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멋진 사나이’ - 이 말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도 언제나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며 늘 ‘신앙의 시련’에서 세상의 만가지 현상을 새롭게 피어나게 한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1483-1546)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1517년까지 수도원 골방에서 세상과 개인 영혼의 구원이라는 엄청난 주제로 기도의 향을 떠올리던 한 “가련하고 보잘것없는” 수도승 루터는 하나님의 힘을 입고 거친 현실로 뛰어들게 되었다.
왜 그렇게 하여야만 했을까? 이전 가톨릭 루터 연구가들처럼 루터가 단지 “가톨릭 교회의 변절자”요 “사악한 자”였기에? 요즘 가톨릭 학자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이것은 이제 시대에 어긋나는 말이다. 오히려 루터에게서 그들은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그것은 ‘바다’와도 같은 그의 풍성한 신학과 ‘삶의 스승’이요 ‘신앙의 스승’인 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서방 그리스도교에 늘 신선하고 맛깔스러운 원천의 향기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성 어거스틴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루터의 그것도 예외가 아니다. 현실이 없었다면 그의 신학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지금껏 약 115권으로 이루어진 그의 전집(바이마르 판: WA)은 그의 학적인 성실성과 목회자로서의 진지함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웃을 위한 목회 활동은 당연히 여러 활동장소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즉 그의 출생지요 타계 장소인 아이스레벤과 청소년시절을 보낸 아이제나하(잠시간의 유배지였던 봐르트부르크는 이곳에서 2-3 킬로미터 정도에 위치) 그리고 수도승과 사제가 되었던 에어푸르트와 그가 거의 전 활동을 펼쳤던 뷔텐베르크등을 들 수 있다. 이 장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에 필자가 탐방하였던 여정 순서대로 그의 신학과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2. 루터와 아이제나하/봐르트부르크 성(청소년기와 유배지)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성당학교에서 일년(1497/98)동안 공부하고 나서 루터는 아이제나하로 학교를 옮겼다. 지금은 `루터의 집'으로 보존되고 있는 코타 부부의 집에서 그는 1498년-1501년의 기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 집 2층에 올라가면 구석에 아주 조그마한 방이 한 칸 있다. 설명에 의하면 루터가 소년시절 여기서 숙식하였다고 하며 지금은 이 방 조그만 서가에 17세기에 간행된 루터 전집이 몇 권 걸려있다. 여기서 루터는 노래와 합창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것은 후에 찬송가 작가로서 그리고 언제나 명랑하고 쾌활하였던 루터에게 있어서 천성적인 것이 되었다. 1500년 당시 아이제나하의 인구는 4000여명 정도였으며 이곳은 광활한 숲이 두루 펼쳐있는 튀링엔 주의 이전 수도였다. 여기서 루터는 초기에 빵을 벌기 위하여 이 집 저 집을 돌며 노래를 하곤 하였다. 아마도 어느 정도 그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것을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루터는 이 기회에 다져진 신앙훈련으로 말미암아 학생으로서의 검소한 생활방식이 몸에 배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아주 당연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었다.
하나님께 아름다운 찬양으로 화답하였던 소년 루터는 이곳에서 또한 프란치스코회의 경건을 배우게 되었다. 고타 부부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하고 교양이 있고 출중한 명문 집안이었다. 여기서 닦게 된 신앙분위기와 여러 우정은 루터의 일생에 걸쳐서 샘솟는 활력소였다. 천성적으로 예민한 정신의 소유자인 소년 루터는 이곳에서 음악과 중세 경건을 담뿍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제나하에서 도보로 약 30-45분, 차로 10분 정도 산꼭대기로 올라가면 아름다운 삼림에 위치한 봐르트부르크 성이 나타난다. 성에서 우거진 초록세계를 담뿍 감상할 수 있다. 이것을 신선한 그림에나 비유할 수 있을까?
돌로 깎아 낸 성로(城路)를 따라 입구에 서면 우선 종탑에 달린 하이얀 십자가가 눈에 띈다. 보름스 국회에서 카알 대제를 알현한 가운데 종교개혁자로서 위엄 있게 신앙을 고백하던 루터, 그리고 나서 유배지의 길에 올라 갈길 모르던 루터가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과연 무슨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불안한 마음과 병마에 사로잡힌 루터, “나만 옳은 것인가”라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 극도의 회의를 품은 채 루터는 이곳에 들어섰다. 봐르트부르크는 현자(賢者)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영지에 속하는 성으로 휴양지로 보아도 좋은 곳이다. 그는 루터의 사건 전모를 은밀하게 진행시키기 위하여, 아니 자신의 유능한 신학자요 영적인 목회자인 루터를 보호할 목적으로 이 모든 일을 막후 조정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영토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폐습으로 말미암은 손실과 외부간섭에 대한 항의로 암묵적인 행동을 취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루터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기사로 변장을 하게 된다. 머리 스타일은 수도사형에서 장발과 구레나룻을 단 기사형으로 바뀌게 되었다. 극소수의 사람 이외에는 이 새로 입성한 기사가 누군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 기사 이름은 융커 외르크! 이곳에서의 생활은 활동적인 루터에게 있어서 감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자신의 친우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 곧잘 “밧모 섬에서” 혹은 “광야에서”라는 말을 붙이곤 하였다. 참으로 고독한 시절과 지나친 논쟁으로 말미암은 극도의 긴장감이 몰아쳐 끝내 루터는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루터는 아주 자그마한 방, 소위 “루터의 방”이라고 불리는 방에서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었다. 즉 그 동안 라틴어로만 읽을 수 있었던 성경을 민중의 신앙생활을 위하여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고자 하는 일이었다. 사실 이전에 여러 방언으로 된 독일어 성서번역이 있었지만 지방에 따라 쓰는 말이 달랐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그는 대중적인 언어이면서도 품위가 있는 말들을 골라 성경번역에 사용하였다. “가정에서 어머니와 뒷골목에서 아이들이 그리고 시장에서 일반사람이 어떻게 말하는가를 보아야”한다는 그의 번역 원칙이 여기서 빛을 발하였던 것이다. 신약의 희랍어 원문이 그 당시 시장바닥에서 사용하던 코이네 희랍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희랍어 원본에서 그는 4개월이라고 하는 아주 짧은 기간에 멋진 신약 독일어 성경을 창출하였다. 이 성경은 그 후에 독일어 형성 사에 있어서 지극히 중대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독일인은 루터를 통해서야 비로소 한 국민이 되었다!”(괴테). 최초의 독일어 신구약 성경전서는 1534년 9월에 뷔텐베르크에서 출판되었다.
이 성에서 또한 루터는 경건과 하나님의 은총을 온전하게 체험하였다. 이 시기에 쓰인 그의 글들을 읽어본다면 그의 하나님께 향한 절절한 간구와 로마 가톨릭에 대한 결연하고도 확고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글로 “마리아 찬가 강해”와 “수도원 서약에 대하여”등이 있다. 요컨대 봐르트부르크 성 체류기간에 루터는 본격적인 교회개혁을 위한 최종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3. 루터와 에어푸르트/어거스틴-은둔자 수도원 (대학 교육과 수도사 생활)
1992년에 1250회의 생일을 맞이하여 에어푸르트는 “독일의 중심에 위치한 에어푸르트”라는 모토 하에 여러 국제적인 행사를 치루었다. 2차 대전 이후로 사라진 에어푸르트 대학도 다시 소생되었다.
여기서 루터는 1505년에 문학 석사를 마쳤다. 그는 이제 어느 정도 부유하게 된 아버지 한스 루터의 소망에 따라 법학도의 길을 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7월 2일 수요일에 그는 만스펠트에 사시는 아버지를 방문하고 나서 귀가 길에 올랐는데 에어푸르트에서 약 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슈토테른하임이라는 마을 근교에 있는 슈톨베르크 고지대에서 벼락을 맞게 되었다. 갑자기 근처에 내리친 번개로 말미암아 루터는 말에서 떨어져 다리에 부상을 입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붙였다. 이때 그는 “성 안나여,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라는 서약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루터의 순간적인 결단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그의 마음의 고민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내가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접할 수 있을까”라는 인간 실존의 질문에서 시작하여 루터는 결국 인간의 한계상황을 통하여 처음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체험하였던 것이다.
루터는 정해진 절차를 마치고 13세기 중반에 탄생한 어거스틴-은둔자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그 수도원의 특별히 엄격한 금욕생활 때문이 아니라 여기서는 인문학부와 동일한 철학적-신학적인 방향이 지배적이었으며 루터는 거기서 동일한 정신으로 그의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고 기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풍성한 영적인 삶과 신학에 대한 관심에 있어서 출중한 곳이었던 것이다.
예비 신부의 과정은 1년 하루의 시간이 걸렸다. 이 수도원의 규정은 너무도 엄격하였기에 루터는 이 예비 기간에 다른 사람들과는 거의 접촉을 가질 수 없었다. 이곳에서의 엄격한 수도생활은 루터의 건강을 평생 해칠 정도였다. 그러나 루터는 이곳에서 성경을 더 한층 열심히 읽고 또 그것을 경건하게 들을 수 있었다. 수도사로서 루터는 수도원 예배를 상당히 진지하게 생각하였으며 이것을 최고의 것으로 간주하였다. 여기서 루터는 어려운 신앙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상담하곤 하였던 그의 영적인 아버지 요한 폰 슈타우피츠와 친교를 맺었다. 요컨대 루터는 경건하고 순결한 그리고 청빈한 수도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루터는 1507년 4월 3일에 에어푸르트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 때에도 루터는 자신을 다른 사람이 보기에 티끌만도 못한 존재로 보았기에 불행한 자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그의 `신앙의 시련'은 이러한 수도원의 엄격 생활로 끝났던 것이 아니라 그 시작에 불과하였다. “나는 수도사로서 지극한 열심으로 수도원 규정에 따라 살고자 무진 애를 썼다. 그렇지만 나의 양심은 결코 확신을 얻을 수 없었으며 언제나 절망하였다”. 또한 1510년 어거스틴 수도회 안에 일어난 분쟁을 해결하고자 루터가 로마로 파송되었는데, 이 로마 여행은 그의 생애 가운데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 여행이었지만, 루터에게 적지 아니한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하나님께 성실하며 신앙의 삶에 있어서 진지하였던 루터에게 있어서 로마 사제의 무지와 불경성(不敬性)은 크나 큰 쓰라림을 갖다 준 사건이었던 것이다.
4. 루터와 아이스레벤(태어남과 죽음)
아이스레벤 기차역에서 시내까지는 걸어서 20분, 버스로 10분 정도 걸리는데 통독된 이후로 아직도 시청 앞에 서 있는 레닌 동상이 눈에 띄었다. 아이스레벤은 참으로 조그마한 도시이다. 지금은 약 2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중세 이후로 활기를 띄던 구리 광업도 1990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루터의 아버지도 한때는 여기서 자그마한 구리 광산의 소유자였다. 도시가 언덕에 위치하였기에 시 밑바닥에서 보면 거의 모든 굵직한 건물들은 다 볼 수 있다. 통독되기 전 데모의 장소로 사용되던 루터 동상을 위시하여 그 오른쪽으로 그가 마지막 설교를 행하던 안드레아스 교회(이 앞쪽으로 그가 마지막 생애를 장식한 집이 있다), 시내 밑쪽으로 그의 생가와 이 근처에 그가 유아 세례를 받은 베드로-바울 교회가 위치한다.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농부였던 한스 루터와 마가레테 루터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전체 3층으로 된 그의 `생가'를 보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유복한 가정에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른 한편으로 참으로 그렇게도 위대한 루터가 상당히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구나 하는 느낌을 연신 갖게끔 하였다. 유아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그것은 루터의 가족이 1483년 초여름에 만스펠트로 이사하였기 때문이다.
루터가 `죽음을 맞이한 집'에 들어설 때 왠지 모를 음울함이 깃들였다. 한 위인이 죽은 장소를 직접 목도해서 그럴까. 아니면 죽음 앞에서 순간을 사는 우리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접해서 그럴까. 3층에 오르면 그 당시 루터가 쓰던 르네쌍스식 탁상과 의자 그리고 그가 죽음을 맞던 침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넓은 거실 그러나 작은 침대에서 다시금 하나님께 돌아가야만 하였던 한 인생을 회고하는 순간에 필자는 루터가 죽기 이틀 전에 이 탁상에 남긴 마지막 쪽지 글이 머리에 떠올랐다: “...일 백년을 예언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끌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성경의 저자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였다고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거지들이다. 이것은 참되다.” 이것은 참으로 한 탁발승이었던 루터의 삶과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몇 가지 사념이 필자에게 떠올랐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겸손과 성실 그리고 청빈으로 꾸미고 노심초사 고민하였던 십자가의 사나이 루터와 화려와 영광 그리고 부유를 추구하는 오늘날의 영광의 교회와는 어떠한 개신교적인 연결점이 있을까. 하나님 앞에서 무(無)로 돌아갈 줄 알았던 루터,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단순한 `삶의 스승'의 모습이 아닐까.' 루터의 죽음은 한 위인의 죽음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 교회 공동체를 위한 한 신앙인의 애절한 진리 추구의 본보기였다.
루터는 여러 병마로 시달렸다. 1521년에는 지나친 신경성으로 말미암아 불면증에 걸렸으며 약 1525년 이후로는 결석증에 시달렸는데, 이것은 1537년 슈말칼덴에서 그를 죽음의 문턱까지 이끌었다. 게다가 만성적인 이염(耳炎)도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병은 서서히 발병한 협심증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한 순간도, 심지어 죽기 직전까지도 쉬지 않았던 루터의 활동성을 간파할 수 있다. 루터는 만스펠트 백작의 소송 문제를 중재하고자 아이스레벤으로 여행하였는데, 이 여행에서 1546년 2월 18일 그의 파란 만장한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그의 시신은 2월 20일 장대한 행렬을 이루는 가운데 뷔텐베르크로 이장되었다.
5. 루터와 뷔텐베르크(삶과 신학)
“루터의 도시 뷔텐베르크” - 설레는 마음으로 도시에 들어섰다. 이 도시는 방사선식 도시 구조나 타원형 도시가 아니라 엘베 강을 끼고 직선형으로 형성된 도시이기에 큰 시로(市路)를 따라가면 루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유적지들을 순서대로 잘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서독과는 달리 건물관리가 제대로 안되었기에 저으기 식상한 마음이 앞섰지만 역시 루터의 도시인지라 그 당시의 인쇄물과 시설들은 원본 그대로 관람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 시기에 이 도시를 장식한 인물이 셋 있는데 첫째는 마르틴 루터요 둘째는 그의 친구이며 개혁 동역자인 필립 멜란히톤, 마지막으로 루터의 대부분의 초상화를 담당하였던 궁중화가 루카스 크라나하 1세였다.
`루터의 집'은 시내 입구 언저리에 위치한다. 이 건물은 전에 어거스틴회 수도원으로 쓰이던 곳인데 루터는 이전부터 이곳의 상용 객이었다. 이곳에는 약 40여 개의 수도사 독방이 있었으며 지금은 없어졌지만 건물 우측에는 본래 루터의 공부방이 있던 건물이 들어섰었다. 현재 건물 1층은 회의실로 쓰이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역사적 순간을 체험케 하는 ‘루터의 방’이 나온다. 큼지막한 루터의 책상과 학생들을 위하여 벽 둘레를 온통 긴 의자로 장식한 구조가 인상적이다. 바로 여기서 그 유명한 루터의 ‘탁상담화’가 나왔다. 이것은 루터와 그의 제자들이 식사나 학술적인 토론을 가질 때 루터가 행한 이야기들을 제자들이 받아써서 책(6권)으로 발행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쾌활한 루터, 진지한 루터, 신앙으로 인생을 즐길 줄 알았던 루터 - 한 마디로 말해서 세상에서 신앙의 삶을 멋지게 꾸릴 줄 알았던 한 인간 루터의 수수함을 감득할 수 있다. 지금 이 집은 종교개혁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루터 당시 인쇄된 그의 문서들이 원본 그대로 전시되고 있다.
루터의 집에서 시내 쪽으로 2-3분 정도 걸으면 ‘멜란히톤의 집’이 나온다. 매우 가까운 이웃에 위치하였기에 그 당시 루터와 멜란히톤의 아이들은 아버지의 우정에 견주기나 하듯이 서로 이 집 저 집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었던 것이다. 이곳도 멜란히톤(1497-1560)이 사용했던 실물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감회가 색달랐다.
뒤뜰에 가면 갖가지 꽃으로 장식된 정원이 나온다. 2층에는 학생들을 모아 토론을 나눌 수 있도록 꾸며진 그의 공부방이 있는데 그 중앙에 놓인 그의 책상과 이것을 중심으로 놓인 벽 의자는 ‘스승과 제자’, ‘권위와 존경’ - 이것은 그 당시 스승과 제자의 도리였다 - 을 물씬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멜란히톤은 루터의 사역에 있어서 오른팔이었다. 그는 1518년 어학 교수로 뷔텐베르크로 오게 되었다. 이곳서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에 심취하여 평생 그의 동역자로 살았던 것이다. 그의 큰 공로 중의 하나는 그가 루터의 독일어 성경을 수정하는 일을 맡았던 일이다. 그는 또한 신학에 있어서도 굵직한 최초의 개신교 조직 신학서인 “신학 해제”(1521년 초판)를 내놓음으로써 명실상부한 개신교 신학자로서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다.
시내 복판에는 루터와 멜란히톤의 두 동상이 서 있으며 그 우편으로 껑충하게 솟구친 네모 탑이 보이는 성 마리아 시(市)교회가 보인다. 이 교회는 1150년 경 그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오늘날에는 `마르틴 루터의 설교 교회'라는 아명을 갖고 있다. 시 교회는 또한 1522년 루터가 봐르트부르크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안드레아스 보덴슈타인(일명 카알슈타트)교수가 이끄는 과격한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성자상(聖者像)과 성자제단을 포함한 거의 모든 내부장식이 파괴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루터는 뷔텐베르크로 돌아와 그 유명한 사순절 설교들을 행하였던 것이다. 이 설교집에서 그는 우리는 진노의 자식이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사랑과 인내를 가져야 하며 “우리가 싸우는 것은 교황이나 주교들이 아니라 그 악마”라고 갈파하였다.
이 교회에는 최초의 개신교 교회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는 크라나하 부자(父子)가 그림으로 영광 돌린 제단이 있다(소위 `크라나하 제단'). 그것은 개신교 예배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세 성례, 즉 세례와 성만찬과 고해를 그린 부분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 분을 설교하는 마르틴 루터를 묘사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 교회는 아울러 루터의 동역자인 요한네스 부겐하겐(1485-1558)이 최초의 개신교 목사로 목회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 도시의 백미(白眉)는 역시 성(城) 교회이다. ‘종교 개혁’하면 떠오르는 루터의 95논제 - 이것은 성 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도 그 위치를 밝혀주는 빼꼼 솟은 타원형 망루 탑과 밝지만 소소한 외형, 깔끔하게 장식한 조촐한 실내 분위기, 루터가 설교하던 강단과 이 앞에 위치한 루터와 멜란히톤의 무덤, 루터 당시에 여러 게시문을 붙이곤 하였던 교회 정문(소위 論題門 - 지금은 사용되지 않음) - 이 모든 것이 성교 회를 특징짓는 모습이다. 이곳만큼은 아직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루터의 유적지를 보기 위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끊이지 아니하는 곳이다.
현재도 그렇지만 뷔텐베르크는 당시에 매우 미미한 도시였다. 1502년 프리드리히 선 제후가 뷔텐베르크 대학을 세웠으며 성 교회는 1507년에 대학교회가 되었다. 젊은 루터는 바로 이 대학에서 1508년 겨울에 도덕철학 강좌를 맡아 에어푸르트에서 뷔텐베르크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1511년 4월에 다시 이곳에서 교편을 잡고 1512년 10월 19일 아침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 1512년/13년부터 신학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우리 개신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는 성 교회 정문인데, 그것은 루터가 이 문에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를 반대하는 95논제를 직접 못박았다고 하는 전설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명심할 것은 루터의 작품이나 그의 입에서 이 논제 게시에 대한 신빙성 있는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단지 그의 개혁 동지인 멜란히톤이 그 논제 게시 사건을 회고하는 가운데 이 장면을 역사화 하였을 뿐이다. 아울러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알브레히트에게 자신의 95논제와 함께 한 통의 편지를 보내었던 이 날은 변함없이 종교개혁이 시작된 날인 것이다. 지금은 그 정문이 외곽만 제외하고는 다 타버리고 1858년 새로이 단장한 현 모습을 하고 있다.
루터의 95논제를 작성하게끔 하였던 가톨릭의 문서는 `지침 강요'였는데 이 문서는 마인츠의 수석주교요 선제후인 알브레히트가 면죄부 판매자들을 위하여 반포한 지침서였다. 이에 대하여 루터가 목회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신학적인 측면에서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의 신학은 인간의 구원이 여느 인간적인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의 전체 삶은 회개이어야 한다”는 그의 첫 번째 논제에 있었다. 이러한 신앙인에게 하나님께서 죄 사함을 선사해 주시는 것이지, 돈을 주고 사는 면죄부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투쟁은 루터의 평생에 걸쳐서 수행되었으며 그의 신학을 삶이라고 하는 망망대해에서 규정하였다. 이 소용돌이 한 가운데서 1530년에 열린 아우그스부르크 회담에서 반(反)진리에 대항한 최초의 `프로테스타치오'(항의 - 이 말에서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유래)가 일어났던 것이다. 여기서 제출된 `아우그스부르크 고백서'는 최초의 개신교 고백이었다.
스콜라 사변신학을 지칭하는 `영광의 신학'에 반대하여 “십자가, 십자가”를 외치며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신학'을 갈파하였던 루터, 깊디깊은 고독의 심연과 현실에 대한 애절한 절망함을 안고 한 평생 그리스도를 따라 줄달음쳤던 루터, 겸허와 청빈을 사랑하며 심오한 학식과 털털한 인격의 소지자 루터 - 이러한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를 영생으로 이끄는 구세주요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평안이 아니라 평생 시련 한 복판 가운데 있음을 깨우쳐주신 분이었다.
농민 전쟁의 폭풍우가 갓 지난 1525년 6월 13일 루터는 전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와 혼인을 맺었다. 이 혼인은 그 이후 매우 전형적인 개신교 가정생활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루터의 집’에 있는 그 넓은 정원을 카타리나 부인이 혼자 가꾼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억척스러웠던 `사모님'이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뷔텐베르크는 루터의 신학 사상의 온상지였다. 아울러 루터 덕택으로 뷔텐베르크 대학 또한 그 전성기를 맞이하여 젊은이들을 온 유럽에서 끌어들였다. 이곳의 출판업도 동시에 독일에서 가장 왕성한 발전을 입게 되었다.
6. 루터와 현실
이번 루터 여정을 특징짓는 것 중의 하나는 탐방도시 중 루터의 동상이 없는 곳이 한 곳도 없다는 점이다. 그만큼 루터의 정신이 동독 사람들의 생활 중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폐허화된 뒷골목, 소소한 옷차림, 유물 보관에 대한 어느 정도의 무관심 등을 맛본 여정이었지만, 이러한 뒷면에는 오늘날 통일 독일을 탄생케 한 서독 교회의 끊임없는 기도와 물질적인 지원이 있었음을 생각할 때, 아직도 얼마나 루터의 정신이 여기서 살아 움직이는가를 충분히 느껴본 순간들이었다. 민주화를 싹트게 하였던 그 마음 바탕에는 신앙이, 특히 루터의 마음을 뜨겁게 하였던 그 개혁적인 신앙 유산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제 필자는 개혁된 모습으로 세상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더 감당해야 할 한국교회의 모습을 기대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소원인 통일'을 이룸으로 초창기 선교 유적지를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우리의 온 교회가 먼저 개혁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개혁의 과정을 계속 밟아야 할 것이다. 1518년 루터가 `95논제 강해서'에서 말한 것을 기억하자.