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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9월 26일 목요일
[(녹)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홍]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 순교자
말씀의 초대
코헬렛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하고 말한다(제1독서).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다(복음).
제1독서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 코헬렛의 말씀입니다. 1,2-11
2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3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4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5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6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7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강물은 흘러드는 그곳으로 계속 흘러든다.
8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9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10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
11 아무도 옛날 일을 기억하지 않듯 장차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그 일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한가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허무로다, 허무!”(코헬 1,2)로 시작되는 코헬렛은 때로 독자를 당황하게 합니다. 유다교 안에서도 이 책을 경전에 포함시킬지를 두고 마지막 순간까지 주저하였습니다. 성경의 다른 책들과는 색깔이 다르고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비관적이고 회의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코헬렛은 인간 지혜의 한계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보았던 것처럼 잠언에서는 인과응보, 그것도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인과응보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더라도, 현실의 삶은 꼭 그렇게 질서가 있지만은 않습니다. 노고에 반드시 보람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코헬렛은 그런 세상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그러지 못합니다. 그가 이르게 되는 결론은 세상에 대한 밝은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지혜가 가지는 한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코헬렛 1장에서는 아직 거기까지 말하여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허무에는 분명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인간이 알 수 있다고, 또는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코헬렛은 인생의 신비를 다 파악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에 머문다면, 화답송 시편이 이러한 인간에게 주는 대답이 되겠습니다. “저희 날수를” 헤아린다는 것도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인간, 덧없이 사라지는 인간에게 안식처는 하느님이십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대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첫 번째 독서 코헬렛 말씀은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은 매일 백번 천번 곱씹고 되뇌어야 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입으로는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없다, 이미 다 버렸다, 다 내려놓았다고 외치지만, 끝까지 내려놓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물러서지 않는 오늘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비관적이고 회의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허무한 대상이 있고, 절대 그렇지 않은 대상이 있습니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저녁 연기나 아침 이슬 같은 대상들, 허무한 대상들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대상이 있으니, 보다 영속적인 대상, 보다 고귀하고 품위 있는 대상,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대상이신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분을 사랑하고 추종하는 영적 생활입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우리가 무엇에 목숨을 걸고 있는지, 어떤 대상에 최상위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 수시로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닌 대상, 뜬 구름 같은 대상에 절대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단 한 걸음만 물러서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일이었는데, 그 순간을 못 참아서 몇 날 몇 일을 두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때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도 건너고 맙니다.
사실 마음 크게 먹으면 모든 것 다 포용이 됩니다. 단 하루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머리 맞대고 으르렁대면서 싸울 일 하나도 없습니다.
목숨처럼 중요시여기는 TV채널, 크게 마음먹고 양보하면 아주 마음이 편해집니다. 안 보면 큰일날 것 같은 주말 드라마, 안 봐도 아무 일 생기지 않더군요.
심각해 보이는 형제의 결점, 눈 한번 찔끔 감아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용서 못 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이의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뿐 아니라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토록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들, 그토록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던 학벌, 직책, 성과, 업적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 특히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은 결국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더군요.
이런 우리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잘 나와 있습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당신이 그들을 쓸어 내시니, 그들은 아침에 든 선잠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 같사옵이다. 아침에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자신의 글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의 톤은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우울합니다.
“세상 만사 허무로다! 인생은 덧없구나.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보았을 것입니다.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려봤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시절이 가고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도 갔을 것입니다.
잘 나가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저자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덧없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재가 되고,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려도, 자취가 없이 사라져도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소중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몸부림쳐왔던 우리의 신앙 여정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우리 앞에 남을 오직 한 가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모아둔 영적 보화들입니다.
꽃을 시들고 잎은 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내 기도가 정말 기도인지 알아보는 확실한 방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모든 소식을 전해 듣고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소식을 듣는다는 게 헤로데에게는 자신이 죽인 요한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기도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입니다.
기도는 어둠에 있던 나를 점점 빛이신 주님께 들어 올리는 일입니다. 마치 어둡던 방 안에 햇빛이 들기 시작하면 떠다니는 먼지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처럼 주님께 다가갈수록 먼저 나의 죄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어쩌면 진정한 기도가 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영화 ‘미션’The Mission(1986)에서 로드리고 멘도사라는 인물은 예수회 선교사인 가브리엘 신부를 만난 후 엄청난 변화를 겪습니다. 멘도사는 처음에 과라니 원주민을 붙잡아 노예로 파는 무자비하고 완고한 용병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폭력, 탐욕, 권력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멘도사의 도덕적 타락은 분노에 차서 두 사람이 사랑했던 여자를 두고 결투를 벌여 자신의 동생까지 죽입니다.
멘도사는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연민과 겸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구현하는 예수회 가브리엘 신부를 만나게 됩니다. 이전까지 동생과 애인을 증오하기만 했던 그가 사제를 만나니 지금까지의 자기 죄악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노예로 팔아먹는 사냥꾼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멘도사를 정죄하는 대신 가브리엘 신부는 그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는 멘도자를 초대하여 자신이 노예로 삼은 바로 그 사람들을 돕는 임무에 자신과 다른 예수회 회원들과 동행하도록 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갑옷과 무기 등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넘어 과라니 종족이 사는 곳에 도달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떠납니다. 그들에게 다가갈수록 자신이 끌고 오는 짐의 무게는 그를 더 짓누릅니다.
과라니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원주민들은 그를 예전의 납치범으로 인식하고 복수를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대신 그들은 칼로 그의 짐을 끊어 떨어뜨려 버리고 그를 용서함으로써 그에게 자비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용서의 행위는 멘도사에게 해방을 안겨주고 그들을 위해 죽기까지 봉사할 결심을 하게 합니다. 그는 원주민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식민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예수회와 함께 싸우면서 사명의 수호자가 됩니다.
햇빛 속의 먼지처럼 멘도사의 죄는 가브리엘 신부와 높은 곳에 사는 과라니 종족에 가까워질수록 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이처럼 기도의 과정에서 하느님 사랑의 빛 안에서의 진정한 자기 성찰은 필수적입니다. 내가 성찰한다기보다는 저절로 나의 죄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용서를 깨닫고 주님께 충실할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기도로 자신의 영혼을 하늘과 빛으로 들어 올리는 모든 이가 겪는 과정입니다.
하느님께 갈수록 나의 죄가 크게 보여서 “내 탓이오!”가 저절로 나오고 다른 사람들이 판단되지 않으며 그 큰 죄를 용서해 주신 분께 찬미와 영광이 나오고 그분의 뜻을 위해 목숨을 내어줄 마음이 생기면 기도한 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건 기도한 게 아닙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내우외환(內憂外患)’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내우외환은 대나무의 마디처럼 더 높이 자랄 수 있는 디딤돌이 되지만, 시련과 아픔의 순간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 잘 날이 없다.’라고 합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는 없었던 일들이 본당에서는 파도처럼 밀려오곤 합니다. 오랜 동안 투석하는 어르신이 있습니다. 힘든 중에도 성체를 모시면서 기뻐하였습니다. 뜻하지 않는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들이 병원에 있는 자매님이 있습니다. 남편은 재활운동하면 된다고 하고, 아들은 자가 호흡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며 미소 짓는 자매님을 보았습니다. 욥에게 시련과 고통이 스나미처럼 밀려왔듯이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이 있습니다. 잘 되는 사업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변호사가 일을 처리하지만 비용은 지불해야 합니다. 건강하던 아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다행히 아들은 건강을 회복해서 퇴원했습니다. 노상강도에게 가방을 빼앗겼습니다. 불편함이 있지만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합니다.
알렉산드르 푸쉬킨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저는 이 시(詩)를 깊이 묵상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삶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난과 절망이 파도처럼 밀려온 적도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계절이 변하는 것처럼 제 삶에도 굴곡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제게 감당할 만큼의 용기와 위안을 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푸쉬킨의 글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요?
오늘 제1독서는 인생이 헛되다고 합니다. 모닥불이 아름답지만 재가 되듯이 건강했던 사람도, 지혜롭던 사람도, 권력을 지녔던 사람도, 부유했던 사람도 언젠가는 모두 한 줌의 흙이 되기 때문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는 노랫말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주는, 어둠을 밝게 비춰주는, 빛으로 하나가 되도록 이끌어주는 모닥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닥불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은 늙고 병들어 흙이 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깨달음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고, 천국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문화와 문명이 되었고, 역사와 신앙이 되었습니다. 마더데레사, 이태석 신부님은 기꺼이 모닥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이야기가 되었고 우리 삶의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면 결코 우리의 인생이 헛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부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권력, 명예, 재물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은 이미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갈 것 같은 인생의 이야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만났지만 어떤 사람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에 집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 모닥불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오늘의 성인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 순교자
인술도 신앙의 길도 함께 한 쌍둥이 형제 의술 베풀어...갖은 고문에도 신앙 지켜 순교
287~303. 아라비아 출생,
쌍둥이 형제. 의사와 약사의 수호성인.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는 아라비아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다. 시리아로 유학을 떠난 형제는 의학을 전공해 의사가 됐다.
이들은 이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시칠리아의 한 섬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의술'과 함께 '인술'을 펼쳤던 두 성인은 명의(名醫)로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는 무료로 진료해줘 사람들에게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또한 형제는 자신들을 찾아오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면서 마음의 고통까지 어루만져줬다.
때로는 기도를 통해 치유 기적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형제 성인의 청렴한 생활과 겸손한 자세, 늘 하느님께 기도하며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믿게 됐다.
303년 이탈리아 전역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의 바람이 불었고 두 성인도 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환자들은 물론 만나는 사람에게 늘 하느님 말씀을 전했던 터라 이들은 즉시 체포 대상이었다.
이들은 갖은 고문과 배교 회유 끝에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두 성인이 순교한 뒤에 성인의 전구로 인한 치유의 기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훗날 유스티아노 황제는 두 성인의 삶을 칭송하며 콘스탄티노플에 거대한 성당을 지어 봉헌했다.
교황 펠릭스 4세도 로마에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 성당'을 지어 많은 이들이 두 성인을 현양하도록 했다.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는 아라비아 태생으로 쌍둥이 형제였다고 전해오는데, 그들의 전기는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므로 전설적이라고 한다. 그들은 시리아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실리시아(Cilicia)의 에게해(Aegean Sea) 근방에서 살았는데, 그들의 의료기술이 남달리 뛰어나 그 명성이 널리 퍼져서 명의라는 높은 칭송을 듣고 살았다.
또한 열렬한 그리스도인이던 두 형제는 박해가 일어나자 실리시아의 집정관 리시아스(Lysias) 앞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다가 신앙 때문에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들 외에도 그들의 형제이던 안티무스, 유프레피우스 그리고 레옹시오도 함께 처형당하였다. 이들의 순교 후에 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또 그들의 높은 신앙심을 증명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고 전해온다.
고스마와 다미아노는 이발사의 수호자이고, 루카 복음사가 다음으로 의사들의 수호성인이다.
성 치프리아노 (Cyprian)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안티오키아(Antiochia)
활동연도 : +3세기경
같은이름 : 치쁘리아노, 치쁘리아누스, 치프리아누스, 치프리안, 키프리아노, 키프리아누스, 키프리안
성녀 유스티나(Justin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활동연도 : +3세기경
같은이름 : 유스띠나
• 역사적인 확실한 근거는 희박하나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또는 치프리아노)는 안티오키아에 살던 이교도로서 잡귀신들을 불러 마술을 부리는 마법사였다고 한다.
그는 이런 일 때문에 그리스, 이집트, 마케도니아 그리고 심지어는 인도까지 두루 여행하면서 그의 능력을 과시하고 추종자들을 모았다.
그런데 이교도 청년인 아글레데스란 사람이 안티오키아의 신자이던 미모의 성녀 유스티나(Justina)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키프리아누스에게 그녀의 사랑을 완전하게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고, 키프리아누스는 자신의 온갖 예식을 거행하였지만 유스티나의 신앙심 때문에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났다.
그는 자기 창고에 있는 모든 무기를 다 동원하여 유스티나에게 덤비는 악마를 불렀다. 그러나 유스티나는 십자가의 표지로 마귀들의 공격을 막아 내었다. 이에 그는 갑자기 자신이 무력해지면서 억누를 수 없는 어떤 무서운 힘에 압도당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자신이 오히려 위험한 지경에 빠진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악마의 도움을 구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악마가 그를 덮치고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지난날의 과오를 깊이 뉘우친 키프리아누스는 십자가를 만들어 악마의 세력에서 빠져나오는 행운을 맛보게 되자, 즉시 에우세비우스(Eusebius)라는 사제에게 달려가서 교리를 배우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온갖 마술 서적을 불태웠고,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희사하였으며, 마침내 아글레데스와 같이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사제가 되었고 또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성녀 유스티나는 수녀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어 다마스쿠스(Damascus)로 압송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고문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신앙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들은 황제 앞으로 끌려 나가 재판을 받았으며, 니코메디아(Nicomedia, 오늘날의 이즈미트)의 갈루스(Gallus)
강 언덕에서 황제의 명으로 참수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이때 성 키프리아누스를 찾아와 위로하였던 테옥티스투스(Theoctistus)라는 신자도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매장되지 않고 방치된 채로 있었지만, 6일 후 신자인 선원들이 발견하여 로마(Roma)로 옮겨 갔다고 한다.
이들의 유해는 루피나(Rufina)라는 귀족 부인의 영지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콘스탄티누스 성당 안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성 바오로 6세 (Paul VI)
신분 : 교황
활동지역 :
활동연도: 1897-1978년
같은이름 몬티니,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콘체시오(Concesio)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는 어려서부터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변호사였던 그의 아버지 조르지오 몬티니(Giorgio Montini)는 일간지 ‘브레시아 시민’(Il Cittadino di Brescia)의 편집자로서 반교회적 사상과 투쟁하였고, 어머니 주디타(Giuditta Alghisi)는 교회 여성운동의 지도자였다. 허약한 체질에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이었으나 총명하고 신심이 깊었던 그는 1903년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체사레 아리치 학교(Cesare Arici Institute)에 들어가 1914년까지 공부한 후 아르날도 다 브레시아(Arnaldo da Brescia) 고등학교를 거쳐, 1917년 브레시아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서 통학하였다.
1920년 5월 29일 사제품을 받고 그는 같은 해 11월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과 교회법을, 로마 대학에서 문학을 배웠으며, 1922년부터는 교황청 외교관 학교(Academia dei Nobili Ecclesiastisi)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 3월 폴란드 바르샤바(Warszawa) 주재 교황대사 보좌관으로 파견되었으나 그곳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11월 로마로 돌아와 1년 동안 교회법과 외교학을 연구한 후 1924년 10월부터는 교황청 국무원에서 근무하였다. 1925년에는 이탈리아 가톨릭 학생연맹(FUCI)의 지도신부로 임명되어 파시즘 학생연맹과 대립하여 싸우기도 했다. 1931년 다시 국무원에 근무하면서 교황청 외교관 학교에서 교황청 외교사를 강의하였다.
그는 1937년 12월 13일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교황청 국무원장 에우제니오 파첼리(Eugenio Pacelli) 추기경의 비서로 발탁되어 몬시뇰로 임명되었다. 1939년 파첼리 추기경이 교황 비오 12세(Pius XII)로 선출된 후에는 새 국무원장 루이지 막리오네(Luigi Maglione) 추기경을 보좌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포로 문제, 유대인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으며, 전쟁으로 집을 잃은 무주택자들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미국가톨릭복지협회(NCWC)와 교황청 간의 연락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국제 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is)와 국제 가톨릭 이주자위원회(International Catholic Migration Commission)의 설립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54년 11월 1일 밀라노(Milano) 대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며 왕성한 사목활동을 펼쳤다. 많은 성당을 신축 · 보수하고 사목방문에 힘쓰며, 교회를 떠난 노동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여러 작업장을 찾아다니며 복음의 사회교리를 설교하여 그들이 교회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힘썼다. 그는 평신도 사도직과 문화 활동을 장려하고 가톨릭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사회과학을 가르치도록 권했으며, 그리스도교 노조 활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청소년 문제에도 큰 관심을 두고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1958년 12월 15일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 10월 11일)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된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위원회와 실무조정위원회의 임원직을 맡아 공의회 제1회기(1962년)에 참석하였다.
1963년 6월 3일 교황 성 요한 23세가 선종한 후, 6월 21일 새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를 교황명으로 택하고, 6월 30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바오로 6세 교황으로 착좌하였다. 그는 곧 공의회의 속개를 발표했고, 제4회기까지 열린 공의회는 1965년 12월 8일 폐막되었다. 제4회기(1965년) 때 지역 주교들에게 교황에 대한 자문 권한을 부여하는 영속적 기구로서 주교대의원회의 설립이 착수되었다. 그리고 공의회의 후속 조치로 전례 개혁, 미사 중 모국어 사용,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대화, 이웃 종교인 및 무신론자들과의 대화 등 가톨릭교회의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타고 외국을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다. 1964년 1월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12월에는 세계 성체대회 참가를 위해 인도 뭄바이(Mumbai)를 방문하였다. 1965년에는 미국 뉴욕의 국제연합(UN) 본부를 방문해 평화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고, 1967년에는 터키 이스탄불(Istanbul)을 방문했다. 1968년에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속한 콜롬비아를 찾아 보고타(Bogota) 세계 성체대회와 메데인(Medellin)의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연합회 총회에 참석했으며, 1969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교회일치사무국과 중앙아프리카를 방문하였다. 1970년에는 아시아를 방문하던 중 필리핀 마닐라에서 암살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다수의 교황 문헌을 통해 교리를 해석하고 세상 속 교회의 역할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대표 문헌으로는 성체성사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재확인한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 1965),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의 공동 발전을 위한 방법들을 제안한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 부부 관계와 정결의 가치, 올바른 자녀 출산을 위한 부모와 의료인과 사목자의 역할을 설명한 “인간 생명”(Humanae vitae, 1968), 현대 세계에 부응하는 선교의 방향을 논한 “현대의 복음 선교”(Evagelii Nuntiandi, 1976) 등이 있다.
공의회 이후 전통주의자들의 반발과 국제 정세의 불안 등으로 어려움도 겪었지만,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평신도와 여성의 교회 참여를 증진하고 허례허식을 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의회 제3차 회기를 앞둔 1964년에는 여성, 수도자, 평신도의 공의회 입회를 허용했고, 1970년에는 여성 최초로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5일)와 시에나(Siena)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4월 29일)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또한 그는 교황으로 선출될 때 받았던 삼중관(tiara)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78년 8월 6일 카스텔 간돌포에 있는 교황 별장에서 미사를 드리다 심장마비로 선종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인 1963년 교황으로 선출된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65년까지 공의회를 이끌었으며, 공의회 문헌을 반포하고 결의사항을 실행해 나갔다. 1964년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해 정교회 수장이었던 아테나고라스 1세 총대주교와 만나 그리스도교 일치에 앞장섰고, 세계 성체대회 개최지인 인도를 방문하며 아시아 땅을 밟은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1965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를 제정했으며, 재임 기간 중 추기경단을 꾸준히 늘리고 제3세계 출신을 발탁하는 등 가톨릭교회의 보편성을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1969년 한국 최초의 추기경인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임명한 교황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은 2014년 10월 19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성 요한 23세와 더불어 가톨릭교회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이끈 주역인 제262대 교황 바오로 6세의 시복식을 거행하였다. 시복식은 바오로 6세 교황 재임 중 제정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 제3차 임시총회 폐막 미사 중에 이루어졌다. 바오로 6세 교황의 시복은 그의 전구(intercession)로 일어난 기적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5월 9일 승인함으로써 결정되었다. 본인과 태아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낙태를 종용받았던 미국 캘리포니아의 임신부가 한 이탈리아 수녀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그 수녀가 바오로 6세 교황의 상본(holy card)과 제의 조각을 임신부의 배에 놓고 기도한 뒤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2018년 10월 14일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가 열리는 중에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자신을 시복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성식 미사에서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바오로 사도처럼 새로운 경계를 넘어서, 복음 선포에서나 대화에서나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외향적인 교회의 예언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평생을 보내셨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당신 스스로 지혜로운 길잡이 역할을 하셨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더불어 우리의 공동 소명, 곧 성덕을 향한 보편적인 소명을 살라고 오늘도 우리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대충대충 사는 것이 아니라, 성덕을 살라고 권고하십니다.”라고 그의 성덕을 칭송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시성으로 역대 교황 중 성인은 82명(대립교황 교부 히폴리투스 포함), 복자는 9명이 되었다. 20세기 교황 중에서 성인품에 오른 이는 비오 10세(Pius X, 8월 21일), 요한 23세(Joannes XXIII, 10월 11일),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0월 22일)와 더불어 총 4명이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2월 6일 교황청 경신성사성을 통해 성 바오로 교황의 기념일을 제정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일반적 관례에 따르면 성인의 축일은 선종일로 지정하는데, 선종일인 8월 6일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임을 고려해 5월 29일을 선택 기념일로 지정했다. 5월 29일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1920년 사제품을 받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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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하고 혁신적이며 참된 그리스도인 성 바오로 6세 교황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편집장 안드레아 몬다는 41년 전 1978년 8월 6일 선종한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모습을 소개했다. 그는 1900년대 ‘가톨릭 운동’ 역사의 참된 주인공이었다.
Andrea Monda / 번역 이창욱
1978년 8월 6일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세속명: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의 ‘천상 탄일(dies natalis)’이다. 1900년대의 이 위대한 인물에 대한 이해는 하느님 백성 안팎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과의 영적인 가까움을 전혀 숨기지 않았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6년 재임기간 동안에는 그 이해가 더욱 증폭됐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선임자인 성 요한 23세 교황의 선종 이후 중단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무사히 재개했고,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을 반포했으며, 최초의 해외 사도적 순방과 교회 일치 운동에도 박차를 가했다.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브레시아 주(州) 콘체시오에서 태어나 냉전과 같은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로 기록됐던 그 끔찍한 해에 선종함으로써 20세기의 3분의 2를 거쳐간 그의 삶은 풍성한 모자이크화처럼 수많은 측면을 탐구할 수 있는 인물이다.
*정치적 차원
그 다양한 측면 가운데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말년 생애에서 필자는 그의 정치적 차원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지난 5월 22일부터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 실린 사회학자 주세페 데 리타(Giuseppe De Rita)와의 인터뷰 시리즈를 통해서다. 여기엔 이탈리아와 유럽의 위기, 서양 사회에 대한 커다란 난관의 순간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역할에 관한 대화가 담겼다. 데 리타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성 바오로 6세 교황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25-1933년 이탈리아 가톨릭 대학 연맹(Federazione Universitarià Cattolica Italiana, 이하 FUCI)의 전국 지도신부를 맡았던 순간부터 1900년대 정치에서 가톨릭 운동사의 참된 주역이었다. 이와 관련해 이 토론에 발제자로 참여한 약 25명의 학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특히 사회 투자 연구원(Centro Studi Investimenti Sociali, CENSIS)의 설립자 주세페 데 리타는 이탈리아 정치가 알치데 데 가스페리(Alcide De Gasperi)가 이끈 기독 민주당(partito della Democrazia cristiana)의 출범을 통해 전쟁의 비극에서 이탈리아가 벗어나는 데 있어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활동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강조했다. 이 견해는 이탈리아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긴 역동의 시기에서 또 한 명의 중심인물은 알도 모로(Aldo Moro)였다. FUCI에서 활동하던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몇 년 동안 알도 모로를 알았고, 끝까지 그와 함께했다. 5월 13일 라테라노 대성전에서도 기념비적인 언급을 통해 그를 기억했다. “주님께서는 이 착하고, 온유하며, 지혜롭고, 무고하며, 친구였던, 알도 모로의 안전을 위한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새로운 욥처럼,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은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 불과 3개월 전인 1978년 비극적인 봄에 일어난,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악(알도 모로의 암살)에 대해 하느님께서 갚아달라고 탄원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인터뷰 시리즈는 오늘 (이탈리아 주교회의 의장) 괄티에로 바세티(Gualtiero Bassetti) 추기경의 언급으로 끝을 맺는다(세 번째 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바세티 추기경은 다른 대담자들에 의해 부각된 예언이라는 주제에 관한 몇 가지 실마리를 얻으면서, 오늘날의 이탈리아를 위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활동적인 참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하면서도 혁신가들입니다. 신앙과 절제된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에 온유해야 합니다. 혁신이란 세상(세속)의 정신, 곧 이기주의, 허무주의, 소비주의와 외국인 혐오주의를 반대하며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예언적인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탈리아 주교회의(CEI) 의장이기도 한 바세티 추기경은 인터뷰에서 (이탈리아 정치가) 조르조 라 피라(Giorgio La Pira)를 언급했지만, (그 인물에 대한) 묘사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모습에도 아무런 문제없이 적용할 수 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온유하고 혁신적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인 오늘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천상 탄일을 기억한다. 지난 1978년 8월 6일 고령의 교황은 삼종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훈화를 마무리했다. “그 무엇과도 비할 데 없는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영예롭게 했거나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받은 책임인 말과 행동으로 논리적인 결과에 맞게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그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운명을 이미 맛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교회 전체도 그렇게 확신한다.
성 닐로 (Nilus)
활동년도 : 910-1004년
신분 : 수도원장
지역 : 로사노(Rossano)
같은 이름 : 닐루스
성 닐루스(또는 닐로)는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 지방 로사노 출신의 그리스인으로서, 젊었을 때에는 고향에서 세리 일을 맡아 보았고, 젊은 여인과 함께 살았으나 아내는 아니었다고 한다. 940년에 그 여인과 아이가 죽자 그는 캄파니아(Campania)의 팔마(Palma)에 있는 비잔틴 수도원에 들어가서 40년을 살았다. 그가 유명 인사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뛰어난 선성과 지혜 때문인데, 성 데메트리우스 코로네 수도원의 원장이 되면서부터 더욱 두드러졌다.
그는 사라센인들의 침략으로 수하 수도자들을 데리고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와 인접한 곳으로 피신하여 벨레루치오(Vellelucio)에 정착하였다. 성 닐루스는 임종하면서 벨레루치오를 자신의 수도원을 위한 새로운 장소로 선포하였고 그곳에서 그로타페라타(Grottaferrata)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그는 그리스 수도자의 아버지로 공경을 받는다. 그의 세 번째 계승자인 그로타페라타의 성 바르톨로메우스(Bartholomaeus, 11월 11일)는 성 닐루스가 세운 수도원의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졌던 그의 수제자였고, 스승과 같이 찬미가를 짓기도 하였다. 또 그는 노련한 서예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