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화와는 작년(1917년)에 《거화》라는 프린트물 습작 동인지를 함께 간행한 바 있다. 당시 일본 유학 중이던 진건은 잠시 귀국해서 대구 본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거화》에는 이상화, 이상화의 동생 이상백, 백기만도 동인으로 참여했었다. 진건은 상해에서 만날 막내형 정건에게 자랑하려고 《거화》도 한 권 가방에 챙겨 넣었는데, 막내형수 윤덕경이 ‘검문당할 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니 가져가지 마세요’ 하고 말리는 바람에 지참물에서 제외했었다.
기차가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흔들린다. 그 순간, 진건의 머릿속에는 기차의 통상 속도가 얼마인지 알려주는 사건 하나가 떠오른다. 3년 전 서울 보성고보 다닐 때 학우들로부터 들은 내용이다.
“이토가 안중근 선생에게 처단되었지.”
“그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나라 사람도 아니지! 그런데 새삼스럽게 그 이야기는 왜 꺼내나?”
“하얼빈 거사 이전에 이토를 죽이려다 성공 못한 지사가 계시는데 그 분도 아는가?”
“그런가? 처음 듣는 이야긴데?”
1905년 11월 22일, 을사늑약 체결을 완료한 이토는 상쾌한 기분을 한껏 즐기기 위해 수원 일대로 사냥을 나섰다.
돌을 만지는 일이 직업인 23세 청년 원태우가 그 소식을 들었다. ‘이토를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원태우는 수소문 끝에 이토의 귀경 기차 시각을 알아내었다. 오르막인데다 길이 굽어 있어서 기차 속도가 최대한 늦춰지는 서리재가 공격하기에 최적 지점이라는 판단이 섰다.
시속 20∼30km가 1900년대 증기 기차의 보통 속력이었다. 서리재는 오르막이니 기차가 더 느리게 운행될 것이다. 원태우는 돌을 던져 이토의 얼굴을 정확하게 가격할 자신이 있었다.
예상대로 이토를 태운 기차는 정해진 시각에 서리재로 올라 왔다. 원태우는 둥글고 단단한 짱돌을 세차게 던져 이토의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이토는 망신살이 뻗쳤고, 현장에서 체포된 원태우 지사는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한 뒤 일제의 탄압과 감시 탓에 직장도 구하지 못한 채 어렵게 살아가게 되었다.(미주)
그렇다고 기차의 통상 시속을 일본 여성에게 설명하기 위해 원 지사의 의거를 예로 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고말고 …!’
혼잣말을 하듯 현진건은 몇 차례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전 아이의 이마에 흐르는 땀이 생생하게 보였듯이, 원태우 지사에게는 이토의 얼굴도 그처럼 분명하게 확인이 되었을 터이다.
어느덧 차창 밖은 사람 하나 없고, 어수선한 신의주 주변부 풍경이 연속으로 펼쳐지고 있다. 하염없이 유리창 바깥을 응시하던 현진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득한 그리움 속으로 잦아든다.
‘아이는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겠지만, 나는 오늘 아버지와 아내를 떠나 상해로 향하고 있다.
8년 전 6월 13일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내가 형을 만나고, 또 유학을 위해 중국으로 가고 있는 줄 아실 턱이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어언 그렇게 세월이 흘렀구나.
당신이 세상을 떠나고 두 달가량 지나 나라가 아주 망하고, 셋째아들인 형이 중국으로 망명하고 ….
1900년 9월 2일생인 나는 그때 겨우 열한 살이었어.’ (계속)
(미주) 원태우 지사에 대해서는 정만진의 오마이뉴스 2020년 6월 26일 및 7월 2일 기사 〈을사늑약 체결 후 수원으로 자축 여행 떠난 이토 히로부미〉와 〈돌팔매로 이토 면상을… 안중근 거사 시초가 된 이 사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s://omn.kr/1o4z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