새벽 무슨 行事(행사)에 參與(참여)하실 心算(심산)이었을 것 같다. 어두컴컴한 산길이 너무나 무서웠다. 어머니 치마폭을 잡고 가고팠지만 그럴 수 없는 산길, 절에 닿은 후 나는 송장처럼 뻗어 잤다한다.
(사월초파일이면 생각나는 海恩寺) (0548)
**오늘은 父母(부모)님께 못 다 한 孝道(효도)를 뉘우치며 내 後孫(후손)들이 多福(다복)하고 健康(건강)하며 所願成就(소원성취)하기를 祈願(기원)하러한다. 그리고 서로 怨望(원망)하며 疎遠(소원)했던 親知(친지)들에게도 내 마음을 열어 容恕(용서)를 빌고자한다.***
*西村(서촌) 갈림길 里程標(이정표). 5948
***오늘 내가 걸을 伯夷山(백이산)과 叔齊峰(숙제봉), 왜 딴 나라사람 이름을 따와서 지었을까? 忠節(충절)의 代名詞(대명사)로 내 새울만한 사람이 中國(중국) 밖에 없었다면 지나치게 事大主義 思想(사대주의 사상)에 陷沒(함몰)돼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쉼터에서. 5954
***伯夷山 叔齊峰을 자세히 알려면 古代(고대) 中國의 孤竹國(고죽국)부터 찾아가볼 수밖에 없다. 殷(은)나라 湯王(탕왕)때=紀元前(기원전=B. C.) 1.600年(년)쯤=渤海灣
(발해만) 北岸(북안)에 殷나라 諸侯國(제후국)으로 冊封(책봉)된 나라다.
(諸侯國=現代(현대)의 衛星國(위성국)에 該當(해당)
(孤竹國이 檀君朝鮮(단군조선)의 諸侯國이라는 說(설)도 있는 모양)
孤竹國 第10代? 諸侯(=王)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父王(부왕)이 셋째 叔齊(숙제)를 後繼者(후계자)로 定(정)하고 死亡(사망). 叔齊는 맏형이 맡아야 된다며 辭讓(사양)하고 자리를 피한다. 맏형 伯夷는 先親(선친)의 命令(명령)을 拒逆(거역)할 수 없다며 역시 辭讓한다. 할 수없이 둘째 亞獻(아헌)이 推戴(추대)되어 代(대)를 잇는다.
(우리나라 祭禮(제례)때 두 번째의 祭主(제주)가 獻爵(헌작)하는 것을 亞獻이라 하는 것과 一脈相通(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里程標. 伯夷山=0.6Km.(9/30分) 5956
***伯夷와 叔齊는, 孤竹國을 떠나 떠돌이로 살다 늘그막에 같은 殷(은)나라 諸侯國인 周(주)나라 文王(문왕)이 善政(선정)을 베푼다는 所聞(소문) 듣고 그 臣下(신하)가 되겠다고 周나라를 찾아간다.
(諸侯자리에 오른 둘째를 도와 自己(자기)나라 百姓(백성)이 잘 살도록 해야지 왜 먼 나라까지---. 좀 飛躍(비약)된 構想(구상)같기도---.)
*오름길은 가팔랐다. 지그재그(Zigzag)로 난길, 10m도 못가서 쉬어야 되는 體力(체력), 虛弱(허약)해진 허리에다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다가 오랜만에 걸으니 온 몸이 견딜 수 없이 아프다. 그 기다 지고 온 짐이 너무 무겁다. 좀 팔고 가야겠다. 5957
***釜山(부산)에서 서울까지 千里(천리)라고 한다. 孤竹國에서 周나라까지는 萬里(만리)가 더 될 상 싶다. 몇 달을 걸어야 할 그 먼 길, 지금의 山꾼이면 몰라도 고이 자란 샌님들이 어떻게 갔을까? 茶馬高道(차마고도)나 실크로드(Silk Road) 같은 길이 있을 리 萬無(만무)하니, 高山峻嶺(고산준령)을 넘고 깎아지른 峽谷(협곡)을 건너 햇빛 쏟아지는 曠野(광야)를 지나 怒濤(노도)치는 黃河(황하)에 닿으면 激浪(격랑)을 헤집고. 추이가 살을 에는 荒凉(황량)한 凍土(동토)를 지나야 할, 그런 險峻(험준)한 곳이 사람 다닌 痕迹(흔적) 있는 길 보다 훨씬 많았을 텐데---.먹을 飮食(음식) 마실 물, 덥고 잘 이부자리 갈아입을 여벌 옷, 途中(도중)에서 調達(조달)하지 못 했다면----.차라리 ‘타임머신’(Time Machine)타고 刹那(찰나)에 到着(도착)하는 時間旅行(시간여행)으로 未來(미래)의 21世紀(세기)로 들어가 飛行機(비행기)나 汽車(기차)나 自動車(자동차)나 입맛대로 탔으면 됐을 거고, 아니면 西遊記(서유기)의 著者(저자) 吳承恩(오승은)을 찾아가 孫悟空(손오공)의 如意棒(여의봉)에 매달려 하늘로 날아가게 했으면 됐을 터.
(아마 많은 隨行員(수행원) 다리고 가마나 말 타고 갔을 터. 떠돌이에 무슨 隨行員?
(伯夷 叔齊) (고죽국 지도)
***周나라에 當到(당도)하니 文王(문왕)은 죽고 아들 武王(무왕)이 代(대)를 이었다. 武王은 卽位(즉위)하자말자 宗主國(종주국)인 殷(은)나라의 紂王(주왕) 討伐(토벌)에 나선다. 伯夷와 叔齊가 ‘父王(부왕)의 葬禮(장례)도 치르지 않고 出征(출정)하는 것은 孝(효)라 할 수 없고 臣下(신하)가 임금을 무찌르는 것은 仁(인)이라 할 수 없다’며 挽留(만류)해 보지만 武王은 馬耳東風(마이동풍)에 搖之不動(요지부동).
*伯夷山 고스락이 보인다. 5958
***여러 諸侯國(제후국)을 거느리고 있던 殷나라의 紂王은, 絶世佳人(절세가인) 妲己(달기)에 빠져 政事(정사)는 뒷전이고 酒池肉林(주지육림)으로 나날을 지새우며 妲己가 創案(창안)한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발라 불꽃 위에 걸어 놓고, 罪人(죄인)들을 맨발로 걷게 하여 미끄러져 불속으로 떨어져서 絶叫(절규)하는 斷末魔(단말마)의 悲鳴(비명)을 들으며 즐기는 炮烙之刑(포락지형)을 恣行(자행)고 있었다.
(妲己) (달기 正)
(술은 못을 이루고 按酒(안주)는 숲을 이룬다) 酒池肉林(주왕과 달기) (포락지형)
***妲己는 絶世佳人인데도 中國의 四大美人(사대미인) 班列(반열)에 들지 못하고 四大惡女(악녀) 班列에 든 것은, 그 美貌(미모)로 因(인)해 나라를 망치게 한 傾國之色(경국지색)의 主人公(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中國의 四大惡女=妲己. 呂太后(여태후). 則天武后(측천무후). 西太后(서태후)
呂太后: 漢(한)나라 高祖(고조)의 皇后(황후) (惡女) 한나라 여태후)
則天武后: 唐(당)나라 太宗(태종)의 後宮(후궁) (惡女) 당나라 측천무후 正)
西太后: 淸(청)나라 咸豊帝(함풍제)의 妃(비) (惡女) 淸나라 西太后)
***이 참에 美人 이야기도 한번 해보자.
아름다운 女人(여인)을 말할 때 沈魚落雁(침어낙안) 閉月羞花(폐월수화)라는 말이 있다. 그 아름다움에 놀란 물고가가 헤엄치는 걸 잊어 물밑으로 가라앉고(沈魚), 날아가는 기러기가 날갯짓을 잊어 땅으로 떨어지고(落雁), 十五夜(십오야) 보름달이 제 모습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고(閉月), 활짝 핀 꽃송이가 못 난 것이 부끄러워 꽃잎을 움츠린다(羞花). 즉 中國(중국)의 四大美人(사대미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中國의 四大美人
沈魚: 春秋戰國時代(춘추전국시대)=越(월)나라의 西施(서시). 越나라의 敵對國(적대 국)인 吳(오)나라에 間諜(간첩=스파이)으로 들어 가 吳王(오왕)을 사로잡아 國政(국정)을 소홀히 하게 하여 結局(결국) 越나라의 侵攻(침공)으로 滅亡(멸망)하게 만든다. (美人 침어 서시)
落雁: 前漢時代(전한시대)=漢나라의 王昭君(왕소군). 王(왕)의 後宮(후궁). 당시 漢나 라는 北方(북방)의 遊牧民(유목민)인 匈奴族(흉노족)과 싸 움이 잦았는데 公主(공주)를 族長(족장)에게 시집보내기로 하고 和親(화친)을 맺는다. 後宮중에서 公主로 둔갑시키기 로한다. 많은 後宮을 王이 다 알지 못하니 매일 밤잠자리 할 몇 사람씩 그림을 그려내라고 畵家(화가)에게 命令(명 령), 모두 王의 恩寵(은총)을 받겠다고 예쁘게 그려달라며 畵家에게 賂物(뇌물)을 주지만 돈이 없는 王昭君 얼굴은 아무렇게나 그려진데다 點(점)까지 꾹. 그러니 항상 王의 눈 밖. 公主로 둔갑, 出嫁(출가)하는 그녀를 본 王은 그 아름다움에 까무러질 듯 놀란다. 畵家의 背信(배신)에 怒 發大發(노발대발)한 王은 畵家를 死刑(사형). 그 녀를 잡 기에는 이미 끝난 아그레망(Agrement)을 어쩌랴!------
(美人 낙안 왕소군)
閉月=三國時代(삼국시대)=實存人物(실존인물)이 아닌 ‘三國志’(삼국지)안에서만 縱橫 無盡(종횡무진)으로 活躍(활약)한 貂嬋(초선). 貂嬋은 ‘三 國志’ 著者(저자)의 意中(의중)대로 움직인 로봇(Robot). (美人 폐월 초선)
羞花=三國時代(삼국시대)=唐(당)나라의 楊貴妃(양귀비). 孤兒(고아)로 자라다 楊(양) 씨 家門(가문)에 入養(입양)하여 成長(성장). 唐나라 玄宗 (현종)의 며느리가 되었으나 玄宗이 王妃(왕비)가 죽자 며느리를 빼앗아와 王妃와 다름없는 待遇(대우)를 했다. (美人 수화 양귀비)
飛燕=前漢時代(전한시대)=漢나라 12代(대) 成帝(성제) 때의 趙 宜主(조 의주). 가난 한 平民(평민)으로 태어났지만 ‘제비가 날 듯 손바닥 안에 서도 춤을 춘다=飛燕作掌中舞(비연작장중무)로 比喩(비유) 될 만큼 歌舞(가무)와 容貌(용모)가 뛰어나 成帝의 마음을 사로잡아 宮(궁)으로 들어가 皇后(황후)의 地位(지위)까지 올랐지만 오만 惡行(악행)을 敢行(감행)했다한다. 容貌가 出衆(출중)했는데도 四大美人에 들지 못하고 架空人物(가 공인물)인 貂嬋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도 人品(인품)이 팔 랑개비처럼 너무 가벼워서였다. (美人 趙飛燕 作---)
***紂王의 無道(무도)한 짓거리에 다른 諸侯國(제후국)들도 진저리를 치고 있었으니 武王(무왕)이 쳐들어가도 宗主國(종주국)을 도울 意向(의향)이 있을 리 萬無(만무). 紂王의 軍士(군사)들은 쉽게 무너지고 殷나라는 終局(종국)을 告(고)한다. 그리고 모든 諸侯國이 周나라를 宗主國으로 섬기게 된다.
(美人이 나라를 망치게 한다는 ‘傾國之色’을 證明(증명)한 事例(사례)라 하겠다.)
***伯夷와 叔齊는 武王의 行爲(행위)가 仁義(인의)를 저버린 것이라며 周나라에서는 어떤 禮遇(예우)도 받지 않겠다며 首陽山(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따먹다 굶어 죽었다한다. 後世(후세) 사람들은 이 두 분을 忠節之士(충절지사)로 떠받들며 忠節의 指標(지표)로 삼는다.
?疑問(의문) 1. 伯夷 叔齊의 어느 것이 忠節의 指標가 됐는지? 굶어죽은 거?
?疑問(의문) 2. 왜 故鄕(고향)으로 안 갔을까? 故鄕도 周나라 諸侯國이기 때문에?
?疑問(의문) 3. 首陽山은 周나라 領域(영역)이 아닌 줄 알았나? 首陽山이 주나라 領域이라도 고사리 所有權(소유권)은 없다고 봤나?
(首陽山도 周나라땅인 줄 알고 나서 굶어 죽었다는 說(설)도 있다)
?疑問(의문) 4. 首陽山에서의 잠자리는 어떻게 했으며 季節(계절)과 日氣(일기) 變 化(변화)에는 어떻게 對處(대처)했을까?
*伯夷山 頂上(정상)에 왔다.(10/13分) 0.6Km에 43分이나 걸렸다.
돌탑과 展望臺(전망대)위에 터 잡은 산불 監視哨所(감시초소).
빨간 모자창의 산불감시원 옆에 쓰려질 듯 주저앉으며 긴 숨을 몰아쉰다.
산불감시원이 나이 많이 들어 보인다며 말을 걸어온다. 짐이 무거워 그렇다며 싸게 팔고 싶은데 좀 사라고 부탁. 뭔데요? 나이를 너무 많이 가져와 이 苦生(고생)입니다. 30 정도만 팔아도 될 것 같다하니 그걸 사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요? 다. 5959
옛이름은 雙堓山(쌍안산), 叔齊峰은 雙峰山(쌍봉산)이다.
山이름이 바뀐 事緣(사연)은 무얼까?
***朝鮮王朝(조선왕조)때 忠節志士들을 追慕(추모)하기 위해 亭子(정자)를 짓고 伯夷 叔齊에 比肩(비견)하며 ‘채미정’(採薇亭 또는 采薇亭)이라는 懸板(현판)를 달았다.
*眺望(조망)
저 멀리 가운데 봉우리가 宜寧 自堀山(의령 자굴산). 그 左側(좌측) 山淸(산청)의 黃梅山도 그 左側의 智異山(지리산)도 가늠이 안 되고-- 5962
*伯夷山에서 자취 남기고---.
自堀山=2005.1. 12. 山行(산행). 2020. 4. 5. 再生(재생) (5924)
*眺望(조망) 艅航山과 匡慮山(馬山) 투구봉. 5972
*돌탑의 主人公(주인공). 5976
✦龜尾(구미) 採薇亭
高麗(고려) 邊方(변방)을 지키던 李成桂 將軍(이성계 장군)이 變心(변심)을 품고 鴨綠江(압록강)을 건너가다 回軍(회군), 開京(개경)에 들어와 權力(권력) 掌握(장악). 끝내는 恭愍王(공민왕)으로부터 王權(왕권)을 禪讓(선양=實體(실체)는 簒奪(찬탈)이었다)받고 王位(왕위)에 올라 國號(국호)를 朝鮮(조선)이라 定(정)하고 漢陽(한양)을 都邑地(도읍지)로 정한다. 그러자 두 나라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故鄕(고향) 善山(선산)으로 落鄕(낙향)한 高麗 忠臣(충신) 冶隱 吉再(야은 길재)를 追慕.
2003. 12. 12日과 2009. 8. 1日, 그리고 2013. 2. 2日. 龜尾 金烏山(금오산=懸月峰(현월봉)을 찾았을 때 그 들머리 날머리는 恒常(항상) 採薇亭이었다. (金烏山=懸月峰 8147)
(懸月峰 밑의 ‘東國第一門’(동국제일문) 안. 깊은 溪谷(계곡) 넘어 도토리 같은 독메 위의 亭子(정자)로 가는 다리. (8157) (烏亨石塔(오형석탑) (8167)
(冶隱 吉再 懷古歌4357)
(採微亭入口)=앞의 興起門(흥기문)=出入門(출입문)을 들어가면 우측 採薇亭(채미정) 좌측 救仁齋(구인재), 그 안쪽에 敬慕閣(경모각)이 있다. (4360)
(빌려온 龜尾 採微亭)
(故 朴正熙大統領 內外分) (4384)
✦咸安(함안) 采薇亭
朝鮮王朝(왕조)의 聖君(성군) 世宗大王(세종대왕)의 代(대)를 이은 軟弱(연약)한 文宗(문종)이 卽位(즉위) 2年만에 逝去(서거)하니, 열 세 살의 어린 나이에 垂簾聽政(수렴청정)할 사람 없이 端宗(단종)이 代를 잇는다. 叔父(숙부)인 首陽大君(수양대군)은 奸臣(간신)이자 謀事(모사)꾼인 韓明澮(한명회)가 設計(설계)한 癸酉靖難(계유정난)을 일으켜, 宮中(궁중)의 元老大臣(원오대신)들을 肅淸(숙청)하고 權力(권력)을 掌握(장악). 끝내는 端宗을 廢位(폐위)하고 朝鮮王朝 7代 世祖(세조)로 登極(등극)한다. 端宗 復位(복위)를 꾀한 集賢殿(집현전) 學士(학사)들, 死六臣(사육신)과 生六臣(생육신)이다. 江原道(강원도) 寧越(영월)로 流配(유배) 당한 端宗은 世祖가 내린 賜藥(사약)받고 짧은 한 世上(세상)을 마감. (李成桂에 이은 簒奪(찬탈)의 名門家(명문가)다.)
死六臣=成三問(성삼문). 朴彭年(박팽년). 河緯池(하위지). 李塏(이개). 兪應孚(유응부). 柳誠源(유성원).
生六臣=金時習(김시습). 南孝溫(남효온). 李孟專(이맹전). 趙 旅(조 려). 成聃壽(성담수). 元昊(원호).
살아야만 端宗을 지킬 수 있다는 信念(신념)으로 벼슬을 버리고 草野(초야)에 파묻힌 生六臣, 故鄕(고향)으로 돌아와 隱居(은거)한 漁溪 趙 旅(어계 조 려). 後日(후일)嶺南(영남) 儒林(유림)들이 그가 餘生(여생)을 보낸 이곳에 西山書院(서산서원)을 지어 生六臣을 기리고, 그 옆에 亭子(정자)를 지어 采薇亭이라 부르며 그 節槪(절개)을 追慕. 朝鮮王朝 19代 肅宗(숙종)이 漁溪 趙 旅의 忠節(충절)이 伯夷 叔齊와 버금간다며 山 서쪽에 있는 書院임을 뜻하는 “西山書院”읗 賜額(사액)하니 書院에서 바라보이는 두 봉우리를 伯夷山 叔齊峰이라 부르게 된다.
오늘 西山書院과 采薇亭 그리고 ‘百世淸風’(청풍청풍)이 陰刻(음각)된 내 친구 叩馬巖(고마암)등을 둘러볼 좋은 機會(기회)이나, 내 體力(체력)과 汽車時間(2/11分)등을 考慮(고려)해보니 좀 어려울 것 같다.
(빌려온 西山書院) (함안 서산서원)
(빌려온 百世淸風(백세청풍) 采薇亭) (채미정(함안) 正)
(발려온 百世淸風이 陰刻된 叩馬巖)
***百世淸風=‘100世代(세대)에 걸친 맑은 바람’=‘永遠(영원)토록 變(변)치 않은 맑 고 높은 선비의 節槪(절개)’를 말함. (채미정(함안=고마암)
✦機張(기장) 採薇亭
伯夷와 叔齊, 그리고 고사리만 먹다 죽었다는 그 節義(절의)와 아무 關聯(관련)이 없는 採薇亭이 여기에 있다. ‘薇’자가 붙은 마을(薇田마을)의 入口(입구)를 象徵(상징)한다며 亭子(정자)를 짓고 ‘採薇亭’을 붙였다는데 좀 어리둥절해진다.
2018. 6. 03. 機張 ‘아홉산’을 갔을 때, 採薇亭을 둘러보는 코스를 잡았다. ‘아홉산’ 頂上(정상)에서 나아갈 길을 살펴보니 道路(도로)따라 걷는 길이 제법 길었다. 登山(등산)할 때 可能(가능)하면 道路 걷는 걸 피하는 習性(습성)이니 이날도 山을 타고 내리서자며 조금 빽(Back)하여 354봉에 올랐다. 6時 方向(방향)으로 내려왔으면 될 걸 희미한 발자국 따라 險(험)하고 가파른 8時 方向, 溪谷(계곡)의 發源地(발원지)인 깊은 奧地(오지)로 떨어지는 바람에 採薇亭을 놓쳤다.
(아홉산 4415) (빌려온 機張 採微亭) (採微亭 由來)
?疑問(의문) 1. 伯夷 叔齊는 고사리를 먹었다는데 왜 ‘고사리 궐’(蕨)자를 안 쓰고 ‘고비 미’(微)자를 썼을까? 고사리目(목)은 둘 다 같지만 고비科(과) 와 고사리科는 分明(분명) 다른 것인데---. 옛날에는 둘 다 고사리 種類(종류)라고 치더라도 山에서 살려면 다른 草根木皮(초근목피)도 피할 수 없었을 텐데 굳이 (微)자만 붙인 理由(이유)는 뭘까?-----
?疑問(의문) 2. 고사리의 軟(연)한 새 순을 딴다고 해서 ‘딸 채’(採)자를 쓰는데 咸 安 采薇亭은 왜 ‘캘 채’(采)자를 썼을까?? 藥用(약용)으로 쓰는 뿌리는 따거나 꺾는 것이 안 되니까 캐야만 되지만-----.
?疑問(의문) 3. 機張 採薇亭은 고사리를 딴 것이 아니라 ‘薇’자 붙은 마을이름 따 왔다고 ‘딸 채’(採)자를 썼을까? 마을이름 따는 것은 採取(채취)가 아니고 ‘引用(인용)한다’라고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