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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에스더 4 : 10 - 17 / 창세기 43:14
제목: 에스더의 결단 죽으면 죽으리이다
일시: 2009. 1. 11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인디언 어느 부족에서는 추장이 자기의 딸을 훈련시킬 때 옥수수밭이랑을 뒤로 걷게 해서 이랑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가장 크고 마음에 드는 옥수수를 골라보게 한다고 한다. 뒤로 걷기에 어떤 옥수수가 크고 좋은지 미리 볼 수 없고 눈앞에는 계속 옥수수가 지나가게 될 것이다. 옥수수 하나를 꺽어 나온다는 그 결정은 쉽지 않다. 조금 더 큰 것을 기대하다가는 마침내 밭이랑을 다 지나게 되어 결국 어쩔 수 없이 형편없는 것을 하나 꺽어 나오거나 혹 하나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선택은 어렵다. 선택은 분명한 구분이 되어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쪽도 일리가 있어서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내려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어려운 선택에는 언제나 마음에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잘 되면 모를까 만일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면 그에 따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고 비난을 들을 수도 있다. 손가락으로 결정짓는 작은 선택일지 모르지만 이후에 벌어질 각은 엄청나게 벌어져 있을 수 있고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예측할 수 없기에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선택하는 사람에 의해 삶은 이루어져 간다.
에스더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유다인이 하만의 흉계에 의해 멸절의 위기를 당하자,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모르드개가 페르시아 왕의 왕후로 있던 에스더에게 이 위기의 순간에 조국을 위해 일하라는 말을 듣는다. 위기에 빠진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설 것인가 아니면 조용히 하고 숨어 지낼 것인가?
II. 선택 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기도이다.
우리가 선택을 할 때는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최고의 선택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택을 할 때는 언제나 갈등이 있다. 일리가 있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배우자를 선택하거나 학업을 선택하거나 직업과 전공을 선택하는 것, 심지어 중국집에 가서 짜장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조차 갈등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원한 갈등은 없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내밀려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우리 앞에 더 이상 한치의 발도 내 디딜 수 없는 거기서 결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에스더도 조국의 위기에 나서라는 종용을 받았을 때, 흔쾌히 그러하겠노라 한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결단하기 어려운 애로 사항이 있었다. 11절에서 에스더는 이렇게 말을 한다. “무론 남녀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 당시에 정권이란 칼과 힘으로 올라서는 것이기에 또 다른 도전자에게서 자리를 지키기 위한 훌륭한 방법이었다. 심지어 자기 부인까지도 허락 맡고 와야 할 정도로 아무도 믿지를 못한 것이다. 그러나 살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계속해서 11절에서 말하고 있다. “...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 밀어야 살 것이라...” 그런데 지금 에스더는 어떠한 상황인가? 비록 페르시아 아하수에로왕이 자신의 왕후 와스디를 폐위하고 전국에서 뽑은 처자 중에서 에스더를 사랑하여 왕후로 세웠지만, 에스더도 왕에게 부름을 받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삼십일이 지났다면 왕은 완전히 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에스더가 생각할 때 승산이 없는 게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무리 그 자리에 있어도 쉬운 것이 아니다. 보통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 같아도 막상 그 자리에 가면 못하는 것이 많다. 에스더도 비록 왕후였지만 생명을 걸어야 하는 기로에 섰다. 결국 에스더는 하기 어렵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이다. 하지만, 모르드개는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왕에게 부름이 없이 나아가면 죽음을 당하게 되지만, 그나마 부름을 받지 않아도 왕에게 나아갈 수 있고 최고의 권력자와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은 에스더뿐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13절에서 이렇게 말을 한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유다민족이 멸절을 당하면 너도 어차피 죽을 것이라는 운명 공동체임을 말하고 있다. 14절에서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더욱 압박하고 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라고 강권한다. 에스더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결정의 순간에 왔다. 그는 버팅길 때까지 버팅겨 보았지만 다른 아눙은 없다. 에스더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자기밖에 적임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목숨을 건 일임을 알았다. 자신의 결단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유다민족의 운명이 달려 있음을 알았다. 부름 없이 왕에게 나아갔을 때 무슨 일이 있을지 수없이 시나리오를 짜보지만 불안만 했을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만이 그에게 있었다. 부딪혀 봐야만 알게 될 일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더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기도이다” 에스더는 기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16절을 보라.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우리의 인생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이다. 무엇이 다음에 벌어질지 모른다. 마음의 결단과 선택이 있어도 기도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선택의 마지막 순간에는 기도만 남는 것이다. 던져 놓고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상황!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처럼...
III. 선택의 순간을 부담스런 짐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로 보아야 한다.
모르드개의 말 가운데 가장 신경 쓰이는 표현은 14절의 말씀이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한 여러 말들이 있지만, 에스더를 가장 불안하게 만들고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표현이 이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조국을 위해 나서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그녀의 필요성과 가치가 극에 달하고 있는 것이다. 주가가 최고로 올라간 것이다. 운동선수로 치면 여러 구단에서 침을 흘리고 오라고 하며 몸값을 최고로 쳐 주는 때이다. 이렇게 인정해 주고 할 수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다. 당신밖에 없다고 당신을 바라볼 때 실망시키지 말고 소망에 부응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에스더가 잠잠하고 말이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을 취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에스더의 가치는 종이조각처럼 될 것이고 모든 유다백성들은 에스더에게서 등을 돌리고 냉정하게 대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주목받던 사람이 주목받지 못하고 인기인이 열광하던 팬들을 잃어버린 허전함에 사로잡힐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있을 때 잘하라. 요구될 때 사용이 되어져라. 힘 있을 때 일하라.
어쩌면 모르드개가 고도의 심리전을 써서 에스더를 설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14절의 말씀은 에스더에게 큰 위협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기회를 살리라는 소리로 들려지기 때문이다. 너에게 주어진 이 기회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기회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나 없이도 잘될 수 있을까라는 교만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나 없이도 잘 될 수 있다. 우리가 두려워 피했던 일들을 수년 후에 어떻게 되었나 들어보면 그 폭풍우 속에서 견디어낸 주인공들의 간증을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이때”라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라고 한다. 이때를 위해서 왕후가 된 것인데, 잠잠하면 왕후는 왜 했는가? 잠잠하지 말라. 우리가 잠잠하면 일하는 사람이 있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은 우리를 착취하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무엇이 필요해서 우리에게 잠잠하지 말고 일어서 일하라고 하시는가? 사용하시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이다. 나를 필요로 할 때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의미이다.
요한 웨슬리는 말 타고 전도여행을 했다. 은퇴할 시기가 지나고 나이가 들어도 그는 여전히 말을 타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했다. 사람들이 그의 건강을 위해 복음도 좋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일을 줄이고 말을 타고 여행하면서 전도하는 일을 그만하는 것이 어떤가를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한다.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 보다는 닳아 없어지기를 바란다.” 우리 인생은 가만히 둔다면 녹슬고 뻑뻑 거려 안돌아간다. 깜빡거리며 치매에 걸릴 수 있다. 그러나 닳은 모습은 위대해 보인다. 녹슬면 슬프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하지만, 닳아있는 모습을 보라. 얼마나 바이올린 연습을 했으면, 얼마나 피아노연습을 했으면, 얼마나 공부를 했으면... 성경도 깨끗한 성경이 좋은 것이 아니라, 지저분한 성경이 좋다.
IV. 죽으면 죽으리이다
선택되어진 일들을 보면 아주 단순해 보이고 힘이 있어 보이고 깔끔해 보인다. 하지만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갈등과 고민이 있었겠는가!
박정희대통령이 5.16군사혁명을 하고 선글라스를 끼고 소장별을 달고 다른 참모들과 함께 혁명군으로 다부진 모습으로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한참을 보았다. 자신감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겉으로 볼 때는 그렇게 단호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걱정과 떨림과 갈등이 많이 있었겠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선글라스를 쓴 것도 눈으로 읽힐 수 있는 그의 마음을 감추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처음에 우리들이 늘 모일 수 있는 공간이나 하나 있으면 좋겠네요라는 교우들과의 소박한 공감에서 시작한 것이, 점점 일이 커지게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시점까지 이르게 되고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앞으로 있을 모든 싸인은 제가 해야 하고 싸인을 한다는 것은 어떤 회사를 결정하고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기에 쉽지 않다. 덜컥 겁도 났다. 떨렸다. 잠이 오지 않는 때도 있다. 어떻게 일을 추수려 나가지 고민이 된다. 일은 시작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일도 있다. 어떤 때는 네거티브하고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는 주여 어찌하오리이까라는 절망스러운 심정이 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표정관리가 되어야 되고 정리된 생각이 나와야 했다.
이때 제가 한 고백은 바로 에스더의 고백이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그 선까지 올 때는 고민과 갈등과 기도와 온갖 생각들이 번민스럽게 만들었지만, 마지막 결단은 나를 던지는 결단이요 정면승부를 거는 일이었다. 에스더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칠 것인가 아니면 이 한 몸 편히 살겠다고 잠잠하여 아무 말도 없이 지낼 것인가? 그녀는 갈 때까지 버팅겨 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기도로 무장한 다음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각오를 가졌다. 비슷한 표현이 창세기 43장에서도 나온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양식을 구하러 온 형들에게 그들의 막내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양식도 줄 수 있고 인질로 잡아둔 시므온을 풀어줄 수 있다고 했다. 아비 야곱에게 이러한 사실을 아들들이 말하자 아비는 결단코 용납하지 아니했다. 하지만 기근이 계속되고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막판에 밀려서 베냐민을 애굽으로 함께 가도록 허락한다. 그때에 마지막 결단이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는 고백이다.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하고 결단해야 하는 순간들을 당하게 된다. 어어어 하는 사이에 우리 앞에 놓인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시기를 놓쳐 버릴 수가 있다. 우리는 고민한다. 갈등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은 나를 던지는 헌신이 필요하다. 그 헌신은 뒤를 남기지 않는 헌신이다. 바닥을 친 헌신이다. 지난 주에는 [벧세메스로 향하는 소와 같이]였다. 설교를 다 하고 나니 한 형제가 소가 너무 억울해 보인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깨에는 안 매던 멍에를 매야지, 송아지도 떼어내야지, 벧세메스로 가면서 딴 짓도 못하고 바로 행하여 가서는 거기서 수레를 장작삼아 자신을 번제물로 드려야하니 얼마나 다 주는 것이고 억울한 일인가 싶다. 하지만, 어떠한 버터나 꿀을 타지 아니했다. 어쩌면 너무나 우리의 신앙이 샤머니즘적인 신앙으로 흐르고 기부엔 테이크라는 딱딱한 거래의 관계가 되는가 싶어 그렇게 하지 않고 드리는 것으로 시작하자고 했다. 헌신한 것에 대해 보상이나 축복을 언급하는 것은 인건비를 건져먹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보상을 바란다면 그게 무슨 헌신인가? 그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지. 그냥 주님 잡아잡수세요라는 심정으로 이 한해를 살자는 것이었다. 에스더는 자신을 죽으면 죽으리이다고 하면서 조국을 위해 던졌다. 그때까지 고민해 왔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던진 것이다.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바닥을 친 사람이다. 아직 죽으면 안되는데라고 미련이 있는 삶은 아직 바닥에 더 내려가야 하는 삶이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잃으면 잃으리이다. 이 결단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
V. 거기서부터 하나님은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내 손에서 힘이 다 빠질 때 일하시는 것이다. 야곱은 잃으면 잃으리로다라고 하면서 갔는데, 하나님께서 큰 선물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잃은 아들을 보고 민족이 구원을 얻는 것 아닌가!
에스더를 보라.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부탁을 받고 유다백성을 구하기 위해 한달 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아하수에로왕에게 나아간다. 에스더는 수산에 있는 유다인들을 다 모으고 금식기도하게 한다. 그리고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에게로 나아간다. 그때 왕후를 본 아하수에로는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그에게 내어 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홀 끝을 만지게 된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고 한다. 잘 차려입고 할 일은 다 했다. 그리고는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왕이 실수를 했든지 뭐든지 다 주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에게서 “죽으면 죽으리로다”라는 고백 후에 나오는 것임을 명심하고 살기를 바란다. 떨어지면 떨어지리로다. 망하면 망하리로다. 잃으면 잃으리로다. 안되면 말겠노라... 그것은 포기가 아니요, 모든 고민과 갈등과 기도의 끝에 내리는 결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