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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화 향기 그윽한 섬진강 끝자락의 산"
1. 대 상 산 : 쫓비산(536.5m) , 갈미봉(519.8m) - 전남 광양시
2. 산행시간 : 4시간 30분(우천시에도 산행 합니다)
3. 출발시간 : 2008년 3월 16일 일요일 08시(07시 50분 집결)
4. 출발장소 : 순천 기적의도서관앞(금당 동명초등학교정문)
광양읍 승차 08시 20분(광양로타리 육교아래)
5. 산행코스 : 관동마을 - 밤나무단지 - 헬기장 - 배딩이재 - 갈미봉 - 바람재 -
전망바위 - 쫓비산 - 삼거리능선 - 청매실농장 - 사동주차장
6. 준비물 : 회비 20,000원
중식,간식,식수, 등
7. 개념도
쫓비산과 갈미봉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과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는 백운산에서 뻗어 나온 지릉으로 광양 다압면 매화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다.
백두대간의 함양 영취산 분기점에서 시작한 호남정맥이 금남정맥의 분기점인 주화산을 지나 내장산, 추월산, 강천산, 무등산, 안양산, 천운산, 제암산, 일림산, 봉화산, 조계산, 백운산(1,218m)을 거쳐 매봉(865.3m)을 지나 갈미봉, 쫓비산, 토끼재, 불암산, 탄치재, 국사봉(446.2m), 천왕산(225.8m), 망덕산(197.2m)을 거쳐 망덕포구에서 그 맥이 다하여 배알도 앞 섬진강으로 사라진다.
흐드러지게 핀 매화와 그 향기에 파묻혀 세상 시름을 잊을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이 아닐까? 섬진강 560리 물길이 광양만으로 치닫는 끝자락에 위치한 광양 섬진마을은 봄이면 연분홍빛 매화꽃향기로 넘쳐난다. 구릉을 따라 지천으로 널려져 있는 연분홍빛 매화와 그 향기속을 걷노라면 이곳이 바로 신선이 노닌다는 선경이 아닌가 싶다. 산중턱에 서면 발아래로 매화와 섬진강의 푸른물결, 그리고 지리산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이곳은 매화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강과 산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풍경이기에 더욱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곳이다.
쫓비산은 그 이름이 특이하다. 형태가 뾰족해서 쫓비산이라 불린다는 설이 있기도 하고, 섬진강 푸른 물줄기에 빗대어 맑은 하늘이란 뜻으로 ‘쪽빛’에서 유래한 것이 라는 해석도 있다.
8. 코스가이드
갈미봉~쫓비산 능선 산행의 또 하나 매력은 10여개의 작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는 재미다. 아직은 때묻지 않은 곳이어서 한적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산행은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관동마을의 다압주유소 옆 마을입구에서 시작한다. 관동마을~밤나무단지~헬기장~안부능선~갈미봉~누에바위~바위전망대~쫓비산~ 갈림길~다사마을로 이어지는 코스로 5시간 거리다.
관동마을에서 시멘트 포장 농로를 20분쯤 오르는데 좌.우로 밤나무 단지와 녹차밭, 감나무, 배나무, 매화밭이다. 시멘트 포장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북쪽 능선에 올라 서쪽으로 진행하면 헬기장이 나온다. 헬기장에서 동남쪽 능선으로 진행하면 배딩이재에 닿는다. 관동마을에서 바로 올라오는 코스와 만나는 지점이다. 배딩이재에서 나지막한 봉우리 하나를 넘어 급경사를 오르면 바로 갈미봉 정상이다. 50여평 되는 평탄한 공간에 방공호가 포진하고 있다. 중심에는 국립건설연구소가 세워놓은 소감각점이 있다.
갈미봉에서 내려서면 묘 이장터인지 중심부가 움푹 패인 원형의 터를 지나면 바람재다. 다압중교가 있는 큰땀으로 내려서는 길목이다. 바람재에서 1시간쯤이면 쫓비봉에 닿는다. 갈미봉에서 쫓비산까지는 동남쪽으로 지렁이가 가지런하게 기어가듯 연결돼있다. 2평 남짓한 쫓비산에 올라선다. 표지석이 있는 정상 둘레는 진달래와 참나무가 둘러싸고 있다. 그 틈 사이로 섬진강, 천왕봉, 백운산이 내 비친다.
쫓비산에서 약 20분이면 청매실농장으로 내려서는 삼거리능선에 닿는다. 삼거리능선에서 221봉까지는 진달래 군락지다. 221봉에서 청매실농장을 거쳐 사동마을 주차장으로 하산한다.
9. 주변의 명소
(1) 섬진강의 유래와 역사
섬진강(蟾津江)은 길이 225㎞, 유역면적 4,896㎢.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원신암 마을 팔공산(1,151m)의 북쪽 1,080m 지점 서쪽 계곡 상추막이골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광양만에 이르기까지 3개도 10개 시군에 걸쳐 흐르는 우리나라 4번째 긴강이다. 섬진강의 발원지는 금강의 발원지와 이웃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역태극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섬진강의 이름은 단군시대에는 모래가 고와 모래가람, 모래내, 백제시대에는 다사강(多沙江), 대사강(帶沙江), 사천(沙川), 기문하 등으로 불렸으며, 고려초에는 두치강(豆恥江:또는 豆直江)으로 불리우다가 고려말 1385년(우왕 11)경 섬진강 하구에 왜구가 침입하자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떼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 쪽으로 피해갔다고 하는 전설이 있어 이때부터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이라 했다고 한다.
구례현 남쪽과 순천 북쪽 경계에 이르는 곳이 잔수진(潺水津)이며 이 잔수진(潺水津)은 지리산 남쪽 기슭을 지나서 경상도 진주의 옛 지역인 화개현 서쪽에 이르러 용왕연이 되는데 동남쪽으로 흘러 광양현의 남쪽을 지나 섬진(蟾津)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라는 문헌으로 보아 최초 섬진강 권역은 구례현 잔수진(潺水津)으로부터 광양현 섬진(蟾津)에 이르는 구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현재의 섬진강을 섬강(蟾江)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 조에 나온 기록에는 섬진강이란 표현은 나오지 않고 나루 이름인 섬진이란 명칭만 보인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편찬한 “동국여지지”에서 처음으로 섬강(蟾江)이란 명칭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부터는 섬강으로 부른 듯 하다.
또한 섬강을 구례 남쪽에 위치한 잔수진으로부터 광양의 섬진나루(蟾津渡)를 거쳐 바다로 유입되는 강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 때 섬강은 잔수진으로부터 섬진나루를 지나 지금의 광양만에 이르는 물줄기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지금 섬진강 본류의 전 유역이 거의 섬강으로 불렸다. 전북 남원, 임실, 순창, 전남 곡성 등지의 산수명(山水名)에 모두 섬강이란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섬진강의 명칭이 확실하게 정착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섬진강이란 명칭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쓰기 시작했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한국산수지』에 처음으로 섬진강이란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섬강이라 부르다가 일제시기에 섬진강이라 부르게 되었다.
섬진강은 정읍시와 임실군의 경계에 이르러 갈담저수지(일명 옥정호)를 이룬다. 순창군·곡성군·구례군을 남동쪽으로 흐르며 하동군 금성면과 광양시 진월면 경계에서 광양만으로 흘러든다. 이 강의 상류에서 갈담저수지까지를 오원천(烏院川), 곡성군 고달면과 오곡면 부근을 순자강(子江)이라 부른다.
주요 지류로는 정읍시 산내면에서 합류되는 추령천을 비롯해 일중천(임실군 덕치면), 오수천(순창군 적성면), 심초천(순창군 적성면), 경천(순창군 유등면과 풍산면 경계), 옥과천(곡성군 옥과면), 요천(남원시 송동면), 수지천(남원시 송동면), 보성강(곡성군 죽곡면과 구례군 구례읍 경계), 황전천(구례군 문척면), 서시천(구례군 구례읍과 마산면 경계), 가리내(구례군 간전면), 화개천(하동군 화개면), 횡천강(하동군 하동읍) 등이 있다.
1918년에 발간된 〈조선지지〉 자료에 의하면 하구에서 약 38.7㎞에 이르는 구례군 토지면까지 주운이 가능했으나 지금은 이용되지 않고 있다. 이 강의 상류인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와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사이에 한국 최초의 다목적댐인 섬진강댐이 1965년 12월에 완공되어 섬진강 중류·하류의 홍수피해를 방지하게 되었다. 1945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에 섬진강수력발전소 제1호기를 준공, 갈담저수지의 물을 6㎞의 수로를 통해 유역변경하여 낙차를 이용해 발전을 한 다음 동진강에 방류함으로써 동진강 하류지역과 계화도 간척지역의 농업용수로 이용하고 있다.
섬진강댐의 건설로 정읍시·임실군의 5개면 28개리가 수몰되었으며, 주민의 대부분은 계화도간척지로 이주했다. 이 강의 유역 내에는 840년에 창건된 신라의 고찰 쌍계사를 비롯해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칠불암, 불일암, 태안사, 도림사, 만복사 등의 사찰과, 남원 광한루와 양진정, 하동 악양정, 구례 7의사묘, 남원 풍계서원 및 고소성·주성성터, 교룡산성 등의 유적이 남아 있으며, 지리산국립공원, 마이산도립공원이 위치한다.
특히 수월정이 자리한 섬진나루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매복작전을 수행한 적이 있는 군사적 요충지다. 1705년에는 정식 수군진이 설치되어 수군 장교인 별장이 1개 중대 병력을 거느리고 주둔하기도 했다. 섬진진에는 1895년 진이 폐쇄 되기까지 4척의 병선과 200~300명의 군사가 주둔하여 섬진나루를 경비하였고, 선박세와 통행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을 인근 고을로부터 거두어들이는 경제활동도 병행하였다. 현재 수월정 주변에는 수군 별장의 공적비 좌대로 쓰인 두꺼비석상 4기와 1999년에 세운 섬진강유래비, 수월정 유허비, 그리고 선박을 묶었던 선돌바위가 보존되어 옛 정취를 그대로 느끼게 하고 있다.
(2) 수월정(水月亭)
이 정자는 광양 출신으로 조선 선조때 나주목사를 지냈던 정 설(鄭渫)이 나주목사에서 물러나 1573년에 건립됐다. 그는 평생을 청렴결백한 공직생활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던 인물로, 말년에는 모든 욕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정자를 짓고 지역의 선비들과 어울려 여생을 보냈다.
당시 당파싸움으로 호남지역으로 유배왔던 송강 정 철(1536~1593)이 이곳의 풍광과 정자의 아름다움에 반해 즉석에서 수월정기(水月亭記)란 가사를 지어 노래했다. 뿐만아니다. 선조때 형조좌랑을 지낸 수은 강항 또한 수월정 30영이란 시조 30수를 지어 이 정자를 노래 했다하니, 이곳의 풍광이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이 가리라.
송강이 정자 마루에 걸터앉아 노래했을 수월정기(水月亭記)를 음미해 본다.
백운산 동쪽 능선을 옥상으로 삼고 섬진강의 상류를 옥하로 삼은즉 경치에 대하여는 말할 나위 없다. 하물며 천하의 삼신산에 방장이 그 하나이니 불을 때서 밥을 지어 먹는 사람으로써 이 세상에 살아 이 산의 이름을 들은 자가 또한 드믄데, 거기서 기거하고 마시고 먹으며 아침 저녁으로 상대하니 그 즐거움이 어떠 하겠는가? 왼쪽은 영(嶺)이며 오른쪽은 호수라, 섬과 산봉우리를 껴 안은 듯 하며 배는 왔다갔다 하고 구름은 높이 떴다. 호수는 나룻터와 빈들과 고기떼들이 모여 위천(渭川)은 넓고 물은 붉고 빛나서 학동(鶴同)의 아지랭이와 악양(岳陽)의 저녁 연기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특히 붉은 구름이 봉우리를 이루어 서리가 내리면 천림(天林)이 붉게 물들고 얼음이 얼면 장천(長川)이 희어 천태만상이 모두 방(房)아래서 보게 되니 수월의 터는 이러한 경치를 선택하여 지은 것이리라.-
(3) 광양불암산성 - 도기념물 제177호(1999.12.30.지정)
진상면 비평리 불암산성은 불암산(431.3m) 남서쪽 줄기 해발 231m의 봉우리에 쌓은 산성으로 백제시대인 600년경에 돌을 쌓아 만들어진 둘레 500미터의 석성이다. 수어댐 바로 옆, 어치계곡 입구에 위치하여 산성에 올라서면 백운산 능선과 억불봉, 수어댐 물빛이 한데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
전체적인 성의 형태는 동-서축이 긴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의 ‘테뫼식’, ‘내외협축식’석성이다. 산성은 산정상부를 중심으로 8부 능선을 에워싸면서 축성하였는데 동쪽이 높고 서쪽으로 내려올수록 낮아진다. 산성이 축조되어 있는 산 자체는 그다지 높은산이 아니지만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성의 북서쪽으로 약20m정도 떨어진 곳에서 일정량의 물이 저수(貯水)되어 있는 웅덩이가 있는데 당시에 성의 취수용으로 여겨진다. 성벽은 내외협축(內外夾築)으로 축성하였으며 외벽과 내벽 모두를 자연석으로 쌓아 올렸으며 거의 수직을 이루고 있다. 성내에서는 서북쪽과 서남쪽 등의 평탄지역에서 특히 많은 양의 유물이 수습되었는데, 유물은 토기편과 와편, 석환, 어망추 등이 있다.
수어댐 좌측 각산봉에는 둘레 80m에 이르는 아담한 산성이 있는데 불암산성과 함께 어치계곡으로 쳐들어오는 외적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였다. 북으로 지리산 주능선, 남으로 수어천을 따라 광양만, 동으로는 섬진강변의 봉암산성이 들어온다.
(4) 광양 매실의 역사와 볼거리
밤나무골 김영감님과 광양매실
오늘날 광양매실을 이야기 하려면 광양뿐만아니라 전국적으로 통했던 밤나무골 김영감님인 김오천 선생 이야기로부터 시작할 수 밖에없다. 김영감님이 1931년 일본에서 밤나무 묘목과 함께 들여온 5,000주의 매화나무 묘목으로부터 광양매실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김오천선생은 1902년 11월 21일(음력)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일곱살 나던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13년간의 광부생활로 돈을 모았고 1931년(30세때)에 귀국하면서 밤나무 1만주, 매실나무 5천주를 비롯하여 감나무, 배나무 등 양질의 신품종 묘목을 가지고 들어왔다. 3년동안에 가지고온 묘목을 심고 관리하던 김영감님은 나무 키우는데 필요한 기술과 돈을 구하기 위해 1934년 다시 일본에 들어가서 10년동안 일본과 광양의 고향집을 수없이 오고가면서 돈을 벌고 나무 키우는 기술을 익혔다.
김영감님은 두 번째로 일본에 들어가서는 당신이 광부생활을 했던 구천에서 광산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인부를 수 십명이상 많을때는 1백여명까지 썼고 고향마을 사람들도 10여명에 달했다. 1944년에는 완전 귀국하여 다시 밤나무, 매실나무 키우는 일에 매달려 45만평의 임야를 밤산으로 만들었고 집주변 언덕배기에는 매화나무를 집중해서 키웠다.
이후 1960년대에 밤나무 혹벌레 피해로 전국적으로 밤산이 황폐화되었을 때 김영감님이 재배한 밤산은 끄떡없이 이곳에서 1년이면 8톤트럭 십여대분의 묘목이 접수용으로 나간 일, 1965년 산업훈장 받은 일등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밤나무골 김영감님에 대한 기록이다.
광양매실의 자존심 홍쌍리 역사
밀양태생인 홍쌍리 여사는 1965년 광양시 다압면 섬진마을 ″밤나무골 김영감님″의 아들인 김달웅씨에게로 시집와서 밤나무 1만주, 매실나무 5천주가 심워진 7㏊의 산비탈 농장 청매실농원을 가꾸고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다.
하지만 홍여사는 몇 년 전부터 ″매실박사 홍쌍리″로 통하는 전국적인 유명인사이다. 최근에는 그녀의 명성이 동남아 식품박람회를 통해 홍콩, 싱가폴에도 알려졌으니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된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홍쌍리 여사가 매실의 본고장인 광양매실의 자존심이라는 점이다. 광양매실의 자존심 홍쌍리 여사의 유명세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아본다.
홍쌍리 여사의 청매실농원은 매실식품의 맛이 좋고 약효가 좋기로 유명하다. 또 한가지는 종류가 다양하기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매실김치, 매실절임, 매실고추짱아찌, 매실마늘짱아찌 등 매실반찬은 청매실 농원에서만 만들고 있다. 홍쌍리 여사가 정식으로 매실전통식품제조업 허가를 받은 것은 1994년이고 1995년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매실전통식품 지정을 받았다.
지금 만들어내고 있는 종류는 매실농축액, 매실절임, 매실장아찌, 매실음료, 매실식초, 매실쨈 등이 있다. 청매실 농원에서는 한결같이 매실식품을 전통제조법에 따라 만든다는 것이 오늘의 홍쌍리 씨를 있게 한 근본이며, 또 하나는 60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대를 이어오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민하면서 제품을 만들어 상품화하게 되었다는데 남다른 유명세의 원인이 있다. 물론 매실농축액 제조과정에서는 기계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제조공정중에 반드시 사람손을 거치게 되어 있어 매실농축액 제조도 완전 자동이 아닌 반자동으로 하고 있다. 청매실을 숙성·발효시키는 과정도 남다르다.
마당에 즐비하게 늘어선 300여개의 장독들, 숨쉬는 그릇인 전통용기로 구워낸 장독에 매실을 담아 수개월동안 발효하는 전통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또 청매실을 3개월 이상 보관하지 않고 반드시 3개월 이내에 제조작업을 마침으로써 매실식품의 신선도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청매실 농원의 식품이 최고 품질을 갖기까지는 시아버지,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60년 전통에 보다 큰 근본이 있다. 홍쌍리 여사가 시아버지 김오천 선생과 시어머니의 매실식품 제조 활용법을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않고 눈썰미있게 새겨두면서 끊임없이 묻고 연구한 끝에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시아버지 김오천 선생이 밤과 매실을 수확하기 시작한 1935년부터 30년간을, 홍쌍리 여사가 김씨 집안에 시집온 1965년부터 31년간을 매실 식품 제조에 매달려 온 것이다. 이제 홍쌍리 여사는 매실전통식품 제조자로서 유명인사가 되었고, 95년에는 “매실박사 홍쌍리의 매실미용 건강 이야기”라는 책을 써서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홍쌍리 여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보다 더 좋은 식품을 만들기 위해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여 나갈 것이다.
매실은 매화나무 열매
매실은 매화나무의 열매이며, 그 원산지는 중국으로 되어있다. 우리나라에는 약 천 오백년 전에 들어와 우리의 선조들이 수백년 전부터 이 열매를 식용 또는 약용으로 사용하여 왔다. 세계적으로 매실의 산지는 동북아시아 즉 한국, 중국과 일본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남부지방에서만 생산되는, 지리적으로 특수성을 지닌 온대과실로써 중부이북의 매화나무는 꽃은 피지만 열매를 맺지 않는 특성을 보인다.
매실의 식품으로서의 가공법과 약리작용에 관해서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연구 끝에 그 놀랍고 신비스런 약효가 증명되어 전 일본국민의 건강식품으로 애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실주를 수 십년 전부터 상품화 해온 것 이외에는 최근에서야 매실음료가 나오게 되었고, 매실을 이용한 전통매실 반찬은 광양의 청매실 농원에서 94년 처음으로 상품화 하였다.
(5) 하동 송림
하동 광평리의 하동송림은 1만여평의 부지에 방풍, 방사림으로 식재한 수령 3백여 년 된 아름드리 노송들이 빽빽이 들어찬 곳으로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하동 군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옛날, 신라와 백제의 사신들이 모여 앉아 군사동맹을 맺은 곳이다. 하동읍에서 광양과 하동을 잇는 섬진교 삼거리 방향으로 가다보면 섬진강변에 울창하게 조성돼있다. 하얀 백사장과 푸릇한 소나무가 조화롭게 잘 어울린다.
(6) 최참판댁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로 유명한 악양 평사리는 섬진강이 주는 혜택을 한 몸에 받은 땅이다. 지리산 거대한 능선이 남으로 가지를 친 남부능선인 형제봉 아래 펼쳐진 평야지대다. 형제봉 중턱에는 신라시대 축성된 사적 제151호 고소성이 섬진강과 동정호를 발아래 두고 있다. 이곳 하동 최참판댁에 서면 평사리 들녘 너머로 쫓비산과 갈미봉이 올려다 보인다.
참석 하실분은 꼬리말에 메모나 전화예약 바랍니다.
선비산악회 (011-633-8193)
첫댓글 조수연 입니다. 낼 함께 산행 할께요... 그런데 다리가 쬐금 불편해서 산행이 온전히 될지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