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불교와 인간 - (3) 인간의 조건
부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자마자 “하늘의 위에서든 아래에서든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 하고 말했다는 것을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제일이라는 오만함을 드러낸 것처럼 들리기 쉬운 이 말을 교리 해설가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천명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어떻게 이런 설명이 가능한지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이 존엄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갓 태어난 부처님이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부처님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전기 작가가 부처님 탄생의 의의를 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홀로 존귀한 ‘나’란 부처님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 부처님이 태어난 것이므로, 그 분은 홀로 존귀하다. 그런데 그 분은 처음부터 부처님인 상태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평범한 중생으로만 살게 될 것이라면, 그 탄생을 존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부처가 될 것이므로 그 탄생은 존귀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부처가 될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장 존귀하다는 뜻이다.
이 같은 부처님 탄생의 의의를 모든 인간에게 적용한 데서 인간의 존엄성은 성립된다.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갖고 태어난 점에서 존귀하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상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 가능성을 최초로 실현하여 증명하였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그 가능성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여 항상 더 나은 상태로 개선해 나갈 수 있는 능력으로 발휘된다.
불교에서 설정한 여러 가지 윤회의 양태로 보면, 인간이 최고의 위치에 있지는 않다. 6도(道) 또는 6취(趣)로 불리는 윤회의 여섯 가지 양태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天)이라는 중생 세계이다. 처음에는 이 중에서 아수라를 제외하여 5도 또는 5취라고 불렀다.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배열한 이 양태에서 인간은 천보다 낮은 단계에 위치한다. 천이란 천상 세계에 사는 신과 같은 존재이며, 해탈하지 못한 인간, 즉 부처가 되지 못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상태이다. 이러한 윤회의 양태로 보면, 중생은 인간으로 태어나서야 천상 세계로 가거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인간이 존귀하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큰 행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를 중시하는 불교에서는 인간이야말로 최고의 생명체라는 생각을 애써 내세우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몸을 받기는 어렵다.”라고 말하여,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매우 희귀한 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경전에서는 예를 들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우둠바라 꽃, 즉 우담화(優曇華)가 3,000년에 한 번 피어나는 것과 같다고 설한다. 이보다 더 실감 나게 인간으로 태어나는 인연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맹구부목(盲龜浮木)이라는 비유가 있다.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궤짝이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고, 100년이 지나서야 겨우 한 번 수면 위로 떠오르는 눈먼 거북이가 있다. 그런데 그 거북이가 바다 위로 떠오를 때, 마침 거기를 떠다니고 있는 궤짝의 구멍 속으로 올라와 쉴 수 있게 된다면, 이것은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희귀한 우연일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도 눈먼 거북이가 궤짝의 구멍 속으로 떠오르는 것만큼 희귀한 일이라는 것이 맹구부목의 비유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이처럼 희귀한 행운이지만, 이 행운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데에는 인연이 있으며, 이 인연을 조성하는 것은 선한 업이다. 여러 불전들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하는 업을 보통 열 가지로 제시하는데, 이것을 10선업이라고 한다. 10선업은 다음과 같은 열 가지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① 생물을 살상하는 살생(殺生). ② 타인의 소유물을 훔치는 투도(偸盜). ③ 간음으로 남녀의 도덕을 문란하게 하는 사음(邪婬). ④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망어(妄語). ⑤ 실없고 잡된 말을 하는 기어(綺語). ⑥ 말로써 욕하거나 멸시하는 악구(惡口). ⑦ 이간질하는 양설(兩舌). ⑧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탐욕(貪欲). ⑨ 노여움으로 증오나 혐오에 빠지는 진에(瞋恚). ⑩ 그릇된 견해에 빠지는 사견(邪見) 또는 우치(愚癡).
이상의 10악업은 10불선업으로도 불린다. 이것들은 몸과 말과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해치고 인간 사회를 어지럽히는 악행의 근본이다. 앞의 셋(살생, 투도, 사음)은 몸으로 짓는 신업이고, 중간의 넷(망어, 기어, 악구, 양설)은 말로 짓는 구업 또는 어업이며, 뒤의 셋(탐욕, 진에, 사견)은 생각으로 짓는 의업이다. 이 10악업은 인간 세계를 파탄시키는 원인이다. 따라서 10악업을 저지른 중생이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할 것임은 당연할 것이므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조건은 10악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10선업이란 이 10악업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잡아함경 제37에 의하면, 최소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하는 조건이 10선업이다. 여기서는 10불선업을 저지르면 지옥에 태어나고, 설혹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온갖 고난을 받으며, 10선업을 준수하면 천상에 태어나고, 설혹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온갖 고난을 면한다고 설한다. 즉 10선업은 안락한 인간 생활을 보장하는 기본 조건이며, 천상에 태어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다른 경전에도 이 같은 법문이 있다. 부처님이 수가 장자에게 업보를 차별하여 설한 경전, 즉 불위수가장자설업보차별경(佛爲首迦長者說業報差別經)에 의하면, 10선업을 준수하였으나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과보를 얻는다. 즉 10선업을 실천하면, 번뇌가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 이 경전의 취지이다.
생각해 보면, 인간 생활에서 10선업을 고스란히 준수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5계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 점에서 보면 5계는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 될 것이다. 10선업을 지키면 천상에 태어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적어도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설하는 경전의 취지도 5계를 중시하는 데 있다. 후대에 중국의 법림(法琳) 스님은 변정론(辯正論) 제1에서 이 취지를 잘 파악하여, 5계를 지키면 인간의 몸을 받고 10선을 실천하면 천계의 과보를 얻는다고 설명했다.
결국 불교에서 제시하는 인간의 조건은 5계와 10선업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둘을 구분하자면, 5계는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인 데 비해, 10선업은 적어도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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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향기님들! 성불 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